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생활의 원초적 형태
에밀 뒤르켐. 민혜숙, 노치준 옮김. 한길사. 7/25

은희님과 두꺼운 책들을 읽고 있다. (특정) 종교를 욕하는 것을 넘어 좀 체계적으로 공부해보고자 첫 책은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으로 택했고 너무나 즐겁게 읽었다. 두 번째가 이 책인데, 읽을수록 감동이다. (때론 마르크스와 함께) 사회학을 태동시킨 인물로 평가받는 베버와 뒤르켐, 왜 그들의 책이 고전이 되었는지 알겠다.
뒤르켐은 오스트레일리아 토템 신앙에 대한 인류학적, 민족지적 연구들을 섭렵하며 종교의 기원을 모색한다. 방대한 예시와 논리적 추론 끝에, 그는 사람들을 종교로 이끈 ‘힘‘의 정체는 다름 아닌 규범(도덕 관념),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지만 개개인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사회 그 자체’라고 말한다.
인간의 사고는 자신을 파괴하지 않고는 그 틀에서 벗어날 수 없는 듯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지 않는 사물들이나 수로 헤아릴 수 없는 사물들에 대해 생각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우발적이고 유동적인 다른 관념이 있다.
원시종교의 믿음체계를 체계적으로 분석해보면 이러한 범주들 사이에서 중요한 점들을 발 견하게 된다. 그러한 범주들은 종교에서 그리고 종교로부터 생겨났 다. 그것들은 종교적 사고의 산물이다.
이 책의 개괄적인 결론을 한 마디로 말하면, 종교는 분명히 사회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즉 종교적 표상이란 바로 집합 표상인데, 그것은 집단의 현실을 표현해준다. 종교의식이 란 결집된 집합체 속에서만 생겨날 수 있는 행동양식으로, 집단들의 어떤 심적 상태를 불러일으키고, 유지하고 회복시키기 위한 방식이다.
-130
어디에서 종교와 주술이 구분되는 가를 알아야 한다. 이 두 영역 사이의 경계선을 추적해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이른바 종교적 믿음체계들은 항상 어떤 특정집단과 공통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이러한 믿음체계들은 집단의 모든 구성원들에 의해 개별적으로 인정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은 집단의 산물이며 집단의 통일성을 형성한다. 종교생활을 관찰할 수 있는 곳 어디서나 교회는 특정집단을 기초로 하고 있다.
주술적 신앙은 그것을 신봉하는 사람들을 서로 연결시키지 못하며, 공통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하나의 집단으로 결합시키지 못한다. 주술은 교회를 만들지 못한다.
-182-183
사람들은 우리의 마음에 거룩함의 관념을 불러일으키는 데 필요한 물리적인 힘이 자연의 작용 속에 있다는 공리를 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명제에 대한 증거들을 대략적 으로라도 조사해본다면 그 명제가 하나의 편견에 불과하다는 것이 입증된다.
일반적으로 자연의 흐름은 한결같으며 이러한 한결같음은 강한 감정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자연의 경이 앞에서 감탄으로 가득 차 서 있는 존재로서 원시인을 표현하는 것은 훨씬 더 최근에 형성된 감정을 역사의 초기에 전이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탄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인간이 자연 앞에서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감정이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자연과 접촉하면서 자연이 인간보다 위대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인간이 현실 속에 근본적으로 이질적이고 서로 비교될 수 없는 사물들의 두 범주가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어떻게 자연의 광경이 우리에게 이러한 이원성의 개념을 줄 수 있었을까?
-248-249
지금까지 알려진 모든 종교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물들의 보편성을 포함하고 세계에 대한 총체적인 표상을 제시하고자 하는 관념체계였다. 토템 숭배가 다른 종교들과 비교될 만한 하나의 종교로 여겨지려면 토템 숭배 역시 우주관을 제공해야만 한다. 그런데 토템 숭배는 이러한 조건을 만족시켰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토템 숭배의 이러한 양상을 무시했던 것은 씨족을 너무나 좁은 개념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씨족은 보통 단순한 인간집단으로 여겨졌다. 부족의 단순한 하위집단으로서 씨족은 부족처럼 인간으로만 구성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이렇게 추론하면서 원시인이 가졌던 세계와 사회에 대한 관념을 유럽식으로 대치하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에게는 사물들 그 자체, 즉 우주에 충만한 모든 사물들이 부족의 일부가 된다.
