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필립 맥마이클 <거대한 역설>

딸기21 2026. 1. 2. 15:54
728x90

거대한 역설 Development and Social Change.
필립 맥마이클. 조효제 옮김. 교양인. 1/2


올해의 첫 책. 실은 작년 4월 읽기 시작했는데 이제야 끝낸 것이지만.
개발 원조에 대한 책들 중에 읽고픈 책으로 찜해두고 있었다. 분명 집에 있겠거니 했는데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못 찾고 있었는데, 홍천 영범 오빠네 갔더니 책꽂이에 두 권이 꽂혀 있는 게 아닌가! 냉큼 하나 업어왔다.
2012년 책인데 꽤나 옛날 이야기 같은 느낌이 든다. 문제제기에 공감이 많이 가지만 1) 책에 언급된 지속가능성을 위한 풀뿌리 실험들 상당수가 이미 물 건너갔고 2) 바이오디젤 대신 전기차가 대세인 것에서 보이듯 기술적 변화가 빨랐고 3) 좀 기쁜 것은 아프리카에서도 많은 나라들이 발전하려 하고 있다는 점. 빈국들의 ‘자율성‘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는 늘 크다!
개발 담론과 관행의 역사를 정리하는 데에는 도움이 많이 됐지만 이런 책 좀 지겹고 허망하다. 부제가 “왜 개발할수록 불평등해지는가”인데, 이런 종류의 책을 읽을 때 늘 마음이 불편해지게 만드는 문장이다. 뒷부분 저성장 탈성장론(세르주 라투슈 식의)도 허무하게 들리고.

20세기 중반의 개발 프로젝트(1940년대~1970년대)는 냉전 구도의 세계 질서 속에서 나라별 경제 성장을 국제적으로 조율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 었고, 여기에는 초강대국이 제공한 재정•기술·군사 지원이 포함되었다. 또 한 개발은 유엔의 이상이기도 했다.
지구화 프로젝트(1970년대~2000년대)는 각국의 국경선 위에 개방된 시장을 겹쳐 올려놓았다. 기업의 사업 권리가 시민권적 사회 계약보다 더 중요 해졌고, 개발은 국가의 공적인 활동이 아니라 개인의 사적인 노력으로 재 규정되었다. 지구화 프로젝트의 토대가 되는 신자유주의 독트린(시장 자유)은 점점 더 큰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미래에도 전 지구적 시장이 지배력을 계속 행사할지는 좀 더 두고봐야 한다. 그와 함께 기후 변화라는 비상 사태의 영향을 받은 초기 형태의 지속 가능성 프로젝트가 형성되고 있다.
-65

인류를 이미 개발된 지역과 저개발된 지역으로 나누는 단순 이분법은 이제 시대의 대세가 되었다. 세계를 이렇게 둘로 나눴을 때 모든 나라들의 운명이 하나로 수렴되는 것-못사는 나라가 개발을 통해 선진 개발국을 따라잡아야 한다는-처럼 보인다. (1949년 1월 20일) 트루먼 대통령의 선언은 전 세계를 근대적 인류와 전근대적 인류로 양분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개발과 근대'는 전 세계 담론의 기준이 되었다. 그것은 세계관이나 다름없었고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이었다. 구식민 지역이 낙후했을 뿐만 아니라, 외부 손길의 도움을 받아야 발전할 수 있는 지역이라고 암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개발 담론이 국민국가들로 이루어진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청사진이었고 더 나아가 세계 질서 유지를 위한 특정한 전략이었기 때문에, 필자가 이를 개발 프로젝트라고 부르는 것이다. 굳이 프로젝트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세계 질서를 조직하는 원칙으로서 개발이 단순히 경제 성장이 아니라, 특별한 정치적 지향을 띠고 있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99-100

