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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 교환의 세계
페르낭 브로델, 주경철 옮김. 까치

올해의 고전읽기 마무리는 브로델인데 두꺼운 책 3권으로 돼있어서 읽는 데에 역시나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올해 읽은 책 권 수를 늘리기 위해 이 세 권은 각자 한 권인 것처럼 세기로 했다. 캬캬
이 책에서 의도한 것은 접합(articulation), 진화(evolution) 그리고 기존 질서를 유지시키는 거대한 힘 내지 사르트르가 이야기한 바 있는 "타성의 폭력(violence inerte)”을 인식하기 위한 이해의 노력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회, 정치, 경제가 서로 만나는 연구이다. 거의 움직일 줄 모르는 여 러 다른 체제들을 넘나들며 같은 성격을 가진 경험을 과감하게 대조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마르크 블로크가 권고한 비교 방법이며, 내가 장기 지속이라는 조망에 따라 수행한 방법이다.
... 일상적인 교환경제와 상위의 정교한 경제 사이의 끈질긴 대립이다. 나는 이와 같은 구분이 명백하고 구체적이라고 확신하며, 그리하여 서로 다른 층위마다 경제 주체(agent), 사람, 그들의 활동과 심성이 서로 다르다고 확신한다.
-16
이 상층의 영역은 차라리 계산과 투기의 영역이다. 여기에서 그림자의 영역, 역광의 영역이 시작되며, 이곳에 관한 비전을 물려받은 자들의 활동무대가 시작된다. 이곳은 자본주의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의 뿌리가 되는 영역이다. 자본주의는 힘의 누적이며(그리하여 교환이 상호 필요보다는 세력관계에 근거하도록 만든다) 사회적 기생 상태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교환의 밑에 자리 잡고 있는, 더 나은 이름이 없어서 내가 "물질생활"이라고 명명한 영역이 앙시앵 레짐 시기에 가장 두터운 층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본주의라는 이 말이 성숙한 모습으로, 그리고 폭발력을 가지고 등장한 것은 아주 뒤늦게, 20세기 초에 가서의 일이다.
-17
유럽 경제에 대한 것은 많이 들어봤지만 아시아 무역 관련된 것은 이 책에서 잼나게 읽은 게 많았다.
위대한 역사가 판 뢰르는 인도양과 말레이 제도의 행상인을 "등짐장수(pedlar)” 정도로 묘사했지만, 나는 이들이 더 높은 수준의 상인, 또는 대상인(negocian)이라고 보고 싶다. 말레이 제도 및 아시아 전체의 교역이 빈약한 수준이라든지, 심지어 침체되어 있다고 결론을 내리는 일이 과연 옳을까?
16세기 이후로는 이른바 정체적이라고 했던 이 교역이 급격히 발달했다. 포르투갈인과 네덜란드인, 후일에는 영국인과 프랑스인이 현지에 머물면서 "아시아 역내의” 교역에 참여하여 부를 쌓을 가능성을 발견하고 기뻐했다. 상업 노선들이 서로 얽혀 의존하는 가운데 하나의 거대하고 다양한 교역체계가 건설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네덜란드인들은 여기에 끼어들어갔을 따름이지, 그것을 만든 것은 아니다. 이 원거리 무역이 어떻든 간에 벌써 자본주의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등짐장수들”의) 계약은 이탈리아나 여타 지역의 코멘다와 유사해 보이지만, 그 조건이 훨씬 가혹한 편이다. 여행 기간이나 이자율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가혹한 조건을 수용한다는 것은 지역 간의 가격 차가 크고 따라서 상업 이익도 대개 아주 높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곳에서는 대단히 큰 원거리 교역의 순환이 이루어진다.
아르메니아 상인들 역시 몬순을 이용한 항해 선박을 타고 페르시아와 인도 사이를 오가는 일이 많았으며, 흔히 에스파한의 대상인을 위한 대리인 겸 상인으로서 튀르키예, 러시아, 유럽, 인도양 등지에서 활약했다.
-154-155
아르메니아와 유대인 상인들 얘기도 흥미롭다. 특히 아르메니아인들. 워낙 상업(그리고 현대에 들어와선 로비;;)으로 유명하지만 활동 범위가 정말 넓었구나.
