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의 파괴는 지구의 파괴다
안드레아스 말름 지음, 추선영 옮김. 장원. 10/18

<팔레스타인의 파괴는 지구의 파괴다>라는 제목은 강렬하고 도발적이다. 하지만 6만 명 이상을 학살한데다 그 중 일부는 ‘굶겨죽인’ 이스라엘의 행위가 세계의 모든 규범을 파괴하고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비견될 충격을 안겨주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스웨덴의 좌파 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안드레아스 말름의 이 책은 이스라엘의 그 충격적인 행위를 서구 제국주의의 행로와 연결해 설명한다. 2023년 10월 이스라엘의 가자 침공이 시작된 이후 쓰인 ‘긴급 고발’ 성격의 작은 팜플렛으로, 화석연료로 지구를 파괴하는 자들이 이스라엘의 학살 행위를 지지하는 자들과 동일한 세력임을 강조한다.
책은 1840년의 ‘아크레 전투’로 시작한다. 오늘날의 이스라엘 지중해 해안도시인 아크레는 당시 오스만투르크로부터 떨어져나와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한 이집트 권력에 장악된 요새 도시였다. 영국은 석탄으로 움직이는 증기선을 이 전투에서 처음으로 전장에 투입해 이집트 군대를 격파했다. 유서 깊은 십자군 도시이기도 했던 아크레는 완전히 초토화됐다. 화석연료를 발판으로 이뤄진 영국의 중동 침략의 시작점이었다.
그 시기 증기선의 연료는 석탄이었으나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를 거치면서 세계는 석유 시대로 들어간다. 20세기 초반 영국은 이라크 석유를 팔레스타인까지 끌어다가 정제해 지중해로 수송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이것과 동시에 몇몇 영국인들 사이에서 유대국가라는 ‘상상’이 싹텄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귀찮은 유대인들을 그 땅으로 보내 영국의 이익에 맞게 산업화를 주도하게끔 한다는 것이 영국의 구상이었고, 거기에서 현대 이스라엘이 보여주는 지구파괴적인 폭력성의 출발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1840년 영국의 공격에 불타는 아크레와 2025년(이 책이 쓰여진 시점을 기준으로 하면 2024년)의 가자를 연결짓는 것은 파괴, 학살, 초토화다. 두 사건 사이에는 영국의 지원을 받은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건국(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나크바’, 대재앙), 중동 석유를 노린 서방 거대 에너지기업들의 이해관계, 이스라엘을 중동의 ‘전략자산’으로 삼은 미국이 있었다. 저자의 표현을 빌면 가자의 참상 뒤에 버티고 있는 것은 “한두 가지 사건이 아니라 지극히 깊은 심층 구조”(107쪽)인 것이다.
팔레스타인 파괴가 지구의 파괴인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지금 세계 사람들에게 충격을 던지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행위 자체가 보여주는 잔혹성과 민간인 살상의 규모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사회가 함께 만들어온 규범의 파괴가 첫번째 지구 파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스라엘의 행위가 전쟁범죄이고 제노사이드(종족 말살)라는 데에는 국제사회에서 합의가 이뤄져가고 있는 듯하다.
이스라엘은 이 과정에서 규범을 계속해서 후퇴시키는 전술을 쓰고 있다. 잔학행위와 불법행위에 대한 질책이 나오면 “동일한 행위를 반복하는 방식으로 대응하여 더 이상 그것을 문제삼을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가는 것, “미친듯이 날뛰는 재범”으로 비판을 무력화하는 전술을 쓰고 있다. 규범의 한계를 저 뒤편으로 계속 밀어내서 무감각하게 만들고, 깡패의 존재를 현실로 인정하게 만드는 것. 이스라엘이라는 대리인 뒤에서 하마스로 상징되는 중동의 저항을 무력화해 더이상 도전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미국이다. 그러므로 이 잔혹함과 규범 파괴는 미국의 공조 하에 이뤄지는 행위다.