77그룹
1950년대에 전 세계 무역에서 제3세계의 비중이 3분의 1에서 거의 5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고, 교역 조건이 불리해지면서 수출 신장세도 확연히 줄었다. 제3세계는 이런 상황을 비판했고 그 결과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만들어졌다. 유엔무역개발회의는 제3세계 국가들이 G-77이라는 이름으로 집단적으로 세계 경제 개혁을 요구하고 나선 최초의 국제적 포럼이었다.
유엔무역개발회의가 세계 경제에 끼친 영향은 제한적이었지만, 이 회의를 이끈 학자들과 정책 기획자들 덕분에 각종 국제 기구에 제3세계주의(Third Worldist) 관점이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아마 유엔무역개발회의는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 총재 재임 시기(1968~1981)에 세계은행의 정책에 가장 확실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당시 세계은행은 한동안 단순한 소득 수치만이 아니라 삶의 질과 관련한 개발 이슈에 초점을 맞춘 정책을 펼쳤다.
-127-128

맥나마라가 참 대단한 사람이긴 하다.

수입 대체 산업화
정치적 민족주의가 제3세계 인민들의 주권을 추구했던 것처럼, 경제 민족주의 역시 식민 지배 시대의 국제 분업을 역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경제 민족주의는 1930년대 아르헨티나 군사 정부에서 경제 자문을 맡았던 라울 프레비시의 아이디어였다. 이 당시 세계 대공황으로 국제 무역이 대폭 줄었고 라틴아메리카의 대토지 소유주들은 원자재 수출 소득이 감소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이 줄었다. 프레비시는 일종의 산업 보호 정책을 제안했다. 수입을 통제해 비싼 서구 공산품의 수입을 줄이고, 자원을 국내 제조업으로 돌린 것이다. 그 후 이 정책을 1950년대 프레비시가 사무총장으로 재임했던 유엔라틴아메리카경제위원회(ECLA, Economic Commission for Latin America)가 채택하기도 했다.
수입 대체 산업화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경제학의 새 로운 정통 이론이 되었다. 수입 대체 산업화 전략으로 경제 민족주의를 공식적으로 장려함에 따라 역설적으로 외국 기업의 직접 투자가 늘어나게 되었다.
브라질 같은 발전국가에서는 사적 투자를 수출 부문으로부터 국내 생산 부문으로 재분배했다. 라틴 아메리카는 상대적으로 도시 인구가 많았고, 계속 확장 중인 소비 시장을 갖추었다는 특징이 있었다.
대조적으로 한국에서는 국가 발전의 통제권과 산업용 자금 배분을 중앙 정부가 직접 관할했다. 한국은 브라질보다 외국 투자 의존도가 낮았으며, 다양한 제조 상품을 판매하기 위한 수출 시장 개척에 더 의존했다. 광범위한 토지 개혁을 실시해 농촌 주민들 사이에 빈부 격차가 상당히 줄었다. 그리고 한국의 개발은 전략적인 공공 투자 결정에 더 크게 의존하였다.
-109-110

