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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리 부잔, 레네 한센 <국제안보론>

딸기21 2025. 7. 3.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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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안보론 The Evolution of International Security Studies
배리 부잔•레네 한센. 신욱희• 최동주• 이왕휘• 황지환 옮김. 을유문화사. 7/3



1945년 이후의 문헌들은 세 가지 면에서 차이를 갖는다. 첫째, 이들은 방어나 전쟁보다는 안보를 핵심개념으로 삼았고…ISS의 핵심 개념을 포착할 수 있는 안보(개념)의 능력은 안보를 모호한 상징이라고 말한 월퍼스의 유명한 정의에 응축되어 있다. 둘째, 이 문헌들은 냉전과 핵무기가 갖는 특징적인 문제를 제기하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군사적인 수단을 어떻게 배치하고, 사용하거나 혹은 사용하지 않는가 하는 것은 핵 시대에 확실히 다른 문제가 되었고, 하부영역으로서의 ISS가 만들어지게 된 것은 바로 이 문제에 연유하는 것이었다. 세 번째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의 영국과 미국의 총력전 동원체제와 핵무기로 인한 독특한 전략적 환경 모두와 관련된 것으로서, ISS가 그 이전의 군사적, 전략적 문헌들보다 좀 더 시민사회적인 작업이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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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에 새로운 기치가 된 개념이기는 하지만(Yergin, 1978: Waever, 2006), 그 주제가 갖는 광범위한 의미는 냉전기 후반이 되어서 비로소 충분히 인식되었다. 냉전기 전체에 걸쳐 ISS는 대개 핵무기에 관련된 군사적 의제의 문제로서 정의되었고 소련이 서방에 대해 심각한 이념적, 군사적 위협이 되고 있다는 가정에 주로 연관되었다. 1970년대 이래 강대국 사이의 핵문제가 안정화되자 안보개념이 가지고 있던 본질적인 범주가 재등장 하였고, 국제안보의 의제는 군사-정치적인 초점에서 더 넓게 확대되었다. 냉전 후기에 경제, 환경안보의 의제가 제기되었고, 1990년대에 이르러 사회(혹은 정체성)안보, 인간안보, 식량안보 등의 의제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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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기 ISS에서의 초점은 분명히 외부적 위협에 주어져 있었다. 현실주의자들은 국가의 안보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였고, 안보를 주로 (군사적) 권력의 사용을 통하여 이해하여 왔다.
그러나 그들은 일련의 다른 의제들과 능력에도 또한 관심을 가져 왔는데, 그 중의 하나가 군사력을 투사하는 국가의 능력에 영향을 주는 국내적 응집의 문제였다.
최소한 전략연구의 형태로의 대부분의 냉전기 ISS가 왜 안보의 외부적 차원에 초점을 맞추었는가의 이유는 국내적 응집과 보호되어야 할 가치가 최소한 서구 세계에서는 대개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소련의 위협에 직면해 국내적인 취약성과 불만을 보완할 필요성을 지적한 케넌과 같은 전통주의자들도 있었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미국에서는 강력한 공산당이 있는 서부 유럽국가의 국내적 응집에 대한 상당한 우려가 존재하기도 하였다. 냉전기 동안 주류 ISS의 접근법에서 왜 안보의 국내적인 차원이 중시되지 않았는가의 이유는 따라서 국가안보개념 내부의 내재적인 특성이라기보다는 경험적이고 정치적인 맥락(다른 모든 관심사를 퇴색시키는 핵의 압도적인 중요성)에 좀 더 연관되어 있었다. 냉전이 끝나고 종족 간의 갈등이나 내전이 전면에 나서게 되자 국내적 안정성과 응집의 문제도 함께 대두되었다(Posen, 1993; Van Evera, 1994; Kaufmann, 1996).
-66-67