두 번째, 이 책의 저자가 주장하는 에너지와 환경 측면에서의 지구 파괴다. 전쟁은 그 자체로 환경 파괴다. 엄청난 화학물질이 하늘과 땅과 물에 퍼진다. 땅과 사람을 죽이는 전쟁 무기는 또한 화석연료로 가동된다. 하지만 이런 단순한 연결고리를 넘어,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초토화할 수 있게 허용한 모든 역사적, 정치적 과정이 화석연료에 기반을 두고 있다. “1917년(영국이 ‘밸푸어 선언’으로 유대국가 수립을 약속한 해)과 그 이후, 팔레스타인의 석유 자원을 수단으로 삼아 중동을 화석 자본의 기초로 변형시키는 작업의 일환으로 영국의 팔레스타인 점령이 이루어졌다. 1947년과 그 이후에는 그 질서가 완성되었고 1967년과 그 이후에는 그 질서를 지켜냈다. 팔레스타인을 파괴해 온 단계들은 곧 지구를 파괴해 온 단계들이었다.”(108쪽)
이 부분은 조심스럽게 읽을 필요가 있다. 서구 아닌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모두 자원 싸움으로 독해하는 것, 중동의 모든 일들을 석유라는 렌즈로 바라보는 것은 지나치게 단면적이다. 서구를 비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서구 아닌 곳의 자율성과 그곳 사람들의 의지를 무시한 채 오히려 서구 중심주의를 되풀이하는 게 될 수 있다. 또한 자칫 ‘모든 게 석유 때문’이라는 식의 단순화나 음모론으로 흐를 수 있다.
이스라엘이 지금 벌이고 있는 제노사이드에 화석연료는 원인으로서 몇 퍼센트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까? 화석연료가 ‘원인’이라고 지목하기엔, 이스라엘 내부의 전쟁 동인이 너무 많다. 하지만 원인이라 주장하지 않더라도, 전쟁 전부터 진행돼왔고 전쟁 기간에도 계속 벌어지고 있는 일을 지적할 필요는 있다. 저자는 동중국해의 천연가스전 개발에 몰두한 이스라엘, 그들과 협력하는 셰브론이나 BP 같은 거대 에너지 기업들, 거기에 편승하려는 걸프의 에너지 자본을 한데 묶는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채굴 플랫폼도, 굴착 장치도, 파이프라인도, 런던증권거래소에 상장된 기업도 없다. 당연하게도 아랍에미리트 및 이집트의 아랍 사람들과 사우디아라비아는 그것들 모두를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 자본과 걸프 자본을 통합하는 것, 바로 이것이 아브라함 협약의 정치경제학이다. 처음에는 팔레스타인을, 다음에는 지구를 파괴하는 현상유지를 신성화하는 것, 바로 이것이 정상화의 정치생태학이다.”(113쪽) 미국 도널드 트럼프 1기 정부의 주선으로 아랍에미리트와 이스라엘이 손을 잡았던 아브라함 협약을 저자는 이런 시각으로 분석한다.
이 부분에서 저자가 이스라엘의 직접적인 ‘화석연료 이익’으로 언급하는 동지중해 가스전 문제는 조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중해 동부, 그러니까 이스라엘과 레바논과 팔레스타인 앞바다에서 대규모 해상 천연가스 매장이 발견되면서 이 지역의 경제적 잠재력뿐 아니라 지정학적 마찰 소지가 더 커진 것은 사실이다.
이스라엘 연안에 위치한 레비아탄(Leviathan) 가스전은 동지중해에서 가장 큰 가스전 중 하나다. 2025년 8월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350억 달러 규모의 계약을 가스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9월에는 이스라엘 가스를 들여가기 위한 6억 달러 규모의 파이프라인 건설 계약에서명했다. 가자 전쟁 때문에 이스라엘은 잠시 레비아탄과 카리시(Karish) 두 가스전을 일시 폐쇄했는데 이 때문에 이집트는 전력 중단 사태를 맞았다. 그에 따른 대응이 가자 전쟁이 한창인 판에 이스라엘과 손을 잡는 조치였던 것이다.
팔레스타인 앞바다에도 가스전이 있다. 그러나 가자 마린(Gaza Marine)이라는 이름의 가스전은 2000년에 발견됐지만 거의 개발되지 못했다. 완전한 돌더미로 파괴된 가자지구를 누가 어떻게 재건할 지는 알 수 없지만, 돈과 에너지 없이는 불가능하다. 200만 명이 살던 땅을 그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미국과 유럽과 걸프 국가들 모두 재건에 돈을 대야 할 것이고 혹자는 재건 사업을 투기적인 기회로 삼으려 할 것이다.
