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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 일상생활의 구조>

딸기21 2025. 11. 20.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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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 일상생활의 구조
페르낭 브로델. 주경철 옮김. 까치. 11/20


엄청 방대하고 재미있다!!!



(경제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전산업화 시기 의 유럽(유럽 이외의 세계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배제하는 것도 문제이지만)의 발전은 인류역사의 분기점인 산업혁명이 도래하기까지 점진적으로 시장, 기업, 자본주의적 투자라는 합리적 세계로 들어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실제로 관찰한 19세기 이전의 현실은 훨씬 더 복잡하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묘사하기 좋아하는 것은 이른바 시장경제이다. 그러나 불투명한 영역, 흔히 기록이 불충분하여 관찰하기 힘든 영역이 시장 밑에 펼쳐져 있다. 그것은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고 어마어마한 규모로 존재하는 기본활동의 영역이다. 지표면에 자리 잡고 있는 이 폭넓은 영역을 뜻하는 더 알맞은 이름이 없어서, 나는 이것을 물질생활 혹은 "물질문명"이라고 명명했다.
시장이라는 광범한 층의 밑이 아니라 그 위로 활발한 사회적 위계가 높이 발달해 있다. 이런 위계조직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교환과정을 왜곡시키며 기존질서를 교란시킨다. 시장경제의 투명성 위에 위치하면서 그 시장경제에 대해 일종의 상방 한계를 이루는 이 두 번째의 불투명한 영역이 내 생각으로는 다름 아닌 자본주의의 영역이었다.
-16-17

오늘날에도 한편에는 또다른 세계가 있어서 그곳에 특별한 자본주의, 즉 내 생각에 진정한 자본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거대한 동인도회사들이나 혹은 다양한 규모의 독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다국적 성격을 띠고 있다. 푸거 가문이나 벨저 가문의 기업들은 유럽 전체에 관심을 두었고, 인도와 스페인령 아메리카에 동시에 대리인을 두었으므로, 오늘날의 초국가적 기업과 같은 것이 아닐까?
일치점들은 그 외에도 더 찾을 수 있다. 1973-1974년의 위기의 결과로 일어난 경제불황 동안, 비록 근대적인 형태를 띠기는 했지만 비 시장경제가 번성했다. 거의 적나라한 물물교환, 용역의 직접교환, 이른바 "암거래 노동", 그리고 수많은 종류의 가사노동이나 집에서 직접 하는 허드렛일 등이 그것이다. 그것은 적어도 GNP의 30-40퍼센트를 차지하면서도 모든 통계에서 빠져 있었으며, 심지어 공업화된 국가에서도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 그리하여 이 삼분법적 도식은 내가 의도적으로 모든 이론을 배제하고 단지 구체적인 관찰과 비교사의 방법으로만 이 책을 써갈 때 참조표가 되었다.
여기에서 비교란 우선 시간을 통한 비교로서, 장기 지속과 현재-과거의 변증법이라는 언어를 통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결코 나를 실망 시키지 않았다. 또한 공간을 통한, 첨언하자면 가능한 대로 가장 넓은 공간을 통한 비교였다. 왜냐하면 나의 연구는 내가 접근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전 세계의 차원으로 확대되었으며, 다시 말하면 "세계화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관찰이 가장 중요한 점이다. 우리가 파악한 광경을 그대로 유지한 채 삶 그 자체의 표시인 폭넓음, 복잡성, 이질성을 살펴본다는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나의 의도였다.
-18-19

아마도 18세기의 경제 회복과 함께 도처에서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확대되었을 것이다. 세계의 모든 나라가 내부지역을 자체 식민화하여 공휴지나 반쯤 놀려두던 땅에 사 람들을 채우기 시작했다. 유럽은 생활공간 확대와 식량 증대의 이득을 보았는데, 한편으로는 해외 식민지 덕분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마블리 신부가 말하듯 "야만성"을 벗어난 동유럽 덕분이었다. 아메리카 대륙 역시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이 같은 상황에 있었다. 인도 역시 비슷해서 뭄바이 근처 의 레구르라는 흑토지역에 식민화가 시작되었다.
팽창은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이다. 진짜 문제는 이것이다. 공간은 늘 있었는데 왜 같은 시간에 지리적 콩종크튀르(conjoncture geographique)가 작용했는가? 바로 이 동시성이 문제이다.
-56-57