'합리적'이라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체가 ISS에서 논쟁적인 의제이다.
합리성 가정은 분석수준에 대한 결정과 연관되어 있다. 구조이론들, 특히 대표적으로 신현실주의는 국제체제 전반에 걸쳐 적용되는 국가의 일반적인 개념화를 가정하였다.
냉전기 억지에 대한 중요한 논쟁은 합리성 가정이 유지될 것인가의 문제를 두고 전개되었다. 공산진영, 그리고 실제로 미국의 지도층들이 핵의 확전에 직 면하여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가. 아니면 그들이 다른 논리를 따를 것인가 혹은 발견될 수 있는 논리가 전혀 없는 것인가?
문제점은 억지의 논리가 어느 정도의 합리성이나 예측 가능성을 필요로 하지만 반면에 사전에 그러한 논리가 존재하는지, 그리고 핵전쟁의 극단적인 상황에서 그것이 지속되는지를 알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합리성의 문제는 9•11 이후 다시 등장하였다.
-70-71

ISS에 핵심적인 첫 번째의 인식론적 구분은 안보의 객관적, 주관적, 그리고 담화적 개념 사이의 것이다.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안보의 정의는 ISS의 초기 고전적 저작 중의 하나인 월퍼스의 National Security as an Ambiguous Symbol(1952)에서 제시되었다. 월퍼스는 '객관적인 의미에서의 안보는 획득된 가치에 대한 위협의 부재로 측정할 수 있고, 주관적인 의미에서의 안보는 그러한 가치가 공격받을 것이라는 공포의 부재로 측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월퍼스는 이어서 국가들의 평가 에 있어서 주관적인 측면이 불가피한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안보를 '객관적으로 측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사후의 통찰력을 통해 그 시기에 존재하는 실제적이고 객관적인 위험의 상태에 대한 합리적인 대응으로부터 그들이 정확히 얼마나 벗어나 있었는가를 이야기하는 것은 때때로 가능하다’고 보았다(Wolfers, 1952: 485). 안보의 객관적인 개념화는 대개 안보를 물질적인 척도로 정의하며, 국가가 위협을 가하거나 적을 억지할 수 있는 가능성은 그 물질적 능력에 기반하고 있는 것으로 여긴다.
월트가 그리한 것처럼 세력의 균형에서 위협의 균형으로 이동하는 것은 그 자체가 간주관적 과정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것이다(Walt, 1987). 이러한 개념화는 여전히 객관적인 개념과 연계되어 있다는 점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담화적 접근법들은 이와 대조적으로 안보란 객관적인 견지에서 정의될 수 없으며, 따라서 객관적, 주관적 개념화 모두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코펜하겐 학파의 견해에 따르면 안보란 하나의 화술 행위이며… 안보분석에 있어 중심적인 것은 특정한 '위협들’이 정치적 의제에 관련된 안보문 제로서 자신을 내보이는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다.
-73-74

국제안보연구 진화의 원동력
우리는 강대국 정치, 기술, 중요 사건들, 학술 논쟁의 내적 역동성 그리고 제도화 등 다섯 개의 요인들이 그 과정의 설명을 위해 특별히 핵심적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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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건을 세 범주로 나누었다.
1) 구성적 사건은 특정 이론에 의해 중대한 사태로 주목을 받은 사건이며 해당 이론을 발생하게 하거나 그 이론의 주요 주장을 강화시켜 주는데, 이는 그 사건이 이론의 중심적인 분석의 가정들을 확증해 주거나 또는 그 이론에 의해 설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정 유형의 구성적 사건은 파마(Parmar, 2005)가 촉매적 사건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이 사건은 정치인 혹은 학자들이 외교정책의 급진적인 변화를 위한 그들의 인기 없는 발상이나 계획이 대중의 주목을 받게 해 줄 것이라 믿고 기다려 온 사건이다(Parmar, 2005: 2). 촉매적 사건이 일어난 후에,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그와 관련한 변화를 지지하는 방식으로 구성되는지 그 자취를 따라가 볼 수 있다. 파마가 제시한 한 가지 예는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인데, 미 국무부는 이를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대중이 필요로 하던 바로 그러한 충격으로 생각했다(Parmar, 2005: 17).
2) 현저한 중대 사건은 의심되는 이론의 주요 측면들에 도전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다. 이 사건들은 언론, 정책 이니셔티브 혹은 다른 경쟁관계에 있는 이론들의 압력에 의해 의제로 오르며, 의문시되는 이론이 '새로운 질문과 주제들'에 답하기 위해 연구 의제를 확대하도록 만들 수 있다. 아니면 그 이론이 '중대'하다고 간주되는 이러한 사건을 자신이 왜 설명할 수 있는지 대한 세밀한 정당화를 제시하게끔 할 수도 있다. 또는 이론이 자신의 기본적 가정이나 가설에 대한 약간의 수정을 하게 만들 수 있다. 현저한 중대 사건의 좋은 예는 1990년대 전반에 신현실주의자들이 다루기 시작한 소위 국가 내 인종 전쟁의 급증이다(Posen. 1993; Van Evera 1994; Kaufmann, 1996).
3) 세 번째 범주는 유예된 중대 사건인데 이는 다른 정치적, 언론 혹은 학자들에 의해 중요하다고 인식되었지만, 이론이 이를 무시하거나 ISS의 적절한 범주 내에 들지 않는다고 여긴 사건들이다.
-107-108