-339
인간은 그가 속한 씨족의 사물들을 친척이나 친지처럼 여 긴다. 인간은 사물들을 친구라고 부르고, 사물들도 그들과 같은 살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한다. 그 둘 사이에는 선택적 친화력과 매우 특수한 협약관계들이 존재한다.
씨족사람들과 그 씨족에 분류된 사물들은 그들의 결합에 의해 견고한 체계를 형성하고 있는데, 그 체계의 모든 부분들은 연결되어 있으며 호의적으로 감응한다. 무엇보다도 순수하게 논리적으로 보일 수 있었던 이러한 조직은 동시에 도덕적(morale)이다.
-352-353
이러한 종족에게는 사람들이 숭배하는 모든 개별 신들을 능가하는 탁월한 힘이 존재하는데, 다른 모든 것들은 와칸(wakan)이라 불리는 그 힘에서 파생된 형태이다. 시오우(siou)의 신전에서 이 본체에게 부여한 우월한 지위 때문에 사람들은 와칸을 때로 최고신의 일종, 또는 주피터나 야훼로 여겼다. 여행자들은 종종 와칸을 '위대한 영'이라고 번역했다. 이것은 그 진정한 본질을 크게 오해한 것이었다. 와칸은 조금도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다. 원주민들은 와칸을 특정한 형태로 표현하지 않는다. 와칸은 이것저것을 행하는 능력이며, 정의되지도 않고 정의될 수도 없는 힘이다.
그 힘은 살아 있는 모든 것, 움직이고 활동하는 모든 것의 본체이다. "모든 생명은 와칸이다. 어떤 힘을 나타내는 모든 것은 와칸이다. 흘러가는 구름과 바람처럼 적극 적인 행동 형태로 나타나는 힘이나 길가의 바위처럼 소극적인 저항 으로 나타나는 힘이나 다 마찬가지이다."
이러쿼이족의 오렌다(orenda)라는 말은 수족의 와칸과 정확하게 같은 것이다. 세상에서 자기 몫의 오렌다를 가지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단지 그 양이 다를 뿐이다.
쇼쇼니족(Shoshone)에서는 포쿤트(pokunt), 알곤킨족에서는 마니토(manitou), 콰키우틀족에서는 나우알라(nauala), 틀링키트족에서는 예크(yek), 하이다족에서는 스가나(sgana)라는 명칭으로 똑같은 개념이 표현되고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메리칸 인디언들에게만 특이한 현상은 아니다.
-424-427
우리는 방금 매우 원시적이라고 여길 만한 근거가 있는 체계적으로 결합된 종교적 신앙의 총체를 기술해보았다. 하지만 거기에서 이러한 종류의 인격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른바 토템 숭배라는 것은 특정한 어떤 동물이나 식물 또는 어떤 식물종이나 동물종이 아니라 이러한 사물들 속에 확산되어 있는 일종의 모호한 힘에 호소하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좀더 높은 보편성에 이르는 동시에 전에는 없었던 명확성을 가지고 표현된다. 모든 종교체계를 지배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개념이다.
-435
이제 우리는 신비한 인격, 신 또는 영의 개념으로 종교를 정의하는 것이 왜 불가능했는지를 좀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종교적 사물을 표현하는 이러한 방식은 그 사물들의 본성에서 기인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종교적 사고의 기원과 근저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특정한 변별적 대상이나 존재가 스스로 거룩한 특성을 가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거룩한 특성을 가지는 것은 무한한 능력, 익명적인 힘들이다.
-436
오렌다나 와칸과 마찬가지로 마나도 토템의 본체라고 말할 수 있다. 바로 그러한 본체에 의해 씨족의 사람들이나 토템종의 동물과 식물의 생명이 유지된다.
따라서 힘의 개념은 종교의 기원이다. 처음에는 철학이, 그다음에 과학이 종교로부터 힘의 개념을 차용했다.