이 단성합창의 원인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일반적인 대답은 하나밖에 없다. 기후 변화이다.
14세기에는 북반구가 전체적으로 기온이 내려가서 산지의 빙하와 바다에 떠 있는 빙하군들이 이전보다 더 팽창했고, 겨울 추위가 더 가혹해졌다. 이때부터 아메리카로 가는 바이킹들의 항로가 위험한 빙하들 때문에 끊겼다. 루이 14세의 시대는, 데릭 쇼브의 표현을 빌리자면, "소빙하기"였다.
중국에서도 17세기 중반에는 자연재해 -엄청난 가뭄, 비처럼 쏟아지는 메뚜기 떼 등-가 잇달았고 루이 13세 시대의 프랑스에서와 같이 농민반란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이 모든 것이 물질생활의 변동에 어떤 보충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아마도 그 동시성을 설명해줄지 모른다.
-58-59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문명에 대해서 진짜 위험한 "야만인들"이 거의 한 부류의 종족에 속했다는 점이다. 구세계의 심장부에 위치한 사막과 스텝 지역의 유목민이 그들이다. 대서양에서부터 태평양 연안에 이르기까지 메마르고 버려진 지역들이 마치 화약심지처럼 사슬 모양으로 연이어 있어서, 조그마한 불똥이 튀더라도 곧 불이 옮겨붙어 그 전체 길이만큼 모든 것을 태워버렸다.
우리의 기억 속에 몇몇 에피소드 정도가 남아 있지만 (훈족, 아바르족, 헝가리족, 몽골족 등의 정복) 그것을 본격적으로 겪지 않고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이 유럽의 이점이다. 유럽은 동쪽의 여러 민족들이 막아 줌으로써 보호받은 것이다. 즉 그들의 불행이 유럽의 평온의 원인이었다.
…말하자면 일종의 릴레이 경주가 벌어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알렉산드르 쿨리셰르와 예브게니 쿨리셰르라는 두 명의 탁월한 역 사가가 이 "조용한 역사"를 보는 견해이다. 독일에서부터 중국에까지 이르는 지하수 같은 이 흐름은 마치 역사의 피부 밑에 숨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121-125

진흙기가 있는 물은 땅의 지력을 새로 보강시켜주면서도 말라리아를 옮기는 학질 모기가 살기에는 적당하지 않기 때문에 일종의 축복과도 같았다. 15세기의 앙코르 와트는 많은 논을 진흙기가 있는 물로 관개하는 찬란한 수도였다. 시암족이 이곳에 쳐들어왔을 때 공격 자체 가 멸망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반면에, 농업시설을 부수고 생활방식을 뒤집어놓은 결과 운하의 물이 맑아졌고 그와 함께 말라리아가 기승을 부리게 되었으며 결국에는 숲이 다시 침투하게 되었다.
-193

사치는 사실 그 어느 것으로도 메울 수 없는 사회적 수준의 차이를 반영하며, 이 수준 차이는 매번 변동이 있을 때마다 새로 생겨난다. 이것은 영원한 "계급투쟁"이다. 이 투쟁은 계급만이 아니라 문명의 투쟁이기도 하다.
산업혁명 이전에 성장이 한계에 부딪친 사회 속에서, 사치는 생산된 잉여를 부당하게, 건전하지 못하게, 그러나 멋지게 비경제적으로 사용하는 일이었다.
-244-245