미국 정부는 1954년부터 자국의 잉여 농산물을 처분하기 위해 공법 480 호 프로그램(PL-480, Public Law 480 Program)을 시행했다. 이 공법 프로그램은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첫째, 농산물을 현지 통화로 저렴한 가격에 상업용으로 제공한다. 둘째, 기근 구호용 농산물을 무상으로 제공한다. 셋째, 현지의 전략적 원자재와 미국산 농산물을 물물 교환한다.
제3세계 정부들은 원조받은 식량을 '개발 동맹들 -공산품 제조 부문, 노동조합, 도시 전문직 종사자, 중산층-에게 혜택을 주었다. 저렴한 원조 식량 덕분에 소비자들은 구매력에 여유가 생겼고, 노동 비용을 보조하는 효과가 발생했으며, 도시 거주민의 불만을 무마하고 제3세계 산업 투자 환경을 개선하는 것 같은 혜택이 돌아갔다.
한국의 경우, 쌀농사 관리와 산업 생산 중심지에 대한 노동력 제공을 정부가 중앙 관리함으로써 식량 원조가 성공담이 되었다. 하지만 콜롬비아의 경우에는 도시화 이후 시행된 식량 원조 프로그램과 밀 수입 때문에 경쟁력에서 밀리고 보호도 받지 못한 농업 부문이 붕괴해버렸다.
1954년부터 1974년 사이 미국의 식량 원조를 받았던 주요 수원국에는 인도, 한국, 브라질, 모로코, 유고슬라비아, 남베트남, 이집트, 튀니지, 이스라엘,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타이완, 필리핀 등이 있었다.
원조 식량 대금을 지불할 때 수원국 정부는 달러를 사용할 필요 없이 국내 은행에 개설된 미국 계좌에 원조액과 같은 금액만큼을 자국 통화로 결제해주기만 하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적립된 돈을 '대충 자 금(counterpart Funds)이라 불렀다. 인도의 경우 1970년 대에 루피화 전체 통화량의 3분의 1을 미국이 이런 식으로 보유하고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모인 대충 자금은 수원국에 진출한 각종 미국계 기관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다. 인프라 건설 프로젝트, 군사 기지 유지 비용, 수원국에 진출한 미국 기업에 대한 융자, 현지 생산된 각종 상품과 서비스 대금, 그리고 무역 박람회 개최 등 다양한 용도로 자금이 사용되었다.
-137-138

미국사료곡물협의회(U.S. Feed Grains Council)는 세계에 진출해 있는 400여 개의 농기업체를 통해 식량 원조 대충 자금을 써서 현지의 가축 산업과 가금류 산업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해 왔다. 1969년에 한국의 4개 회사가 미국의 농기업인 랠스턴퓨리나(Raston Purina)와 카길과 합작 사업을 시작해서 전문 기술과 마케팅 기법을 전수받았다.
-142


하지만 한국의 경제성장에 미국의 값싼 농산물도 큰 도움이 됐다면서 “한국의 경제 발전 기적이, 미국이 제공한 값싼 식량에 기댄 공업화 지원책과 수출 공산품의 미국 시장 진출에 크게 의존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 발전을 궁극적으로 국내 주도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면 국제적 과정이라고 봐야 할 것인가”(Chung, 1990: 43; Evans, 1995; Harris, 1987: 31-36; Wessel, 1983: 172-173) 라고 한 인용문(134쪽)은 좀 수긍하기 힘들다. 세계 경제 속에서, 세계 경제와 연결되어 발전했다는 이유로 ‘국내 주도의 과정’이 아니라고 할 수 있나? ’Chung‘은 한국 학자인 것 같지만, 이런 시각 자체가 개도국의 자율성과 주도성을 낮잡아보는 것 아닌가.

녹색 혁명 프로그램은 당시 개발 사상에서 핵심 요소였던 경제 민족주의에도 호소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 어쩌면 이런 점들보다 더 강한 동기는 중국 모델이 지닌 정치적 의미였다. 1949년에 공산 혁명을 거친 중국은 지주들이 독점했던 전체 농지 중
45퍼센트를 소농과 무토지 농민에게 재분배해주었다. 중앙 정부의 지원과 더불어 분권화된 과정을 통해 기초 보건과 농촌 교육이 향상되었다.
이렇게 방대한 사회적 실험이 궁극적으로 성공했는지 여부는 차치하고, 중국식 모델은 인도와 같은 나라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인도의 총리 네루는 중국을 따라잡겠다는 결의에 차 있었다.
당시만 해도 인도의 각 주는 토지 개혁이나 노동조합에 적대적인 지주와 상인들이 장악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인도를 포함한 제3세계의 혁명은 적색(노동 해방)에서 녹색(농업 해방)으로 색깔을 바꾸게 된 것이다.
-146