안보는 '전쟁’이나 ‘방위’와는 다르게 주제의 군사적 측면과 비군사적 측면을 훌륭하게 연결했다.
이것이 독특하게 미국적인 시점으로 인식되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이 시기에 미국이 정치적 고립주의라는 전통적 외교 정책에서 벗어나 세계적인 세력 균형에서의 중심적 행위자로서 장기적인 싸움과 공약을 감당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핵무기는 모두에게 새로운 게임을 열어젖혔다. 베츠(1997:14)가 정리한 바와 같이, '핵전쟁은 이론화에 박차를 가했는데, 이는 그것이 내재적으로 경험적이라기보다는 이론적이었기 때문이다. 즉 핵전쟁은 아무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냉전이 장기화되고 총체화되며 실존적인 투쟁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명백해 짐에 따라, 통합된 이해의 틀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지지를 받게 되었 다. 이는 1947년 미국의 국가안보법(National Securty Act)의 배경을 이루는 주요한 부분 중 하나이다. 이것이 더욱 포괄적이고 민간적인 용어로 동원을 다루기 위한 '안보'라는 용어가 발생했음을 설명할 때 핵심 내용인데, 이는 군사-중심적 세계에서 민간 전문가에게 특정한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 냉전이 지속되고 안보연구가 소위 말하는 황금기인 1955년과 1965년 시기를 거치면서, 이러한 개념적 논의들은 축소되었고, 그 하부영역은 거의 독보적 으로 핵무기와 양극 경쟁에 대한 연구에 집중되었다.
-122-123

현안과 사건의 압력
베를린과 한국에서의 위기는 서방에 소련(과 중국)의 팽창주의적 시각과 이에 대한 봉쇄의 필요성을 확인시켜준 구성적인 사건으로 작용하였다.
1) 한국에서의 전쟁은 미국의 거대한 재무장과 어느 정도 수준에서 유럽의 재무장의 시작을 알렸다. 그 사건은 서방에서 공산주의 진영'이라는 관념을 공고하게 만들었고, 나토가 유럽에서 당면한 확장억지와 봉쇄 문제 등의 실례를 제공하였다. 미국의 핵무기 보유는 북한의 남한 침공과 미국의 대북한 반격에 대한 중국의 개입도 억지하지 못했다. 봉쇄는 재래식 군사력과 핵 군사력 모두를 포함해야만 했다.
2) 1962년 소련이 핵미사일을 쿠바에 배치하려고 시도하면서 발생한 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세계를 핵전쟁에 더 근접하게 하였다. 그것은 결 과적으로 냉전기 동안 ISS의 진화라는 측면에서 가장 큰 '사건'이 되었다. 가장 분명한 것은 쿠바 미사일 위기가 ISS 내에서 핵심적인 고려 영역으로서 위기관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그것은 작용-반작용 과정에서 확전의 위험을 부각시켰고…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직시하고 억지이론의 중심적인 합리적 가정들에 대 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모형을 제공했다(Allison, 1971: Janis, 1972: Jervis, 1976). 근본적인 고민은 외교정책결정, 특히 미국 외교정책결정에서의 실제적이고 잠재적인 비합리성의 형성을 이해하는 데 있었다.
3) 마찬가지로 1973년의 중동 위기는 또다시 원치 않 는 확전의 문제를 분명히 보여 주었다. 이 경우에는 두 초강대국간의 직접적인 충돌이 아니라, 둘 모두 동맹을 대신해 지역 분쟁에 연루된 결과였다. 1970년대 초에는 양측의 핵전력이 10년 전에 비해 훨씬 확대되었고, 미사일에 더 크게 의존하게 되었으며, 더욱 정교한 경고 시스템과 더 짧아진 반응 시간이 수반했다. 돌이켜보면 아마도 1973년 중동 위기의 주요한 영향, 특히 미국에 있어서의 주요한 영향은 상호의존과 국제정치경제를 IR, 그리고 일정하게는 ISS에 소개하였을 뿐 아니라 (Keohane and Nye, 1977: Gilpin, 1981) ISS 의제에 경제적 안보와 국제 테러리즘을 부가하게 된 것이었다(Nye, 1974; Knorr and Trager, 1977).
그 당시에 덜 눈에 띄었던 것은 이러한 위기가 미국을 이스라엘 편에서 중동에 더욱 깊이 끌어들였으며, 이로 인해 극명히 모순적인 목표들(이스라엘에 대한 지원과 산유국들과의 안정적인 관계의 유지)을 만들었고, 이는 그 후 수십 년 동안 미국의 외교정책의 발목을 잡게 되었다는 점이다.
4) 베트남 전쟁은 특별히 중요한 사례가 되었지만, 그런 규모와 정치적 논쟁에 비해서 ISS 문헌에 남긴 영향은 놀라울 정도로 적었고, 이로 인해 유예된 중대 사건의 가장 강력한 단독 사건이 되었다.