사탕수수는 갠지스 삼각주와 아삼 지방 사이의 벵골 연안이 원산지이다. 중국에는 8세기경에 사탕수수가 도입되었는데, 광저우 근처의 광둥 성의 기복이 심한 지역에서 잘 적응했다.
수 세기 동안 광둥 성은 중국의 설탕 생산의 핵심지역이었으며, 17세기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이곳에서 중국과 타이완 설탕의 유럽 수출을 어렵지 않게 조직했다. 그러나 다음 세기 말에는 중국 자체에서 코친차이나로부터 아주 싼 가격으로 설탕을 수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부 중국은 아직 이 사치를 모르고 있었다.
10세기에 사탕수수는 이집트에 도달했고 이곳에서는 발전된 방식으로 설탕을 제조했다. 십자군 원정 군인들은 그것을 시리아에서 보게 되었다. 생-장-다크르가 함락되고 시리아를 상실한 뒤(1291) 설탕은 기독교인들의 짐 속에 들어가서 키프로스로 옮겨져 이곳에서 빠른 성공을 거두었다. 아랍 상인들이 유통시키던 설탕은 키프로스에서 성공을 거두기 전부터 이미 시칠리아에서, 그러고 나서 발렌시아에서 번성했다. 15세기 말에는 모로코의 수스 평야에 도달했고, 곧 이어 마데이라 섬, 아조레스 제도, 카나리아 제도, 그리고 기니 만의 상투메 섬과 프린시페 섬에 도착했다.
1520년경에 설탕은 드디어 브라질에 이르렀으며 이곳에서 16세기 후반부터 확고하게 번성을 구가했다. 이때야말로 설탕의 역사에서 한 페이지가 넘어 간 것이다.
사탕수수와 설탕 제조 "기구(engins)"는 17세기에 마르티니크 섬, 과들루프 섬, 네덜란드령 퀴라소 섬, 자메이카 섬, 그리고 산토도밍고에 도달하게 되었고, 이곳에서 1680년경부터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때부터 설탕 생산은 끊임없이 증가했다.
-298-299

사탕수수의 보급은 열대기후 지역에만 한정되었다. 중국에서 사탕수수가 양쯔 강을 넘어 북부로 가지 못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또사탕수수의 재배에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고(아메리카에서는 흑인 노예를 사용했다), 값비싼 기구를 설치해야 했다. 사탕수수는 축력, 수력, 풍력을 이용해서, 아니면 중국에서처럼 사람의 팔 힘으로 롤러를 움직여서 으깨야 했다.
사탕수수의 재배와 설탕 제조는 결국 많은 자본과 중개점의 고리들을 요구했다.
또다른 장애물이 있었다. 기욤 레날 신부에 의하면 "아메리카의 한 식민지에 식량을 공급하려면 유럽의 한 지방을 경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식민지에서는 식량 재배용으로는 거의 한 조 각의 땅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식량을 자급자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300-301

그러한 선전 때문에, 혹은 그와 같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커피는 파리에 널리 보급되었다. 17세기 말에는 커피 행상이 등장했다. 이들은 튀르키예인 복장을 하고 터번을 두른 아르메니아인들이었는데, 끈을 두른 광주리에 커피 제조기, 화로, 잔들을 담아가지고 다녔다.
조금씩 카바레가 카페 때문에 밀려나게 되었다. 이 유행은 독일, 이탈리아, 포르투갈에서도 똑같았다. 리스본에서는 브라질에서 들어온 커피의 값이 매우 쌌고 게다가 여기에 집어넣는 설탕 역시 값이 싸서, 한 영국인에 의하면 커피에 설탕을 얼마나 부어넣는지 잔 속의 티스푼이 서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344-345

18세기 중반부터 파리를 넘어 프랑스 전체에서 커피 소비량이 크게 증가했다. 유럽이 자체적으로 생산을 조직했기 때문이다. 1712년부터 자바 섬에 커피나무를 옮겨 심기 시작했다. 1716년에는 부르봉 섬(레위니옹 섬)에, 1722년에는 카옌 섬(따라서 커피나무가 대서양을 횡단하게 된다)에, 1723-1730년에는 마르티니크 섬에, 1730년에 자메이카 섬에, 그리고 1731년에 산토도밍고 섬에 커피나무를 심었다.
-347