녹색 혁명은 제3세계 중에서도 몇몇 지역에만 국한하여 일어났다. 아시아 그리고 훨씬 소규모로 라틴 아메리카에서 신품종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지만, 아프리카에서는 대규모 상업형 밀 농사나 쌀 재배가 없었으므로 녹색 혁명으로부터 얻은 게 거의 없었다.  
녹색 혁명은 농촌 지역의 소득 불평등을 더욱 악화시키면서 진행되었다. 멕시코, 아르헨티나, 브라질, 베네수엘라 같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 그리고 푼잡과 하리아나 같은 인도의 관개 지역에서 진행된 녹색 혁명식 농업은 농가들 사이의, 그리고 흔히 한 가구 내에서도 경제적 격차를 크게 벌렸다. 농촌 가구에서 여성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남성보다 적 었다. 교잡 종자와 농사에 필요한 투입물(비료와 농약 등)은 시장에서 구입해야만 한다. 이런 것을 구입하려면 정기적인 소득이 있거나 신용 대부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여성은 이런 과정에서 배제되기 일쑤였다.
-148-149

원조 프로그램은 산업화 전략을 추진하기 위한 기술 이전과 식량 원조를 통해 개발의 유형을 결정했다. 식량 원조는 지정학적 동맹 관계를 유지하는 데 중요했을 뿐만 아니라, 제3세계의 제조업 지원을 통해 국제 분업 양상을 재편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 할을 했다. 제1세계의 식량과 농업 기술이 제3세 계로 수출되면서 전 지구적인 농촌-도시 자원 이동 흐름이 형성된 것이다.
제1세계의 농업 확대가 제3세계의 새로운 산업 계급의 등장과 이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녹색 혁명의 기술을 제3세계로 수출한 결과 제3세계 내에서 남성과 여성 사이, 농촌의 생산자와 노동자와 농업 자본가 사이에서 사회적 분화가 촉발되었다.
-153
수출 가공 공단 또는 자유 무역 지역(FTZs, free trade zones)은 관세가 거의 부과되지 않는 전문화된 수출품 생산 공단을 말한다. 최초의 수출 가공 공단은 1958년 유럽 아일랜드의 샤논에 건설되었다. 제3세계에서는 인도가 1965년에 처음으로 설치했는데, 이미 1980년대 중반에 전 세계 173개 수출 가공 공단에 약 180만 명의 노동자가 고용되어 일하고 있었다.
수출 가공 공단의 발전은, 내수 시장 발전보다 수출 시장 발전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개발 프로젝트의 특징이었던 경제 민족주의에 어긋나는 현상이었다. 수출 가공 공단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섬처럼 고립된 곳이다. 이곳은 흔히 자국 영토에서 완벽히 단절된 채 철조망과 출입문으로 통제되고 특수 보안 요원들이 철통 같은 경비를 서는 가운데, 외국의 원자재나 부품을 직수입하여 제조한 최종 생산 제품을 항공편이나 배편으로 바로 수출한다. 단기 계약직 노동자들이 매일 버스로 출퇴근하거나 공단 내에 머무르면서 일한다. 공단의 노동자에게는 바깥 사회에서 통용되는 시민권이나 노동 조건이 전 혀 적용되지 않는다.
수출 가공 공단은 제3세계 여성을 전 지구적 노동력에 편입시킨 최초의 관문 역할을 했다. 제3세계 새로운 '공순이(ractory girls)'의 1주일치 급여는 동일한 일을 하는 제1세계 여성의 1시간치 급여와 맞먹었다. 1980년 대 초반, 수출 가공 공단에서 일하는 근로자의 80~90퍼센트가 16~25세 여성이었다.
-165-166
단순화는 생산 조립 작업에서 높은 수준의 기술이 필요치 않은 탈기술(deskil)로 이어졌고, 이는 전 지구적 생산 라인의 선구가 되었다…. 이러한 단순 업무를 서로 조정하는 데 기술을 제공할 새로운 숙련 노동- 관리, 공학 기술, 디자인 등은 흔히 제1세계가 보유하고 있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전 지구적 노동력의 분화가 이루어졌다. 1970년대에 들어 탈기술화된 업무를 국외 저임금 지역으로 이전하는 일 이 너무 흔한 현상이 되어 신국제 분업이라는 개념이 새롭게 생겨났다.
-170-171
식량 원조 레짐과 녹색 혁명이 제3세계 각국을 식량 생산 기술과 농기업 기술의 회로 속에 밀어넣음에 따라 '세계의 공장'과 함께 '세계의 농장(world fam)’이 등장했다. 제2차 녹색 혁명이 이러한 변동을 촉진했다.
…기본 식량 증산 차원을 넘어 녹색 혁명 기술을 소비자용 전문 식품과 농산업용 투입물을 생산하는 차원으로 발전시킨 형태인 것이다. 이것을 제2차 녹색 혁명이라 부른다.  제1차 녹색 혁명이 내수 시 장(기본 양식 생산)을 대상으로 한 공적 사업이었던 데 반해, 제2차 녹색 혁명은 점점 더 전 지구적 시장을 대상으로 한 사적 영리 사업이다.
제2차 녹색 혁명은 사계절 내내 신선한 채소와 과일 같은 고가치 먹을거리 시장을 전 지구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이 시장은 농기업에서 수익성이 가장 좋은 분야로 꼽힌다. 전 지구적 시장이 뿌리를 내 리고 운송 기술이 더욱 발전하면서 등장한 '냉장 사슬(cool chains)’ 덕분에 제3세계에서 재배한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저온 상태에서 전 세계 슈퍼 마켓으로 운송할 수 있게 되었다.
농업이 전 지구적 산업-점점 더 여성화되는-으로 전환되면서, 그것이 여성의 생계와 식량 안보, 그리고 그 가족들의 식량 안보에 끼치는 영향도 커졌다. 전 세계에서 소비하는 대부분의 먹을거리는 여성이 생산한다.
-186-187

