미국 아이다호 주에서 오래 살았던 비노드 샤라는 남성은 얼마전 미국에서 쫓겨나 부탄으로 추방됐다. 정작 그의 국적은 부탄이 아니다. 부탄에서 쫓겨났지만 부탄은 비노드와 같은 네팔계 주민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는 ‘무국적자’인 것이다.
인도령 카슈미르에 사는 일부 파키스탄계 주민들, 쿠웨이트 사막의 유목민 베둔들, 도미니카에 사는 아이티인들, 한자녀 정책 시절 태어나 호적에 오르지 못한 중국의 ‘검은 아이들’, 그리스에 사는 몇몇 튀르키예계 주민들처럼 세계에는 국적이 없는(stateless) 사람들이 있다. ‘합법적’으로 존재할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 비노드는 스무 살 때 미국의 난민 정착 프로그램에 따라 인도의 난민촌에서 미국 아이다호주 트윈폴스로 이주해 영주권자가 됐고 20년 동안 일하고 결혼해 아이도 낳았다. 그러다가 2019년 폭행죄로 기소됐고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그것이 그가 다시 난민이 된 이유였다.

비노드는 법적으로 부탄인이 아닌 까닭에, 미국에서 쫓겨나 부탄으로 갔지만 거기서도 언제든 쫓겨날 판이다. 역시 부탄 출신인 ‘네팔 난민’ 아이스도 미국에서 쫓겨나 몇몇 다른 이들과 함께 부탄으로 보내졌지만 부탄 정부는 무국적자인 그들을 받아주지 않았다. 아이스는 이웃한 인도의 네팔 난민촌으로 다시 추방당했다. ktv 등 미국 지역언론들이 전한 국적 없는 네팔계의 사연들이다.
인도 북쪽, 히말라야 산악지대에 있는 부탄. 올 3월 미국이 부탄을 비롯한 12개국을 비자 발급 금지국 목록, ‘레드 리스트’ 초안에 넣었다는 뉴스가 나왔다. 빨간 딱지가 붙여진 이 리스트에 올라간 국가의 국민들은 미국에 들어갈 수 없다. 뒤에 조정돼 부탄은 레드보다 낮은 단계로 ‘추후 조치’가 필요한 국가들을 가리키는 노란색 명단, ‘옐로 리스트’에 포함됐다. 뉴욕타임스가 보도하면서 알려진 이 명단은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만든 것으로, 무려 43개국이 비자 발급 제한 대상으로 규정됐다. 이 나라들은 빨간색, 주황색, 노란색의 세 가지 목록으로 나뉘는데 레드 리스트 초안에 포함된 나라는 아프가니스탄, 쿠바, 이란, 북한, 소말리아, 베네수엘라 등이었다.
전쟁 중인 나라도 아니고 미국의 적대국도 아닌 부탄은 왜 미국의 요주의 국가가 됐을까. 미국 국토안보부 통계를 보면 2013~2022년 미국에서 추방된 부탄인 미등록 체류자, 트럼프 정부식으로 말하면 ‘불법 이주자’는 200명 정도다. 이민세관단속국(ICE) 데이터를 봐도 2021~2024년 4년 동안 이민법을 어겨 적발된 부탄인은 51명에 불과하다. 부탄인이 캐나다나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밀입국하다가 구금된 사례도 있긴 하지만 한 자릿수에 그치고 있다. 그런데 미국은 이 나라를 콕 집어 불법 이주민을 내보내는 나라라는 딱지를 붙였다. 무국적 네팔계 ‘난민들’ 때문이다.

부탄은 북쪽의 중국과 남쪽의 인도 사이, 히말라야 동부 산악지대에 있는 왕국이다. 면적은 4만제곱킬로미터가 채 못 되고 인구는 70만명 정도다. 오래된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대략 기원전 1세기에 불교가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13~14세기에는 중국 원나라(몽골)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국교는 바지라야나 불교다. 탄트라 불교, 밀교라고도 하는데 난해한 상징체계로 유명하단다. 16세기에 통일 왕국이 됐고 뒤에 영국 보호령이 됐으나 식민통치를 받은 적은 없다. 하지만 보호령 시절 영국령 인도에 땅 많이 빼앗겼다. 1907년 왕축 왕조가 수립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회경제적으로 인도와 밀접한 관계다. 불교가 국교로 돼 있지만 인도 영향 탓에 힌두교도가 인구의 20%가 넘는다.
이 나라 소식이 간혹 세상을 놀라게 할 때가 있다. 왕이 다스리던 나라에서 왕이 새 헌법을 발표하고 2006년 말 스스로 퇴위했을 때가 그랬다. 이듬해 첫 총선을 시작했는데 해를 넘겨서야 끝났다. 선거라곤 해 본 적 없는 나라였기에 혼란이 적잖았다. 2008년 11월 당시 28살이던 지그메 케사르 싱계 국왕이 즉위했고, 나라는 입헌군주국으로 바뀌었다. ‘위로부터의 변화’ ‘국왕의 민주주의 명령’에 세계의 관심이 쏠렸다.