의상의 색깔과 원료, 형태를 바꾸는 아주 경박한 사회야말로 사회계층의 질서와 세계지도를 바꾸려고 하는 사회이다. 이 사회는 전통에서 벗어나려는 사회이며 미래는 바로 이런 사회에 속한다.
아마 모든 진보의 도구인 혁신의 문을 열기 위해서는 의상, 신발과 머리모양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서 일종의 조바심이 필요한 것 아닐까? 동시에 발명의 움직임을 지탱시켜줄 일종의 부유함이 필요한 것 아닐까?
나는 유행의 문제에서는 특권층 사람이 어떤 비용이 들더라도 추종자들과 구분되기를 원해서 일종의 장애물을 설치하려는 욕구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또한 사회의 번영으로 일정한 수의 새로운 부자들이 특권을 가지게 되고 전진해갔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회적 상승이 있다는 것은 그 사회가 어쨌든 유복하다는 것을 확인해준다. 물질적 진보가 없다면, 어느 것도 그렇게 빨리 변화하지 못할 것이다.
-426-427

모든 일이 강제적인 필요의 산물만은 아니다. 인간은 달리 어쩔 수 없으므로 먹고 입고 집을 짓고 살지만, 그래도 그가 하는 것과는 다르게 먹 고 입고 집을 짓고 살 수도 있다. 유행의 급변은 이것을 “통시적으로” 이야기하고, 현재와 과거의 매 순간 세계의 대립은 이것을 "공시적으로” 이야기한다.
결국 상품과 상징과 환각과 환상과 지적 사고들의 이상한 조합인 문명이 이 게임을 주도한다. 간단히 말하여 물질생활의 심층에까지 까탈스럽게 복잡한 질서가 형성되며 여기에 경제, 사회, 문명이 가지는 함의, 경향, 무의식적 압력이 함께 작용하는 것이다.
-437-438

더운 사막은 단봉낙타의 지역이다. 이 짐승은 냉기에 약하고 산악지역에도 맞지 않는다. 추운 사막과 산악지역은 쌍봉낙타의 영역이다. 아나톨리아와 이란을 경계로 이 두 종류의 짐승이 나뉘어 분포해 있다.
그렇지만 이 현명한 분할은 오랜 과정의 결과였다. 단봉낙타가 사하라에 오게 된 것은 서력 기원이 시작될 무렵이었으며, 이곳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7-8세기에 아랍의 정복 때부터, 그리고 11-12세기에 "대 유목민들(grands nomades)"이 도착하면서부터이다.
한때는 단봉낙타가 북쪽으로 메로빙거 왕조의 갈리아 지역에까지 퍼져나가기도 했다. 동쪽에서는 쌍봉낙타의 정복이 불완전했지만, 19세기까지 발칸 지역들을 관통해서 퍼져나갔다. 북부 중국도 마찬가지로 쌍봉낙타의 팽창 속에 휩쓸 려 들어갔다.
이슬람권은 이 힘 좋은 동물을 이용하는 데에 거의 반 독점권을 누리 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52-453

산업혁명 이전에 이미 선행단계가 있었다. 가축의 힘을 더욱 잘 이용하게 해주는 멍에의 발전, 나무를 태워서 얻는 힘, 강이나 바람을 이용 하는 초보적인 모터, 게다가 더 많은 인력의 투여 등에 힘입어 15-17세기에 유럽은 어느 정도 성장했다. 1730-1740년대부터 점점 더 가속화된 발전은 바로 이러한 앞 시기의 팽창에 근거한 것이다. 흔히 인식할 수 없거나 잘 알려지지 않은 전산업혁명(pre-revolution industrielle)이 있었다.
꿈의 기계나 이미 실현된 기계들이 완전히 이용되는 데에 아직 모자랐던 것은 잉여 에너지, 게다가 이동이 손쉬운, 말하자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에너지였다. 도구류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끊임없이 개선되었 다.
증기가 사용되면서 유럽에서는 모든 것이 마치 마술처럼 가속화되었다. 그러나 이 마술에 대해서는 설명이 가능하다. 그것은 미리 준비되었고 사전에 가능하도록 만든 것이었 다.
-490-491