개발 프로젝트가 퇴조하면서 농산물 수출이 활발해졌다. 그러한 농산물 수출을 비전통적 수출(NTBs, nontraditional exports)이라고 불렀는…. 비전통적 수출은 동물 단백질 제품과 과일, 채소 등 고가치 먹을거리, 또는 저가치 사료 곡물과 생물
연료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아시아의 슈퍼마켓'으로 여겨지는 타이는 농촌의 소농이 식품 가공 회사와 계약을 맺고 농산물을 납품하는 형태의 식품 가공 산업을 확대했다. 타이 정부는 양계업 생산물 수출을 위해 농기업, 농민, 금융 기관 복합체를 조직했고, 정부 각 부서를 동원해 수출 계약을 장려했으며, 토지가 없는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여 계약 영농과 가축 사육을 하도록 했다.
신흥 공업국이 제조업에서 전 지구적 공급 사슬의 기반이 된 것처럼, 신홍 농업국도 전 지구적 조달의 기반이 되었다. 제2차 녹색 혁명, 그리고 비전통적 수출은 전 세계에서 농업을 한 국가 내의 농사가 아니라 전 지구적 시장에 농산물을 공급하는 세계의 농장'으로 탈바꿈시켰다.
-190-191
초국적 은행들(TNBs, transnational banks)은 돈이 쏟아져 들어온 역외 자본 시장(offshore capital market)을 통해 1970년대에 형성되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제3세계 각국의 경제 성장은 외국의 원조와 투자로 유지되었고, 그 과정에서 미국 바깥의 역외 달러 시장이 형성되었다.
소련도 이 역외 금융 시장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이 시장은 주로 유럽 주도의 통화 시장이었고, 처음에는 런던의 금융 시장인 시티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렇게 예치된 달러를 유러달러(Eurodollar)'라 불렀는데, 베트남 전쟁 시기에 미국의 군사•경제 관련 국외 지출이 커지면서 유러달러의 규모가 급 팽창하였다. 국외의 달러 예치금 규모가 미국 내의 달러 보유고보다 훨씬 더 커지면서, 외국의 중앙은행이 달러 대신 금 교환을 요구하면 전부 금으로 인출해주어야 하는 사태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늘었다. 그래서 1971년에 닉슨 미 대통령은 달러의 금 태환제를 폐지한다고 발표했다.
-193-194