‘은둔의 왕국’이라는 뻔한 수식어 외에 떠오르는 부탄의 이미지는 ‘행복한 나라’라는 것이다. 흔히들 ‘행복 지수가 높은 나라’로 알고 있지만 오해일 뿐이다. 정확히 말하면 현재 국민들이 행복한 나라라기보다는 ‘행복을 추구하는 나라’라 하는 게 맞겠다. 출발점은 1970년대 4대 국왕 드룩 곌포 보살이 제안한 ‘국민총행복(GNH)’이라는 국가 발전 모델이었다. 경제 성장보다 국민의 행복을 우선시하는 이 접근법은 크게 네 가지 기둥으로 구성돼 있다. 지속 가능하고 포용적인 경제 발전, 전통 문화 보존, 환경 보호, 그리고 좋은 거버넌스(통치)를 기둥 삼아 9가지 척도를 뒀다. 이 척도들이 정책을 정하는 기준이다. 부탄에서는 모든 정책이 GNH 사전영향평가를 거친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지속가능성이 화두가 되면서 2011년 부탄의 국민총행복 개념을 유엔도 받아들였고 유엔 총회에서 ‘행복 결의안’이 채택됐다. 행복을 인간의 근본적인 목표로 삼을 것을 촉구하는 결의안 65/309, 공식 타이틀은 “행복: 개발에 대한 총체적인 접근을 향해”라는 것이었다. 2012년 반기문 당시 유엔 사무총장은 부탄 총리의 제안을 받아들여 고위급 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의 논의에 따라 최초의 세계 행복 보고서가 발표됐고 3월 20일이 유엔이 정한 ‘국제 행복의 날’로 선포됐다.
Happiness : towards a holistic approach to development (resolution / adopted by the General Assembly)
UN Gross National Happiness Index
이달 초 유명인들 소식을 다루는 잡지나 온라인 매체들에는 ‘부탄의 케이트 미들턴(영국 왕세자비)’이라 불리는 왕비 젯선 페마가 서른 다섯 살 생일을 맞았다며 활짝 웃고 있는 최근 사진들이 소개됐다. 윌리엄 부부는 실제로 2016년 부탄을 찾아가 국왕 부부와 만나기도 했다. 젯선 페마 왕비는 2011년 결혼할 때부터 검소한 생활과 온화한 외모로 화제가 됐었다. 이번에 공개된 사진들에서도 젊은 국왕 부부의 미소 짓는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사실 잘 사는 나라라고 볼 수는 없다. 1인당 구매력기준 실질 국내총생산(GDP)이 2022년 1만4000달러였다. 평균기대수명은 73세로 세계 147위, 문자해독률은 70%로 역시 매우 낮은 편이다. 그래도 빈곤선 이하에서 사는 사람이 12% 남짓(2022년)인 것을 보면 저개발국치고는 양호한 축에 들어간다. 지속가능성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전력을 100% 수력발전으로 생산하기 때문이다. 실상 부탄은 경제 전체를 수력발전에 의존하고 있다. 전력을 생산해 대부분 인도로 수출해 돈을 번다. 얼마 안 되는 수출의 92%가 인도로 향하고 수입의 80%가 인도에서 온다. 관광객을 받기는 하지만 산업 구조가 특이하다. ‘고부가가치 저밀도 관광’을 내세워서 외국서 온 손님들에게 1인당 하루 100달러의 관광비용을 받고, 그걸 정부가 관광산업 종사자들에게 나눠주는 구조다. 환경보호에는 좋겠지만 관광수입이 늘어나기는 힘든 상황이다.

헌법에서 국토의 60% 이상을 삼림으로 유지하도록 규정해놓고 있는데, 현재 그보다 넓은 70%가 숲이란다. 내뿜는 탄소의 양이 흡수하는 양보다 적은 ‘탄소 네거티브’ 국가는 세계에서 중미의 수리남과 파나마, 그리고 부탄 세 나라 뿐이다. 부패인식지수(CPI)에서 세계 18위인 걸 보면 부패가 없고 투명한 듯하다. 보건의료 분야도 꾸준히 발전하고 있음. 국민 전체가 무상 의료 서비스를 누리고 기초교육도 정부가 무상으로 해준다. 그래서 빠르게 교육수준이 높아지고 있고, 청소년 문자해독률은 93%로 올라갔다. 분쟁이나 안보 불안도 없어서 작년 세계평화지수에서 21위를 차지했다. 특히 인도, 파키스탄, 스리랑카, 네팔 같은 주변 남아시아 국가들과 비교하면 부탄의 안정과 평화는 더욱 눈에 띈다. 성장을 도외시하면서 행복해지기는 쉽지 않다 하더라도 행복이라는 개념을 목표로 삼음으로써 다른 나라들이 겪었거나 겪고 있는 환경파괴, 극심한 빈부격차와 사회 갈등, 과도한 경쟁, 정체성 상실 등을 늦추고 있는 것이다.