그래서 얘기되는 게 팔레스타인의 자원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봉쇄와 방해 때문에 팔레스타인은 자국 자원을 활용할 기회를 지금껏 빼앗겨왔다. 앞으로 가자지구에 ‘새 정부’가 들어선다 해도 가자 마린을 개발하려면 이스라엘의 승인을 받아야 할 것이며, 정치적 불안정성은 늘 팔레스타인의 재산권 행사를 방해할 것이다. 팔레스타인 해역에서의 가스 탐사조차 이스라엘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
전쟁 때문에 벌어지는 지구 파괴, 전쟁 과정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땅 빼앗기와 자원 다툼. 비슷한 일은 우크라이나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좌파’들 중에는 블라디미르 푸틴의 제국주의 야심을 여전히 옹호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러시아와 친해질 때의 경제적 이익을 거론하면서 ‘북극항로’의 분홍빛 미래에 대한 헛꿈을 꾸는 정치인들도 보인다. 기후 대응 시대에 화석연료 지정학에 매달리는 행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가자 전쟁을 포함해 자신이 “7개의 전쟁을 끝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가자의 미래를 낙관하는 사람은 없다. 스웨덴의 정치생태학자인 저자는 이 책에서 역사적 진행과정을 되짚으며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국가를 세우는 일은 유대인들이 아닌 영국인들의 상상에서 시작된 것이었다고 강조한다. 뒤에 유대인들이 정치적 이해타산 속에 이를 수용하고 그들 스스로의 시오니즘으로 만듦으로써 유대인들의 식민주의로 재탄생한 식민주의라는 것이다.
200년 전 영국은 팔레스타인을 사람이 살지 않는 빈 땅으로 ‘상상’했고 유대인들은 그 논리를 밀어붙여 시오니즘의 신화로 만들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좁은 가자지구로 내몰렸는데 이제 그곳마저 이스라엘은 폐허로 만들었다. 영토 장악을 기반으로 하는 “정착민 식민주의의 정점은 집단 학살을 통한 절멸”(101쪽)이며 그것이 지금 세계 앞에 펼쳐진 장면이다. 이스라엘 대통령 이츠하크 헤르초그가 2023년 가자 전쟁을 ‘문명과 야만’의 전쟁으로 묘사한 것은 제국주의의 메아리다.
팔레스타인 저항단체들은 그럼 지구의 벗일까.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여러 다양한 세력들이 있고, 지속가능성이나 친환경 정책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저자는 팔레스타인 저항세력을 소리 높여 응원하자고 말하지만 그가 이 책에서 줄곧 주장한 지구 파괴에 대한 비판과 모순이 생길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책 뒷부분에 이스라엘 좌파 학자 마탄 카미네르의 반론이 실려 있다.
카미네르는 “1840년 영국 증기선의 공격을 받은 이집트 권력자는 대중이나 환경 편에 선 사람이 아니었다”면서, “여성, 자연, 식민지를 착취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지 않거나, 대안 모색을 포기한 상태에서 종속 계급들과 종속 국가들의 정당한 분노를 동원하여 전 세계 패권과 싸우는 운동”인 ‘반체제 운동(counter systemic movements)’의 연장선상에 팔레스타인 저항운동을 올려놓는다. 그러면서 이 책의 저자 말름이 하마스조차도 “화석자본주의에 공모하고 있음을 등한시”한다(158쪽)고 비판한다. “헤즈볼라가 레바논과 이스라엘의 해상 국경을 따라 개발된 가스전들을 분할하는 거래를 승인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가자 지구의 통치자들도 기회만 주어진다면 지속불가능한 채굴이라는 일확천금을 얻고 있는 이웃 국가들의 행태에 동참할 것”(159쪽)이라는 게 카피네르의 주장이다.
화석연료 기득권 세력을 비판하는 저자의 논리와 카피네르의 반론, 둘 다 일리가 있다. 둘 다 새겨들을 이야기다. 다만 중요한 것은, 지속가능성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화석연료가 아직 세계 경제의 동력으로 존재하는 상황에서 팔레스타인인들에는 그 자원을 이용할 기회마저 차단하려 하는 것이 정당한가, 아니 그걸 떠나 가자지구 사람들을 ‘친환경적이지 못하다’고 지적하는 것이 지금의 학살 상황에서 도대체 와닿는 주장일 수 있나 하는 점이다.
팔레스타인 저항세력을 비판한 카미네르를 향해 저자 말름이 재반박한 내용도 실려 있다. 이 논쟁은 팔레스타인 역사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좌파들의 낯선 논쟁이나 조금은 사변적인 글로 읽힐 수도 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목소리들을 접할 기회라 생각하고 일독하면 좋을 듯하다. 이스라엘보다 ‘정도’가 덜했을 뿐, 하마스 역시 민간인을 겨냥한 전쟁범죄를 저지른 것은 사실이다. 급진 좌파임을 숨기지 않는 말름은 팔레스타인 저항세력 가운데 하마스가 아니라 좌파 조직인 팔레스타인인민해방전선(PFLP)에 강한 동료의식을 보여준다. “언제나 나의 최대 조직이었던 PFLP”(173쪽)라고 고백할 정도다.