금융 혁명과 석유 달러의 폭증이 합해져 전 지구적 생산 시스템이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1970년대 초만 하더라도 제3세계 부채의 13퍼센트만이 은행 대출이었고, 33퍼센트가 다자 간 유상 차관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말이 되면 이 비율이 역전되어 은행 대출이 모든 부채의 60퍼센트 선으로 상승한다.
은행 융자는 여러 기능을 수행했다. 제3세계 정치 엘리트들은 민족주의적 주제를 표현한 거대한 공공 개발 프로젝트를 벌여 자기들의 통치를 정당화하고, 군대를 강화하고, 대출에서 발생한 수익성 높은 사업 계약을 후견 네트워크에 제공하려고 애썼다.브라질에서는 1964년부터 1985년 사이에 집권한 군부 통치자들이 연이어 라틴아메리카 특유의 국가 주의 모델에 따른 개발 프로젝트를 시행했다. 브라질은 이런 식의 채무 조달(debt financing)을 통해, 그 전까지 단 하나의 상품, 즉 커피 판매로 수출 수입의 70퍼센트를 올리던 방식에서 다양한 산업재- 철강, 알루미늄, 석유 화학 제품, 시멘트, 유리, 무기, 항공기-와 오렌지 주스나 두유 같은 가공 식품의 주요 생산국이자 수출국으로 탈바꿈했다.
-196-197
지구화 프로젝트의 정치적 개입이란, 제3세계가 취했던 정책- 외국 기업이 제3세계의 자원과 시장에 접근하는 것을 제한하는 -에 서구가 20년 이상 군사적•재정적으로 제재를 가한 사실을 의미한다. 이러한 제재 조치는 아마 1965년에 인도네시아에서 수하르토 장군을 권좌에 앉혔던 사건에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과거에는 개발이 국가적으로 관리된 경제 성장을 뜻했지만, 세계은행의 〈세계 개발 보고서 1980(World Development Report
1980)>에서는 개발을 '세계 시장 참여'라는 식으로 재규정했다. 이제 국가 경제가 아니라 전 지구적 경제가 개발의 단위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타임라이프사는 1967년 제네바에서 수하르토와 그의 경제 자문들이 국제 기업체 대표들을 만날 수 있도록 주선했다. 수하르토 장군은 포드 재단의 도움을 받아 국외 투자와 동반자 관계를 통한 발전 계획을 새로이 수립했다. 타임라이프의 회장이던 제임스 리넨은 개막 연설에서 이 모임을 '새로운 세계 질서의 탄생‘이라고 표현했다.
이 사건은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고, 국가와 기업 간의 전 지구적 개발 동반자 관계라는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냈다.
-206-207
1980년대에 닥친 외채 위기는 전 지구적 거버넌스(global governance)라는 새로운 시대를 탄생시켰다.
외채 위기는 1980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1970년대의 대출 붐 때문에 발생한 달러의 과잉 순환에서 비롯한 달러화 가치 하락을 막으려는 조치- 공세적인 통화 회수 정책으로 달러의 과잉 순환을 줄이려는 -를 취하면서 시작되었다.
제3세계 각국은 갑자기 채무의 덫(debt trap)에 걸렸다. 외채가 각국 경제의 목을 조르기 시작한 것이다.
제3세계 외채의 60퍼센트가 민간 은행에서 차입한 사채였지만, 어쨌든 브레턴우즈 기구들이 다시 운전석을 차지했다. 국제통화기금은 자문 역할을 떠맡아 1980년대 중반부터 구조 조정 정책(SAPs, Structural Adjustment Policies)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212