아르메니아 상인들은 페르시아 전역을 상업 식민지로 만들었다. 아바스 샤는 이들을 에스파한에 붙어 있는 거대하고 활기찬 외곽 지역인 줄파에만 한정하여 거주하도록 만들었으나, 그들은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전 세계로 약진했다. 곧 그들은 인도 전역을 가로질러 갔다.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서 라사에까지 이르렀고, 이곳에서 1,5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중국 변경 지역과도 거래했다. 그러나 중국 내부로는 거의 뚫고 들어가지 못했다. 그렇지만 스페인령 필리핀에서는 곧 이들의 수가 크게 늘었다. 이들은 또 거대한 튀르키에 제국 내에서도 사방에 퍼져서 유대인이나 다른 상인들에게 호전적인 경쟁자가 되었다. 유럽 지역에서는, 모스크바 공국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서 회사를 구성하여 이란에서 수입한 원견을 배분했는데 이 비단은 여러 차례의 교환을 통해 러시아 전역을 횡단하여 아르한겔스크(1676)라든지 기타 러시아 주변국에까지 전해졌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모스크바에 거주하면서 기나긴 경로를 통해서 스웨덴에까지 갔다. 이곳에는 암스테르담을 경유해 상품을 들여올 수도 있었다.
그들은 네덜란드에 갔고, 그후로 영국과 프랑 스에까지 등장한다. 이탈리아에는 17세기에 베네치아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 수월하게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보다 더 일찍이 몰타 섬에도 들어갔다.
-202-203
아르메니아인들이 줄파라는 돈의 조국, 마음의 조국을 비밀리에 가지고 있어서 이를 중심으로 조직된 바와는 달리, 이스라엘은 뿌리 뽑히고 유리방황하면서 살아가는 드라마를 연출했다.
1492년에 스페인과 시칠리아로부터, 또 1541년에 나폴리로부터 축출당한 이후, 이들의 망명길은 크게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지중해의 이슬람권이고 또 하나는 대서양 연안 국가들이다. 튀르키예, 살로니카, 부르사, 이스탄불, 아드리아노플(에디르네)에서 유대인들은 대상인이나 징세청부업 자로서 큰돈을 벌었다. 1492년 이후로는 포르투갈이 이들에게 관대했기 때문에 포르투갈이 유대인들이 모여들었다가 다시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암스테르담과 함부르크는 이미 부를 쌓은 상인이나 곧 부를 쌓을 상인들이 가려고 하는 특권적인 곳이었다.
브라질과 앤틸리스 제도에 사탕수수 재배 및 설탕 사업이 팽창하면서 아메리카 식민지가 초기에 큰 성공을 거둔 밑바탕에 유대인 노동자들이 한몫 을 했다는 점 역시 확실하다.
… 세파르딤 유대인들의 쇠락은 유대인들이 완전히 무기력해진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후퇴한 시기를 가져왔다. 유대인들의 재기는 중유럽의 떠돌이 상인들을 기반으로 서서히 이루어졌다. 그것은 중유럽 출신의 유대인인 아슈케나짐의 세기이다. 그러나 아슈 케나짐의 진짜 위대한 세기는 로스차일드 가문이 국제적으로 거대한 부 를 이룬 19세기라고 할 수 있다.
좀바르트가 이야기하듯이 자본주의 정신과 유대교의 주요 교리가 일치한다는 것은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대한 설명과 같은 것으로서… 똑같은 내용을 이슬람교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이슬람교의 이상과 법적인 틀은 "시초부터 상승하는 상업 계급의 이념과 목적에 일치하도록 만들어졌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것과 이슬람교 자체와는 특별한 연관이 없다."
-208-210
지금까지 경제사가들은 이러한 일방적인 은의 유출이 주요 자산을 잃어버리는 불리한 현상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중상주의적 편견에 기반을 둔 추론이 아닐까? 이것은 문을 굳게 잠그고 잘 열어주지 않으려는 나라에 대해서 유럽이 자신의 금화, 그리고 특히 은화를 가지고 계속적으로 포격을 한 것과 같다. 승리한 모든 경제는 다른 화폐를 자신의 화폐로 대체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심사숙고해서 의도적으로 한 일이라기보다는 거의 저절로 이루어진 결과이다.