전략연구, 억지, 냉전
전략연구(그리고 더 넓게는 ISS)의 특징 중 하나는 전략적 사고에 대한 민간인의 참여다. 예를 들어 시스템 분석은 군사력 구조와 자원 분배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며,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자연 과학자들, 공학자들, 경제학자들에 의해 발전된 작 전연구와 경제이론에 기반을 둔다(Smoke, 1975: 290~ 293). 랜드(RAND) 연구소의 몇몇 선구적인 작업들은 정책에 집중하였는데, 유명한 사례로 수학자인 월스테터와 그 동료들(1954)이 수행한 '공군기지' 연구를 들 수 있다. 이런 사고방식에 있어서 몇몇 대표주자들은 맥나마라의 '신동들(whiz kids)’이라는 애칭을 받고 케네디 행정부에 입성하였다(Kaplan. 1983: Brodie, 1965). 이런 방법과 기획-계획-예산 시스템과 같은 랜드연구소의 관련 기술이 연방 정부 거의 전체로 확산되었다.
-154-155

전략연구의 제도화: 싱크탱크들 -163-165

평화연구- 구조적 폭력, 경제, 환경
구조적 폭력은 물리적 물질적 결과를 수반한 명백한 부정의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제3세계의 기아 사망뿐만 아니라 문맹과 같이 (예방될 수 있고) 신체에 덜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현상도 포함된다(Galtung, 1969: 169). 특히 이후 논쟁의 측면에서 중요한 것은 갈퉁이 구조적 폭력을 개인이 아닌 집단 수준에 위치시켰다는 것이다. 갈퉁의 구조적 폭력 개념화의 검토대상은 그러므로 국가나 개인이 아닌 인류 집단이며, 가장 주요한 분야적 확대는 (비판적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포용하는 것이었다.
제국주의의 구조적 이론(A Structural Theory of Imperialism)을 포함하는 후기 저작에서 종속이론과 연계는 더욱 분명해졌다. 종속(Dependencia) 이론 은 라틴아메리카의 맥락에서 카르도소와 팔레토(1979) 및 군더 프랑크(1967), 아프리카의 맥락에서 아민(1972, 1975, 1976)에 의해 발전되었다. 경제적인 것을 넘어 제국주의의 영역을 넓히면서, 갈퉁(1971)은 정치적, 군사적, 의사소통 및 문화적 제국주의가 착취적인 지구적 남북 구조를 지탱한다고 주장하였다.
-205-206