-443
“두려움이 세상에 최초의 신을 만들었다"(Primus in orbe deos fecit timor)는 유명한 공식은 사실들에 의해 전혀 정당화되지 않았다. 원시인은 그의 신들을 이방인이나 적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 질투심이 많고 무서운 신 들은 종교적 진화에 있어서 훨씬 늦게 나타났다. 원시사회는 어마어마한 힘으로 인간을 짓누르고 인간에게 엄격한 훈련을 가하는 거대한 레비아탄(Leviathans)들이 아니다.
-475
물리세계가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감정들에는 요컨대 이 세상을 초월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신자가 자신이 의지하는 도덕적인 힘, 자기에게 가장 좋은 것 을 주는 도덕적 힘의 존재를 믿을 때 그는 기만당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힘은 존재하며, 그것이 바로 사회이다. 종교의 일차적인 목적은 인간에게 물리세계에 대한 표상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것이 종교의 기본적인 임무라면 그러한 측면에서 볼 때 오류투성이에 불과한 종교가 어떻게 살아 남을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교는 무엇보다도 관념 체계이다. 바로 그 체계에 의해 개인은 자신이 소속된 사회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사회와 맺고 있는 모호하지만 긴밀한 관계들에 대해 상상한다. 이것이 종교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다.
-477
우리는 결코 인간 본성의 이 중성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물리적인 필요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의 관념을 표현하기 위해 관념을 상징화해서 나타내주는 물질적인 사물들 위에 고정시킬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제 토템 원리, 좀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종교적 힘이 어떻게 그것이 머물고 있는 사물들의 외부에 존재하게 되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종교적 힘은 공동체가 그 구성원들에게 불러일으키는 감정이다. 그러나 그 감정은 그것을 느끼는 의식(플)의 외부에서 투사되고 객관화된다. 그러한 느낌이 객관화되기 위해 그것은 성스럽게 된 어떤 대상에 고정된다.
-481-482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부여한 성스러운 특성은 순수한 환상의 산물이 아니다. 사회는 우리 안에 지속적으로 자리를 잡는다. 사회는 우리 안에서 관념과 감정의 모든 세계를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관념과 감정은 사회를 표현하는 동시에 우리 자신의 총괄적이고 영속적인 부분을 이루고 있다.
행위의 강제적 규범들은 그 기원이 사회라는 이유 때문에 우리의 다른 내적 상태들이 가질 수 없는 권위와 위엄을 부여받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들에게 우리의 심리적 삶의 총체 안에 별도의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이다. 비록 우리의 도덕의식이 우리 의식의 일부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자신을 도덕의식과 동등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단지 우리에게 명령하고 제동을 걸기 위한 이러한 소리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목소리를 인지할 수 없다. 그 목소리가 우리에게 말하는 음조까지도 우리 안에 있지만 우리와 다른 어떤 것을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것이 영혼 개념의 객관적 근거이다. 우리 안에는 공동체의 영혼이라 할 수 있는 이러한 위대한 이상의 조각이 있기 때문에 우리 안에는 거룩함의 조각이 진정으로 존재한다.
-536-537
우리의 도덕의식은 핵과 같으며, 그 핵 주위에 영혼 관념이 형성된다. 도덕의식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삶의 시련들에 대해서 더 강해진다고 느끼며, 그것들을 이겨내리라고 더욱 확신하게 된다. 마치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이 그의 선조나 개인 토템을 믿을 때 적들에 대해서 좀더 용감해진다고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565
종교적 관심사들은 사회적 • 도덕적 관심사들의 상징적 형태에 불과하다. 사회는 인간의 능력을 고양하 면서도 개인에게는 때때로 엄하다. 사회는 필연적으로 개인에게 영 구한 희생을 요구한다. 사회는 우리의 본능적인 욕구를 끊임없이 침해한다. 그러므로 모든 사회생활에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으며, 모든 신화와 교리보다 오래 살아남게 마련인 금욕주의는 언제나 존재하게 된다. 그것은 모든 인 간문화의 필수불가결한 부분이다. 결국 금욕주의는 모든 시대의 종교들이 가르쳐온 것의 정당화이며 존재 이유이다.