-270
통찰력도 있지만, 브로델의 책 전반에서는 뭐랄까, 따스함이 느껴진다.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는 고대적인, 마치 아주 먼 옛날에 만들어져서 아직도 통용되는 동전처럼 그렇게 퇴행적인 교환 장소들이 있다. 사실 나는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이런 시장들을 보면 완전히 매혹되고 만다. 예를 들면 카빌리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언덕 중턱에 걸려 있는 듯한 주변 마을들이 굽어보고 있는 빈터에 규칙적으로 개설되는 시장이라든가, 역시 마을 밖에 세워지는 아주 울긋불긋한 오늘날 베냉의 시장, 또는 연전에 피에르 구루가 아주 세밀히 관찰한 바 있는 홍하 삼각주(베트남)에 있는 초보적인 시장 등 말이다.
그보다 더 고졸한 형태의 것으로는 말리노프스키가 관찰한 교환 같은 것이 있는데, 영국령 뉴기니의 남동쪽에 위치한 트로브리안드 제도에서 행해지는 이 교환은 의식에 가깝다. 여기에는 현재와 고대가 공존하고, 역사학, 선사학, 인류학의 현지 연구, 역사사회학, 원시경제를 연구하는 경제학 등이 서로 만난다.
칼 폴라니와 제자들 및 그의 학파는 이런 증거들을 샅샅이 살핀 후 하나의 설명 내지는 이론을 제시했다. 경제란 사회생활의 망과 규제 속에 포괄된 “부분집합"에 불과한 것으로서 단지 아주 느리게 이 복합적인 관계들로부터 벗어나 온다. 폴라니에 따르면, 19세기에 자본주의가 완전히 꽃피고 나서야 "대전환(great transformation)이 일어났다. 즉, "자체조절적인(Self-regulating)” 시장이 자신의 진짜 차원을 얻게 되고 지금까지 지배적이었던 사회적인 것을 오히려 종속시킨다는 것이다.
-307
“자체조절적인 시장"이라는 개념은 신학적인 취향을 나타낸다. "외부 요소들"은 하나도 없고 단지 "상호 동의에 의해서 생긴 수요, 공급 비용, 가격들만이 개재되는" 시장은 머릿속으로 만든 것에 불과하다. 사실은 모든 형 태의 것이 경제적이고 또 사회적이다. 수 세기 동안 아주 다양한 사회경제적인 교환이 존재했고 그것들은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다양성 때 문에 서로 공존했다. 교환은 언제나 대화이며 가격은 어느 순간에도 변화한다.
-309
이런 이야기들이 아주 좋다.
지금까지 나는 자본주의(capitalisme)라는 말을 가능하면 쓰지 않으려고 했다. 모호하고 과학적이지 못하며 잘못 쓰이고 있는 이 "전투적인 용어(mot de combat)"를 영구히 추방 해버리자는 의견을 가진 사람들은 “왜 아니겠는가!" 하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더구나 이 말을 전 산업화 시기에 대해서 쓴다면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으니 말이다.
개인적으로 말하면 나는 오랜 고민 끝에 이 성가신 용어의 추방을 포기했다. 내 생각에 이 용어를 폐기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불러일으킨 논쟁들까지 무시해버리는 것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 논쟁들은 오늘날의 문제와도 예민하게 결부되기 때문이다. 역사가에게 과거를 이해하는 것과 현재를 이해하는 것은 같은 작업이다. 자본주의라는 말은 문으로 내쫓으면 창문으로 기어들어온다.
-317
자본 투자와 자본의 고도 생산성의 영역으로 이해해왔던 자본주의는 이제 경제생활 속에 다시 위치를 잡아야 한다. 이때 자본주의는 경제생활 전체와 완전히 같은 범위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자본주의를 위치시키는 영역은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자본주의가 장악하여 편하게 거주하는 곳이며, 또 하나는 자본주의가 옆길에서 새어들어올 뿐이고 지배적이지도 못한 곳이다.
-318
우리는 산업 이윤, 농업 이윤 그리고 상업 이윤 사이에 어느 것이 우세하다는 결정적인 분류를 하기 힘들다는 것을 보았다.