그런 부탄의 어두운 과거가 바로 미국에서 쫓겨난 난민들을 통해 다시 드러난 네팔계 추방 작전이었다. 1980년대 후반 부탄은 인구의 거의 6분에 1에 해당하는 10만명 이상의 시민권을 빼앗아 무국적자로 만들었다. 휴먼라이츠워치의 조사에 따르면 당시 부탄 정부는 국경 지대에 네팔에서 넘어온 이들이 늘어나는 것을 극도로 경고했다고 한다. 네팔계 주민들은 부탄에 들어와 국적을 얻고 살다가 일순간 국적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인종청소’ 식으로 쫓겨난 이들은 네팔이나 인도의 난민촌에 살다가 기회를 잡아 미국 같은 나라들로 옮겨갔다. 특히 2008년 금융위기가 미국의 쇠락한 산업지대를 강타했을 때, 인구가 줄어든 오하이오나 펜실베이니아 등이 이 난민들을 대거 받아들였다. 오하이오의 레이놀즈버그 시는 인구의 5분의1인 8000명이 부탄 출신이다.
네팔계를 쫓아내고 행복을 추구해왔지만 요새는 부탄 젊은이들이 스스로 탈출을 꿈꾼다. 2020년 한국에서도 개봉된 <교실 안의 야크>는 부탄 수도 팀푸에 살던 교사 유겐이 산악 오지의 작은 학교에 발령받아 일어나는 일들을 그렸다. 고산지대의 초원과 드높은 푸른 하늘, 해맑고 순수한 아이들에게서 배우고 깨우치는 젊은 선생님. 하지만 결말은 서글프다. 호주 이민을 꿈꾸던 유겐은 결국 떠났고, 시드니의 술집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영화는 끝난다.
현실도 비슷하다. 세계은행 자료에 따르면 2020년 해외로 나간 사람이 1만2400여명이었는데 작년에는 2만5000명으로 두 배가 됐다. 53%가 대학 졸업자들이고 49%는 공무원이었다. 주로 향한 나라는 호주, 인도, 미국 등이다. 고학력 경제활동 인구가 이렇게 나가는 것은 분명한 ‘두뇌 유출’이고, 부탄의 발전과 공공서비스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세계은행은 지적했다.

부탄은 국민총행복 개념의 원조이고 성과도 없지 않았지만 실제 국민들 행복지수는 높지 않다. 유엔 지속가능발전 솔루션 네트워크가 갤럽 조사와 전문가 분석을 바탕으로 발행하는<세계 행복보고서> 최근 판에는 부탄 자료가 없고 2019년 보고서에서는 랭킹 95위로 나와 있다. 경제 상황, 교육, 보건의료 등의 지표를 종합해 유엔개발계획(UNDP)이 발표하는 인간개발지수(HDI)에서는 2023년 125위였다. 나라가 꽁꽁 닫혀 있을 때에는 큰 불만이 없었을 것이다. 부탄은 세계에서 TV가 가장 늦게 들어간 나라다. 1999년에야 TV 금지령이 풀려 주민들이 방송을 볼 수 있게 됐다. 수십년 동안 현대 세계에서 고립돼 있었던 것이다. 인터넷도 늦게 풀렸다.
한번 풀리니 통신은 폭발적으로 늘었다. 2003년 0%였던 휴대전화 보급률이 10년 새 60% 가까이로 늘더니 2021년에는 100%가 됐다. 2023년 말에야 유엔의 ‘최저개발국’ 리스트를 벗어났을 정도로 발전이 늦었는데 국민들이 바깥 세상을 알게 되면서 현실과 기대의 괴리가 두드러졌을 것이다. 부탄 언론 BBS는 젊은이들이 해외로 가려는 것에 대해 “호주 같은 나라는 더 높은 수입 잠재력, 더 나은 교육기회, 유연한 비자 정책으로 청년들이 목적지가 되고 있다”면서 민간 부문이 부족한 것, 기회가 적은 것이 두뇌 유출을 부른다고 지적했다. 부탄이 쫓아낸 네팔계가 미국에서 다시 쫓겨나고, 그들을 다시 부탄이 쫓아내는 사이에 부탄의 젊은이들은 밖으로 향하는 현실. 그것이 글로벌 이주의 흐름이다. 그들 모두가 행복추구권을 보장받을 수 있을까.
'딸기가 보는 세상 > 구정은의 '현실지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정은의 ‘현실지구’]ATM 처음 들어간 투발루 (1) | 2025.05.24 |
---|---|
[구정은의 ‘현실지구’] 중국의 천인계획, 미국의 유학생 내쫓기 (1) | 2025.04.26 |
[구정은의 '현실지구']러시아의 '이케아 공격'과 리투아니아의 불안 (0) | 2025.03.29 |
[구정은의 ‘현실지구‘]민주콩고, 르완다, 트럼프의 미국 (0) | 2025.03.01 |
[구정은의 '현실지구'] 중국 경제, 트럼프가 아니라 시진핑이 문제다 (0) | 2025.0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