구조 조정 정책이 빈곤층의 취약성을 더 욱 악화한다는 사실을 인식한 국제 금융 기구들은 1988년, 빈곤의 틈 사이로 떨어져버린 계층을 위해 세계은행의 사회 비상 기금(social emergency fund)과 국제통화기금의 확대 보상 금융 제도(CCFF)를 마련해야만 했다. 국제 금융 기구들은 전 지구적 정책의 '인간화'를 시도하면서, 1996년부터 최빈국 부채 경감 계획(HIPC)을 시작했다. 정당성의 문제가 극히 중요해진 이유는, 북반구 국가들이 국제 금융 기구에 제공하는 재정 기여분을 크게 줄인 탓에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이 채무국의 부채 상환금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구조 조정 정책의 '민주화'가 시도되었다. 국제 금융 기구들은 각국 정부와 NGO들에 정책 형성과 이행을 책임지고 추진할 것을 장려했다.
대중으로부터 외면받던 구조 조정 정책은 동반자 관계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탈바꿈했고, 각국 정부 가 자체적으로 발전 계획을 입안하여 국제 금융 기구의 승인을 받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267-268
바라티 사다시밤(Bharati Sadasivam)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구조 조정 프로그램이라는 어휘는 거의 전적으로 생산 경제에만, 그리고 수익 창출과 비용 처리에만 집중한다. 인간의 욕구를 충족해주고 삶을 지탱해주는 '재생산 경제(reproductive economy)'에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재생산 경제'를 떠받치는 것은 무임금, 비시장적 노동을 하는 여성들인데, 거시 경제학에서는 이런 일을 하는 여성 노동력이 무한정 공급될 수 있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294

1999년에 출간된 다이앤 엘슨의 《개발 프로젝트의 남성 편향(Male Bias in the Development Projeco)>>은 구조 조정 정책에서 사회 서비스가 긴축 영향으로 축소되더라도 여성이 무한정 사회적 재생산을 해낼 수 있다는 식으로 전제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외부 형편이 아무리 힘들어도 숨어 있는 '평형 요인‘이 나쁜 상황을 상쇄 해주는데, 그런 것이 바로 개별 가구 내에서 일어난다. 특히 여성들은 긴축 상황에서 더 열심히 일하고 쪼들리는 살림을 어떻게든 '꾸려감으로써' 구조 조정의 충격을 흡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공공 병원 부문에 투입될 예산을 삭감할 경우 그에 따른 비용을 생산 경제에서 재생산 경제로 전가함으로써 효율성을 여전히 유지한다는 것이다.
-343
인위적으로 설정된 정치적 경계선 내에서 권력을 다지거나 국민국가를 운영하는 것이 어려웠으므로 아프리카 특유의 일당 국가 체제가 등장했다. 이런 식의 양분된 권력, 중앙 집권화된 현대 국가와 부족의 영토 내에서 전통적 관습법을 시행하는 부족장 권력이 오늘날 아프리카 국가들이 무기력해지는 데 일조한 것이다.
-305

인류학자 제임스 퍼거슨은 다음과 같이 관찰한다. "아프리카의 불평등 심화는, 자본이라는 트럭이 '사용 불가능한' 아프리카 지역은 그냥 지나치고, 광물 자원이 풍부한 특정 지역에만 내려서 사업을 벌이는 상황에서 기인한다.“
-306


이른바 '최하층 10억 명(bottom billion)'을 강조하게 되면 개발을 불평등한 관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단계별 사다리로 보는 관점을 재생산하게 된다.“ (383쪽)
바텀 빌리언에 대한 의미 있는 비판.

이제 전 지구적 불평등은 지리적으로 분리된 개념이 아니라, 어느 곳에서나 사회적으로 분리된 개념으로 탈바꿈했다. 모든 국가를 가로지르는 하나의 보편적인 엘리트 중산층 계급이 탄생하게 되었다. 증가하고 있는 전 지구적 중산층은 … 초국적인 수평적 가치 사슬에 이미 편입되어 있으므로 자기들이 새롭게 얻게 된 부를 자국 내의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재분배하는 것을 꺼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507

바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