이 점이 자본주의의 전체사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성질임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시련이 있을 때마다 드러나는 유연성, 변환과 적응의 능력이 그것이다. 지구 전체 경제의 차원에서 자본주의는 성장하면서 상업으로부터 금융, 그리고 산업으로 단계별로 이행한다는 -그리고 산업자본주의라는 성숙한 단계가 유일한 "진정한“ 자본주의라고 보는 단순한 이미지는 피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핵심적인 특징은 심대한 위기가 닥쳤을 때나 혹은 이윤율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때에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거의 순간적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능력이다.
-594-595
자본주의를 만든 유럽의 합리성, 자본주의 '정신'에 대한 비판.
자본주의 경제의 주역들이 어떤 "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할까?
좀바르트가 견지했던 이러한 열정적인 견해는 오늘날 신뢰를 많이 잃었다. 슘페터가 강조하여 널리 퍼진 혁신과 기업가 정신 같은 것도 마찬가지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자본가라고 해도 사회의 어느 한 층에 위치하며 그가 가진 해결책, 조언, 현명함 등도 흔히는 동료들에게서 나왔다는 점이다.
자기가 그렇게 된 것은 열심히 일해서 또는 자기가 성실해서 그런 것이라고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만들지 못한 사람은 바보이거나 차라리 천치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어떤 사람이 강가로 데려다주었거나 아니면 아주 우연히 강가에 도착한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이들에게 ‘물 드시고 싶으세요? 그러면 길어서 드세요' 하고 말한 것이고 이들은 물을 길어서 마신 것에 불과하다. 흔히 이야기하는 이윤과 이익의 극대화가 자본가 상인들의 태도를 모두 설명한다고 믿어서도 안 된다.
자본주의를 일정한 심성의 구현이라고 보는 "관념적"이고 단선적인 설명은 마르크스의 사고를 벗어나려고 했던 베르너 좀바르트나 막스 베버와 같은 사람들이 다른 길이 없어서 할 수 없이 택한 출구였다. 우리가 이들의 길을 쫓아가야 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자본주의 속에서는 모든 것이 물질적, 사회적이거나, 혹은 사회관계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의심할 바 없이 명확한 것이 하나 있다. 자본주의가 하나의 편협한 기원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경제, 정치, 사회, 문화 내지 문명이 제각기 자신의 몫을 했다. 그리고 흔히 역사가 마지막 역할을 하면서 누가 이기고 지는지를 최종적으로 결정짓는다.
-549-550
“기업”은 우리가 보기에는 오랫동안 가소로운 규모였다. 회사는 아무리 커도 하나의 건물-회사 소유주(principal)의 건물 -로 만족했다. 이 점이 이런 회사가 오랫동안 가족적이다 못해 가부장적인 성격을 가지게 된 이유이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도 대상사에서는 경영주와 임원들이 일종의 가족적인 공동체에서 살았다. 그러므로 사물이나 사회적인 현실, 그리고 심성이 그렇게 빨리 변화하지는 않았다. 단지 국가와 결탁한 때에만 기업 규모가 눈에 띄게 커졌다. 국가는 그 자체가 가장 거대한 근대 기업으로서, 스스로 커가면서 다른 기업을 키우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대상업회사는 상업적인 독점에서 태어났다. 크게 보아서 이것은 17세기에 기원을 두고 북서유럽에 속해 있는 존재이다.
-608-609
사실 이런 회사들의 운명은 그들이 어떤 공간에서 독점 사업을 펼치느냐에 따라서 결정되었다. 무엇보다도 지리적인 문제인 것이다! 지리라는 요인은 결코 우연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된 까닭은 아시아 무역이 전적으로 사치품-후추, 고급 향신료, 비단, 인도 직물, 중국의 금, 일본의 은 그리고 바로 다음 시기에 취급하게 된 차, 커피, 칠기, 도자기-무역이었기 때문 이 아닐까?
아시아 무역이 먼 거리에 떨어져 있고 어려움이 많다는 점, 그 상업이 정교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 등의 이유로 엄청난 액수의 현찰을 유통시킬 수 있는 대자본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사냥 제한 구역처럼 되었다는 점 역시 고려해야 한다.