1980년대에 평화연구는 점점 더 전문화되어 갔으며... 평화연구와 발전연구 사이의 분업이 증가하여, 후자가 독자적인 전공분야가 되었으며, IR과 국제정치경제학 사이에도 더 큰 분화가 진행되었다. 평화연구는 분쟁연구의 본가로 남아 있는 반면, 개발경제학은 (자유주의적이든 신마르크 스주의적이든) 국제정치경제학의 부분이 되었다.
사실상 1990년대 가장 성공적인 새로운 정치적 개념 중의 하나가 유엔개발계획(UNDP)이 만든 인간안보(human security)이다.
제3세계로부터 자원 추출과 미래 세대에 대한 서방 정책의 영향에 대한 일반적 우려가 190년대 및 70년대 일어난 환경에 대한 관심과 분명히 공명했다. 환경문헌의 일부는 특히 제3세계에서 일어나는 환경적인 '자원전쟁'을 규명함으로써 전략연구의 전통적 의제와 아주 명시적으로 연계 되었다(Uman, 1983). 핵 전쟁이 ‘핵 겨울'의 형태로 환경 위기를 야기할 수 있음을 지적한 세이건(1983/4)의 획기적인 비판에서처럼 일부 '환경 문헌'은 핵전쟁과 연계되었다(Nye, 1986).
-209-210

페미니즘 안보 연구
개인의 관점에서 안보를 고려하는 것은 '덜 국가중심적이고 덜 군국주의적인 안보개념'을 옹호하는 것이다(Tickner, 1992: 53). 페미니스트들은 양적 평화연구의 실증적 인식론과 단절하고 여성의 경험에 기반을 둔 ‘다층적이고 다차원적' 개념화를 채택하였다(Tickner, 1992: 66). 신시아 인로는 예를 들어 어떻게 군사 기지가 병사 부인들의 무보수 작업에 의존하고 있는지, 매춘의 성적 경제가 국가 안보라는 이름으로 용인되고 있는가, 그리고 핵 배치의 지구 정치가 그린엄 커먼에서 항의하는 여성들에 의해 반대되고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Enloe, 1989).
티크너는 성을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 전통의 작업은 여성이 다수의 국가 행위에 의해 불리한 영향을 받는 양상, 예를 들어 여성과 아동이 난민으로서 불균형하게 고통받는 상황, 가정 내 폭력이 '공공’ 폭력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방식으로 용인되는 상황, 국가가 최근까지 전시 강간을 상대진영을 점렁하는 군인들의 예측 가능한 '부산물'로 구성해온 관행에 대한 중요한 설명을 해왔다.
-227

탈냉전기의 국제안보연구 : 전통주의자들
미국 단극체제가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문헌들의 애초 가정-'순간적인 단극(unipolar moment)'-은 강대국 관계가 균형에 의해 지배될 수밖에 없다는 신현실주의 이론의 핵심 아이디어에 강력하게 뿌리 밝혀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가 지나면서 이 시각은 점차 단극체제가 꽤 내구적이라는 가정으로 변화하여 왜 미국에 대한 균형이 없는가(Kapstein, 1999: Ikenberry. 2002) 그리고 이것이 미국 정책에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논의로 이어졌다.
그것들은 전반적으로는 대서양 협력과 구체적으로는 나토에 대한 훨씬 더 광범위한 우려에 대한 것이었다. ‘서방' 그 자체가 단순히 냉전의 인조물이었는가? 미어샤이머(1990)의 ‘과거로의 복귀' 주장은 나토와 EU가 양극체제의 산물로서 냉전과 함께 곧 사라질 것이라는 신현실주의 시각을 예시하였다.
냉전은 내국적인 서방 안보공동체를 구축했는가? 그들의 공동 문화, 경제적 이익, 제도 및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공약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는가? 이 시각은 두 가지 서로 밀접한 문헌들에서 표현되었다. 하나는 냉전의 말미에 본격화된 민주평화론이다. 다른 문헌은 탈냉전 세계의 '두 세계'로의 편성에 대한 것이다. 이는 두 궤도의 국제체제 -자본주의 중심 국가들 사이의 평화의 민주주의 구역과 주변부의 분쟁 구역 --를 제안함으로써 민주평화론에 맥락을 부연했다(Buzan 1991b, 432; Goldgeier and McPaul 1992;
Singer and Wildavsky 1993; Deutsch et al., 1957; Keohane and Nye, 1977). 이 시각에서 새로운 세계질서는 오직 중심에만 있으며 주변부는 여전히 오래된 현실주의적 게임의 규칙에 놓여 있었다.
-262-263