하지만 그는 하마스를 겨냥한 양비론과는 딱 잘라 선을 긋는다. 실제로 양비론에 빠지지 않으려면 팔레스타인 내부의 다양성에도 관심을 가져 볼 필요가 있다. 또한 말름은 재반론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의 행적을 언급하면서 ‘무장투쟁’이 저항하는 이들에게 갖는 의미를 설명하는데,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이 또한 읽어볼 만하다. 하마스가 이슬람주의자들이라고 비판하는 이들은 지금 이 지역에서 가장 극단적인 종교 집단은 바로 이스라엘 유대 극우파임을 직시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또 하마스의 10월 7일 공격(‘알아크사 홍수’ 작전)이 이스라엘의 전쟁을 촉발했다는 주장에 대해 저자는 “과도한 탄압에 대한 책임을 피해자 탓으로 올리는 것,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지배를 유지하려는 광란의 시도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207쪽)이라 비판한다.
책 말미에는 저자에 대한 또 다른 반론 하나가 실려 있다. 저자는 이스라엘의 정착민 식민주의가 미국과 결탁돼 있음을 강조하면서 ‘이스라엘 로비설’을 비판한다. 이스라엘은 중동에서 미국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이며, 결코 로비 때문에 미국이 이스라엘을 편들어 주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좌파는 이스라엘 로비설을 단호하게 끊어 내야 한다. 이스라엘 로비설은 우리가 제국과 식민 당국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126쪽)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음모론 비슷한 유대인 로비설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로비가 아니라 미국 제국주의가 ‘몸통’이라는 주장은 좌파의 기계적인 도식처럼 들릴 수도 있다. 책에는 자칫 이런 주장이 ‘제국의 이익’을 고정된 것으로 보게 만들 수 있다는 반론도 실려 있다. 미국이 몸통이라는 저자의 주장에 대해 반론을 쓴 에드 맥널리는 “이스라엘의 완전무결한 통제라는 음모론자의 관점은 우리를 맥 빠지게 하지만, 미 제국을 꿈쩍하지 않는 단일 조직체로 이해하는 낡아빠진 관념들 역시 우리의 진을 뺀다”(218쪽)고 지적한다.
아마도 진실은 저 두 가지 관념이 가리키는 것들 사이에, 뒤죽박죽 섞인 채로 존재할 것이다. 한국에서 사라지지 않는 ‘유대인 로비설’의 막강한 위력을 생각하면 저자의 주장에 의미를 둘 수밖에 없지만, 이 문제에서는 “이스라엘은 미 제국에 전략적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있으며 또한 그것은 지속적인 후원을 보장받기 위한 이스라엘의 로비 활동의 역할이 고조되고 있음을 시사한다”(218쪽)는 맥널리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한 말름의 재반론도 실려 있지만, 그 내용과 별개로 이 책이 나온 뒤에 출범한 트럼프 2기 정부의 움직임을 보면 미국 내부의 정치적 극우화가 이스라엘에 대한 편들기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 또한 덧붙여야 할 것 같다.
200쪽 조금 넘는 작은 책에 여러 생각해볼 거리들이 넘쳐난다. 화석연료 이권을 가자 침공과 연결짓는 저자의 전체적인 논지 자체가 논쟁거리가 될 수 있다. 이스라엘이 가자 학살로 저지른 지구 파괴 가운데 첫번째 측면인 ‘규범 파괴’는 두 번째 측면인 ‘지속가능성 파괴’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저자는 둘을 연결하면서도, 강력한 인과관계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화석 연료 제국이라는 거대한 구조 속에서 일어난 일임을 강조할 뿐이며 이스라엘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화석연료 이권의 틀로 해석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지구 파괴의 두 측면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알려준다는 점만으로도 이 책의 의미는 있다고 믿는다.
'딸기네 책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애덤 스미스 <국부론> (1) | 2025.10.25 |
|---|---|
| 백승욱, <연결된 위기> (0) | 2025.10.13 |
| 찰스 다윈, <종의 기원> (0) | 2025.10.08 |
| 맥신 베다 <지속 불가능한 패션산업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6) | 2025.08.23 |
| 슘페터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5) | 2025.08.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