아시아에 정착한 유럽인들이 아시아에서 누리던 마지막 선물은 "아시아 내의 무역"(역내 무역)이다. 예외적으로 수익성이 높았던 이 무역 은 포르투갈 제국을 1세기 동안 생존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계속해서 네덜란드 제국이 2세기 동안-영국이 인도를 집어삼킬 때까지 -생존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런데 정말로 영국이 인도를 집어삼켰을까? 유럽인들이 수 세기 동안 이 지역을 수탈하면서 누릴 수 있었던 장점은 이곳에 이미 조밀하고 진화된 문명이 있다는 것이다. 농업 및 수공업 생산은 이미 잘 조직되어 수출까지 하고 있었고 어디에서나 효율적인 상업 연쇄망과 중개인들이 있었다.
-614-615
그리고 '사회'에 대한 이야기.
사실 올해 읽은 책들 중 내게 최고는 뒤르켐의 책이었는데, 여기 또 그 비슷한 얘기가 나온다.
널리 퍼져 있고 사방에 편재하는, 그래서 마치 우리가 숨 쉬는 공기처럼 느끼는 실체인 사회는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가운데로 뚫고 들어오며, 우리의 삶 전체 방향을 지시한다. 역사가의 임무란 흔히 오용되는 표현대로 단지 “인간"을 찾는다는 것만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얽혀 있는 다양한 크기의 사회집단들을 인식하는 것이다. 뤼시앙 페브르는 철학자들이 사회학(sociologie)이라는 말을 만들면서 그의 생각에 역사학에나 걸맞을 타이틀을 훔쳐갔다고 애석해했다. 에밀 뒤르켐과 함께 사회학이 등장한 것(1896)은 사회과학 전체에서 일종의 코페르니쿠스적인, 또는 갈릴레이적인 혁명이자 패러다임의 변화로서 그 영향이 오늘날까지 미치고 있다.
-633
사회의 복수성
계서제 질서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모든 사회는 다양성이며 복수성이다. 사회는 내부로부터 스스로 분해된다. 이러한 분해 자체가 아마도 사회의 속성일 것이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이른바 "봉건” 사회를 정의하려고 애쓰던 마르크스주의자들 및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은 역사가와 경제학자들은 이 사회의 기본적인 복수성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설명해야 했다. 우선 말해두어야 할 것은 나 역시 마르크 블로크나 뤼시앙 페브르와 마찬가지로 봉건제라는 말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는 점이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보기에도 후기 라틴어(feodum : 봉토)에서 유래한 이 신조어는 봉토와 그 봉토에 관련 된 사항만 가리킬 뿐이지 그 이상은 아니다. 16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사회 전체를 자본주의(capitalisme)라는 말로 지칭하는 것이 논리적이지 못한 것처럼, 11세기부터 15세기까지의 사회 전체를 봉건제라는 말로 지칭하는 것도 논리적이지 않다. 다만 이른바 봉건사회라는 흔히 쓰이는 표현이 유럽 사회사의 매우 폭넓은 단계를 가리킬 수 있다는 사실, 유럽사의 연속된 단계를 유럽 A, 유럽 B라는 식으로 지칭하는 꼬리표 정도로 이 표현을 쓰는 것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도록 하자.
-641
전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여러 개의 사회들이 혼재해서 잘하든 못하든 서로 의지하고 있다. 하나의 체제가 아니라 여러 체제들이 있고, 하나의 계서제가 아니라 여러 계서제들, 하나의 질서가 아니라 여러 질서들, 하나의 생산양식이 아니라 여러 생산양식들이 있다. 그리고 문화, 의식, 언어, 생활양식도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 존재한다. 모든 것이 복수로 존재한다.
모든 사회, 하부사회, 또는 가족을 위시한 모든 사회집단은 자기 자신의 계서제를 가지고 있다. 응집적인 전체사회는 곧 계서제의 어느 한 층이 다른 층들을 파괴하지 않고서도 전체를 지배하는 것이 아닐까?
하나의 전체사회를 공유하는 여러 사회들 중에 어느 하나 혹은 일부 사회들이 다른 사회들에 비해서 우위를 차지하면서 전체의 변화를 준비한다는 것은 여전히 사실이다. 이 변화(mutation)는 언제나 매우 느리게 이루어지다 가 종래에는 단단히 자리 잡지만 그 다음에는 다시 기존의 승자(들)에 대항하여 새로운 변형(transformation)이 나타난다.