-621
사회적 힘들은 활동의 산물이 아니라 우리 내면적 삶의 한 부분이다. 성스러운 존재를 구분하고 속된 존재들을 멀리하는 힘은 사실상 성스런 존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힘은 신도들의 마음속에서 살고 있다. 어떤 행동들 을 금지하거나 다른 것들을 명령하기 위해서 그 힘이 그들의 의지에 작용하는 순간 신도들은 그 힘을 느낀다.
게다가 힘의 개념은 그 기원의 표지를 분명하게 지니고 있다. 사실상 힘의 개념은 능력의 개념을 내포한다. 그것 또한 주도권 • 지배권• 우월권 등의 관념과 동시에 의존과 종속 개념 없이는 성립될 수 없다. 따라서 이 모든 개념들이 표현하는 관계들은 분명히 사회적이다. 존재들을 우월한 것과 열등한 것으로, 명령하는 주인과 복종하는 하인으로 분류하는 것은 바로 사회이다.
-698
의례들은 사회집단이 주기적으로 재확인되는 수단이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토템 숭배가 처음 생겨나게 된 방식을 가설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1) 부분적으로 혈연관계에 의해서 일치감을 느끼고, 더 나아가서는 이해관계와 전통을 함께하는 공동체에 의해서 더욱 일치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모여서 그들의 도덕적 동질성을 의식한다.
2) 그들은 이러한 동질성을 일종의 매우 특수한 동체의 형태로 표현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 모두가 어떤 특정한 동물의 본성을 함께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들을 이와 같은 종의 동물로 인정하는 것이다.
3) 이러한 인정은 그들 자신의 조용한 사고 속에서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행동에 의해서도 이루어진다. 숭배는 바로 이러한 행위들로 구성되는데, 그 행위들은 분명히 사람이 자신과 동일시하는 동물을 모방하는 동작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모방 의례들이 숭배의 최초의 형태로 보인다.
4) 일단 동물과 사람의 긴밀한 유대가 인정되면 사람들 은 숭배의 주된 대상인 토템종의 규칙적인 번식을 보장해 줄 필요성을 생생하게 느끼게 된다. 따라서 원래는 도덕적 목적만을 가졌을 모방 의례들이 유용하고 물질적인 목적에 종속되었다.
5) 신화의 발전을 통해 처음에는 토템 동물과 혼동되었던 조상의 영웅이 점점 더 구분되고, 더욱더 인격적인 모습을 띠게 됨에 따라 선조의 모방이 동물의 모방을 대체하거나 나란히 병행되었으며, 재현의례들이 모방 의례들을 대체하거나 완성시켰다.
6) 사람들은 자신들이 바라는 목적에 보다 확실하게 도달하기 위해서 성스러운 바위 안에 축적된 생생한 힘을 가까이에 저장해두고 그것을 사용했다. 사람의 피는 동물의 피와 똑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같은 목적으로 사용했고, 또한 동물의 피를 흘렸다. 반대로 이와 같은 연관성 때 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실체를 회복시키기 위해 동물의 살을 사용했다. 거기에서 헌신의례와 영성체 의례들이 유래된다.
-731-732
순수한 것과 불순한 것은 별개의 두 종류가 아니라 모든 성스러운 사물들을 포함하는 같은 장르의 두 변이이다. 두 종류의 성스러움이 있는데, 하나는 길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불길한 것이다. 이 두 형태 사이에는 단절이 없을 뿐 아니라 동일한 대상이 그 본질을 바꾸지 않고도 서로서로에게 이전될 수 있다. 사람들은 불순한 것을 가지고 순수한 것을 만들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역도 성립한다. 성스러움의 애매모호함은 이러한 변화의 가능성에 있다.
악의 힘들이 다른 힘과 동일한 강도와 전염성을 가진다는 사실이 어디에서 기인되었는가 밝혀야 할 일이 남아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어떻게 악한 힘들도 종교적 특성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768-769
사회가 슬프고 불안하고 화가 나는 상황에 처하면 사회는 구성원들로 하여금 그들의 슬픔, 불안, 분노를 의 미심장한 행동으로 표현하도록 압력을 가한다. 사회는 구성원들에 게 울고 탄식하고 자신이나 남에게 상처를 낼 것을 의무로 부과한다.