우리는 기술의 기초가 얼마나 둔중한지를 보았다. 혁신은 그 사이로 느리게 비집고 들어갈 따름이다. 흔히 대포, 인쇄술, 원양 항해를 15-18세기의 기술혁명이라고 한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중 어느 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중에서 원양 항해만이 세계의 불균형, 또는 "비대칭"을 만들어냈을 따름이다. 대개 모든 것이 결국은 전파되고 만다. 만일 어떤 기술이 그렇게 한곳에만 남아 있다면, 이웃 문명이 그것을 진정으로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509

이슬람의 배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 역시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그들이 손쉽게 인도양을 횡단하는 직선 항해를 한 것은 아마도 몬순의 교대를 이용할 수 있던 덕이었다. 여기에 더해 그들은 천문 관측의, 고도 측정기 등에 관한 탄탄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고… 이런 조건하에 있으면서도 왜 신드바드의 후예들인 아랍인이 세계를 지배하지 못했을까? 잔지바르 남쪽과 마다가스카르 이남에서 암흑의 바다의 입구로 향하는 지점, "남쪽으로 격렬하게 휘몰아쳐가는 모잠비크 해협의 가공할 해류"가 시작되는 지점 직전에서 왜 아랍의 항해가 멈추었을까?
우선 아랍의 항해는 15세기까지 이슬람권이 구세계를 지배하게 만들었으며, 그 결과는 사소하지 않았다. 게다가 수에즈 운하를 이용할 수 있는데(7-8세기) 왜 희망봉 항로를 취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곳에서 무엇을 얻겠는가? 금, 상아, 노예 등은 이미 잔지바르 해안이나 사하라 사막 너머 나이저 강 만곡 지역에서 이슬람 상인과 도시를 통해서 얻을 수 있다. 아프리카 서부에 굳이 가려면 "어떤 필요가 있어야만 했다. 그렇다면 서구의 장점은 "아시아 대륙의 곶" 정도에 불과한 좁은 곳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세계를 필요로 했으며, 밖으로 나가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 아닐까?
돈이나 자본이 원양 항해를 만들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당시 중국과 이슬람은 오늘날 우리가 식민지라고 부르는 것을 가진 부유한 사회였다. 그 옆의 서구는 아직 "프롤레타리아"였다. 중요한 것은 13세기부터 장기적인 긴장이 물질문명을 흥기시켰고 서구세계의 심리를 변형시켰다는 점이다. 역사가들이 황금에 대한 갈망, 세계에 대한 갈망, 혹은 향신료에 대한 갈망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새로운 것에 대한 추구, 실용적인 적용에 대한 추구가 늘 함께 있었다.
-544-545

우리에게 화폐가 너무 부족하다면, "해결책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우리는 은행을 세워야 한다"이다. 크레딧을 만들어내는 기계, 기존 화폐의 효과를 높이는 기계인 은행을 세우자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센세이셔널한(연금술보다도 더 센세이셔널한!) 발견이었으며, 대단한 유혹이 아닐 수 없었다! 금속화폐가 굼뜬 것이 오히려 경제생활의 첫새벽에 은행가라는 필요한 직업을 만들어냈다.
금속화폐와 보조 화폐, 크레딧 도구 사이에 절대적인 성질의 차이가 있는가? 그렇게도 많은 논쟁의 문을 연 이 문제는 또한 근대 자본주의의 문제이기도 하다.
-637-638

화폐의 기술은 다른 모든 기술과 마찬가지로 그것에 대한 수요가 명백히 드러나고 집요하게 오랫동안 반복될 때에만 응답한다. 경제적으로 발전할수록 그 나라가 가진 화폐 도구 및 크레딧 도구의 범위가 넓어진다.
화폐경제에 의해서 국제적인 화폐 통합이 이루어지더라도 모든 사회는 나름대로의 자리를 차지한다. 어떤 사회는 특권적인 자리를, 어떤 사회는 뒷자리를, 또 어떤 사회는 대단히 불리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화폐는 세계를 통합시키면서도 또한 세계에 불의를 저지른다.
-641