-643-644
마지막은 유럽의 우월한 정신을 거부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의 말마따나, 베버의 시대가 아닌 전후 몰락의 시대를 살고 난 뒤의 유럽인이었기에 브로델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처럼 외부로부터 많은 것이 유입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유럽이 모든 것을 천재적인 방식으로 스스로 발명했으며 유럽만이 점차적으로 기술적, 과학적 합리성으로 발전해가는 도상에 있었다는 전통적인 역사가들의 견해를 부인하게 된다. 세계의 중심이며 서양 역사의 중심이라고 자처하던 로마 제국도 그보다 더욱 넓고 또 수 세기나 더욱 오래 살아남은 고대 세계경제(economie mondiale, Weltwirtschaf)의 일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지브롤터에서 중국에 이르는 거대한 유통과 교역의 영역인 이 세계경제에서는 수 세기 동안 사람들이 끝없이 먼 길을 여행하면서 금, 금은 세공품, 후추, 육두구, 생강, 칠기, 사항, 호박, 능라직, 면직, 모슬린, 비단, 금박 새틴, 향목과 염료용 목재, 라카, 옥, 보석, 진주, 중국 도자기 등의 귀중품들을 보따리에 넣어서 운반했다.
-772
이탈리아 도시에서부터 이루어지던 유럽의 초기 자본주의의 원거리 교역은 로마 제국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산업과 수출용 생산을 탄생시키고 광역권의 경제를 탄생시킨 11-12세기의 장대한 이슬람 문명을 이어받은 것이다. 원거리 항해와 규칙적인 카라반은 활기차고 효율적인 자본주의를 의미한다. 이슬람권 전역에서 길드들이 자리 잡고 이것들이 많은 변화(장인의 성장, 가내노동, 도시 외곽으로 발전해나가는 길드 등)를 겪은 것은 앞으로 유럽이 맞이할 현상들과 너무나 유사해서 경제적인 원인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는 정도이다. 그 외에 또다른 유사성이 있다. 호르무즈, 말라바르 해안, 약간 뒤늦은 시기이지만 아프리카 해안의 세우타, 더 나아가서 스페인의 그라나다 같은 곳에서 도시 경제가 전통적인 권위의 수중에서 벗어났다는 점이다. 이곳들은 모두 도시국가를 이루었다. 마지막으로 이슬람권 역시 수지 적자를 보이고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774-775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과 함께) 또다른 일반 설명으로는 서양의 중심부에서 과학적 정신과 합리성이 발전함으로써, 자본주의 내지 자본주의적인 지성과 건설적인 돌파력을 갖추게 해주었고 그럼으로써 유럽 일반경제의 성장을 가져왔다는 주장이다. 이 역시 "정신"과 기업가의 혁신을 강조하고 자본주의를 경제의 창끝이라고 합리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의심스러운 주장이다. 만일 정신이 자본주의를 가져왔다면 그 정신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795
합리적이라는 것은 문화마다 다양할 뿐 아니라 콩종크튀르마다, 사회 집단마다, 또 그들의 수단과 목적마다 다양하다. 하나의 경제 내에서도 여러 합리성이 존재한다. 자유경쟁의 합리성은 단지 그중의 하나일 뿐이다. 독점, 투기, 힘의 합리성 역시 또다른 합리성이다. …여하튼 나는 시장경제와 자본주의 사이의 구분이 여기에 핵심이라고 믿는다. 그것은 자본주의에 시장 그 자체의 미덕과 "합리성"을 갖다 붙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800-801
오늘날에는 누구든지 좀바르트와 막스 베버 사이의 논쟁을 따라가보면, 이것이 어떤 비현실성을 띠고 잘못되어 있으며 거의 쓸데없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1904년에 막스 베버가, 그리고 1912년에 베르너 좀바르트가 그들이 사는 시대의 유럽이야말로 과학과 이성과 논리의 절대적인 중심지라는 느낌을 가졌다는 것은 그 이상 자연스러울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유럽인들은 이와 같은 확신, 이러한 우월 콤플렉스를 잃어버렸다. 어째서 한 문명이 다른 문명보다 영원히(in aeternum) 더 지적이고 더 이성적이어야 한다는 말인가?
막스 베버에게서나 좀바르트에게서나 자본주의에 대한 모든 설명은 서양의 "정신"이 가지고 있는 구조적이고 논의의 여지 없는 우월성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우월성 역시 우연의 결과이며 역사의 폭력에서 나온 것이고 세계적으로 "카드를 잘못 돌린” 결과이다.
-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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