인간이 그들의 외부에 악한 존재들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제도적이건 일시적이건 그 적의가 인간의 고통에 의해서만 무마될 수 있다고 상상할 때, 인간은 바로 이러한 경험을 해석한다. 따라서 악한 존재란 객관화된 집합적 상태이며, 그 존재들은 여러 양상 중 하나에 조명된 사회 그 자체이다.
위의 사실로 미루어 우리는 어떻게 이 두 힘이 서로서로 바뀌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그 힘들은 집단이 처해 있는 감정상태를 반영하기 때문에 이러한 감정상태가 변하면 그 힘들의 의미가 변한다. 어떤 사물들을 신성하게 만드는 것은 그 사물들을 대한 집합감정이다.
-770-771
신도들, 즉 종교적 삶을 살며 종교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를 직접적으로 느끼는 사람들은 그들의 일상적 경험과 부응하지 않는 방식으로 종교를 보는 것에 반대한다. 사실상 종교의 진정한 기능은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거나 우리의 지식을 풍부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과학 덕분으로 돌리는 표현에다 다른 기원이나 다른 특성을 가진 표현을 덧붙이는 것도 아니다. 종교의 기능은 우리를 활동하게 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777
종교는 현실 사회를 무시하고 제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이미지 속에서 존재한다. 종교는 사회의 모든 면, 심지어는 가장 저속하고 가장 혐오스러운 면까지 반영한다.
대개 종교에서 선이 악을 이기는 것, 또한 삶이 죽음을, 빛의 권세가 어둠의 권세를 이기는 것을 본다면 그것은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상반되는 이러한 두 힘의 관계가 역전된다면 삶은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가 신화와 신학을 통해 현실을 분명하게 드러내 보인다 해도 그 현실은 확대되고 변형되고 이상화되어 있음이 사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가장 원시적인 종교도 가장 최근의 그리고 가장 세련된 종교와 다르지 않다.
-784
이상세계의 형성은 과학으로부터 벗어난, 확고부동한 사 실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관찰 가능한 상황에 의존하고 있다. 그것은 사회생활의 자연적인 산물이다. 사회는 이상을 만들어내지 않고는 자기 자신을 창조하지도 못하고 재창조하지도 못한다. 이러한 행위에 의해 사회는 만들어지고 주기적으로 다시 만들어진다.
종교가 표현하는 집합 이상은 개인의 어떤 타고난 능력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집합적 삶이라는 학교에서 기인하는데, 개인은 그 학교에서 이상화하는 것을 배운다. 사회가 고안한 이상에 동화됨으로써 개인은 이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새로운 세계가 표현하는 것도 사회이다. 개인뿐 아니라 집단에서도 이상화하는 능력은 신비할 것이 하나도 없다. 이 능력은 인간에게 없어도 괜찮은 일종의 사치품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조건이다.
-786-787
종교적 사고를 연속적으로 감싸주는 모든 개별적 상징들보다 더 오래 살아남도록 되어 있는 어떤 영원한 것이 종교 속에는 존재한다. 사회의 통일성과 인성을 이루고 있는 집합 감정과 집합 관념을 일정한 간격을 두고 유지하고 공고히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사회는 없다.
만약 오늘날 미래의 축제와 예식들이 무엇으로 구성될지 생각하는 것이 어렵다면, 그것은 우리가 도덕적 평범함과 전이의 한 단계를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선조를 흥분시켰던 과거의 위대한 것들이 더 이상 우리에게 똑같은 열정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과 대치될 만한 것은 아직 아무것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오래된 신들은 늙거나 죽었으며, 다른 신들은 태어나지 않았다. 인위적으로 소생시킨 오래된 역사적인 추억을 가지고 종교를 조직하고자 했던 콩트의 시도를 헛되게 만든 것이 바로 이것이다. 살아 있는 숭배가 나올 수 있는 것은 죽은 과거가 아 니라 삶 그 자체인 것이다.
-793-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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