물질생활은 무엇보다도 무수히 많은 잡다한 사실들로 구성된 일화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이것을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 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물질생활의 중요성을 과장하게 되고 그 성질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사건이 아니라 평범한 사실이다. 이것은 역사의 먼지이며, 조르주 귀르비치가 미시-사회학(micro-sociologie)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미시-역사학(micro-histoire)이다. 이 작은 사실들은 끝없이 반복되면서 연쇄적인 현실들로 자리 잡는다. 침묵하는 여러 시간들의 두께를 지나왔고 현재에도 지속되는 수천 수만의 이 작은 사실들 각각 하나가 나머지 모든 것들을 증명해준다.
내 주의를 끈 것은 바로 이러한 연쇄(suite, chain), "시리즈(serie, series)", 그리고 "장기지속"이다.
-753

여러 규칙성들 가운데에서도 우리가 전면에 부각시킨 것은 문명과 문화에 관한 것이었다.
정신과 지성에 관한 것으로부터 일상생활의 물품과 도구에 관한 것까지 수많은 문화적 자산들 사이에 관계를 정립하는 것, 다시 말해서 질서를 정립하는 것, 그것이 문명이다.
-754

많은 페이지에 걸쳐서 나는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사치와 빈곤이라는 삶의 두 측면에 대해서 이야 기했다. 이것은 일본에서나 뉴턴 시대의 영국에서나, 혹은 콜럼버스 발견 이전의 아메리카에서나 단조로울 정도로 확고한 진리였다.
막연한 단어인 사회보다는 차라리 사회경제(socio-economie)를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사회와 경제라는 두 좌표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 또한 확실하다. 원인이면서 동시에 결과인 국가가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를 띠고 등장하여 관계를 교란시키고 왜곡시키며, 또 원하든 원하지 않는 사회경제의 구조물 형성에 때로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755

물질생활이라는 소박한 차원의 현실에서 벌써 장기, 문명, 사회, 경제, 국가, "사회적" 가치의 위계 등과 같은 문제들이 제기된다는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이 차원의 역사가 이미 불가사의함과 어려움을 가지고 제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은 결코 용인될 만한 단순화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 인간형으로 축소되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헛된 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을 아주 단순한 양태로 파악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인간은 원래의 평상적인 복잡성을 띠고 다시 나타난다.
-756

경제생활과 함께 우리는 관습, 또는 무의식적인 일상성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경제생활은 아직 규칙성을 띠고 있다. 먼 과거에 시작되어 점진적으로 발달해온 분업은 매일매일의 활동적이고 의식적인 삶을 지탱하는 분리와 만남을 가져온다.
가장 꼭대기 층에는 자본주의와 그것이 사방에 펼쳐놓은 광대한 그물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세계를 활성화시키고 상층의 구조를 끊임없이 변형시키는 것은 크든 작든 이 불평등, 부정의, 그리고 모순이다. 이 상층의 구조만이 진짜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부분이다.
물질생활이나 일상적인 경제생활이라는 유연성 없는 경제구조 앞에서 자본주의는 원하는 대로, 또 가능한 대로 간섭해 들어갈 수 있는 영역을, 또는 반대로 포기할 수 있는 영역을 선택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 요소들을 가지고 끊임없이 자신의 구조를 다시 만들며, 그러면서 조금씩 조금씩 다른 구조들을 변형시킨다.
이것이 전자본주의가 세계 경제의 모습을 창출하도록 만드는 요소이다. 그것은 모든 위대한 물질적 진보인 동시에 인간에 의한 인간의 가혹한 착취를 가져온 원인이며 그 표시이다. 그것은 인간의 노동인 "잉여가치"의 수취에 의한 것만은 아니며, 힘이나 상황의 불균형에서도 기인된다. 그러한 불균형 때문에 한 국가의 차원이든 전 세계의 차원이든 상황에 따라 언제나 정복할 곳이 생기고, 다른 것보다 더 큰 이윤을 얻을 수 있는 착취 분야가 생 긴다. 선택한다는 것, 선택할 수 있다는 것, 비록 그 선택이 아주 제한적이라고 해도 그것은 얼마나 큰 특권인가!
-757-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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