강대국 전쟁이 역사의 휴지통으로 들어갔다는 생 각에 대한 잠재적 위협이 있었다면 그것은 중국의 부상이었다. 주요한 관심은 동아시아의 부상하는 국가들이 고전적 현실주의의 불안정한 국가간 경쟁과 세력균형 모델로 쉽게 진입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강대국 전쟁의 분명한 퇴화는 단지 서구적 현상(평화 구역)이고 아마도 아시아에는 적용되지 않을 것(Braken, 1994)이라는 의혹과 함께 논의되었다.
-266-267

군사혁명(RMA)
탈냉전 논쟁은 잠재적으로 비합리적인 행위자에 대한 방어 및 미국의 유일한 초강대국 위상 강화라는 욕망에 의해 진행되었다. 불량국가에 대한 BMD 논쟁의 초점은 탈냉전 전략연구의 나머지와 마찬가지로 핵 및 미사일 기술의 확산에 대한 우려와 연계되었다.
이 문헌들은 BMD 배치의 정치적 및 전략적 결과에 대한 새로운 기본적인 통찰을 거의 전달하지 않았다. 그것은 대개 미국 정책의 변화와 미사일 및 핵기술 능력의 전파에 대한 대응이었다.
BMD의 발전은 탈냉전 전략연구 문헌들을 특징짓는 군사기술 발전에 대한 한 가지 요인일 뿐이었는데, 이는 미국이 계속 엄청난 군사예산과 거대한 군사연구 개발 지출을 유지하였기 때문이다. 미국과 다른 모든 군사 대국사이에 넓은 기술 격차를 유지하는 것은 이런 능력에 대한 절실할 필요가 있었는가와 상관없이 유일한 초강대국 지위의 상징이었다.
(RMA 문헌들은) 주로 감시, 유도, 통신 및 정보처리 기술 향상의 영향력에 대한 것이며, 이 기술들은 구체적으로는 전장 관리, 일반적으로는 전쟁 수행의 변환을 불러올 것으로 보였다. 무엇보다도 RMA는 미군의 전장에서의 압도적 우위, 그리고 제한전을 수행하는 데 따르는 워싱턴의 정치적 문제를 완화해 줄 수 있는 (미국의) 무사상자 전쟁에 대한 전망을 제공하였다. 이는 나아가 비대칭적 전쟁(Arreguin-Toft, 2001, 2005: Barett, 2003)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켰다. RMA는 또한 미군과 그 동맹군 사이에 점증하는 질적 격차가 서방 동맹을 침식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동맹이 필요한가? 만약 그렇다면. 동맹군의 상호운용은 유지될 수 있는가? 이런 의미에서 RMA는 1990년 대 후반 미국이 보다 일방주의로 이동하는 데 기여한 몇 가지 요소들 중의 하나이다.
-268-270

비판적 구성주의
민주평화이론은 오런(1995, 2003)에 의해 도전받았 는데, 무엇이 국가를 민주주의적으로 만드느냐를 정의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보면 미국이 어느 국가를 적국으로 생각했느냐의 결과였다는 주장이다. 나토의 확대에 대한 윌리엄스와 뉴먼의 분석(2000)은 그것이 보편적인 민주적 가치에 의해 이루어진 자유주의적 안보공동체 프로젝트라기보다는 상징적 권력의 실행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305

탈식민주의
탈식민주의는 비서구 국가가 '실패’했다든지 '후진적‘이라는 시각을 문제 삼는다. 탈식민주의자들은 이러한 실패가 서구 식민주의와의 불평등한 만남의 후유증이며(Niva,
1999: Barkawi and Latfey, 2006), 서구와 나머지 지역 사이에 경제, 사회, 군사적 불평등관계가 지속적으로 존재한다고 반박한다.
또 다른 분파는 1970년대 마르크스주의 평화연구에 서 떨어져 나왔는데, 물질적 구조보다는 정체성의 담론적 형성을 강조한다. 탈식민주의와 탈구조주의는 서로 의존하며 서구의 정치와 학문이 남반구, 동양, '후진' 및 실패한 타자라는 용어를 만들어 냈다는 점을 지적한다(Do, 1996: Mippict, 1999: Ninz, 1999). 이러한 열등한 정체성은 제3세계 핵확산에 반대하는 주장에서처럼 서구에 의해 이용될 수 있는 '변하지 않는 식민 이전의 문화적 핵심'이며(Mutimer, 1998: Niva, 1999: 150: Biswas, 2001: Grovogui, 2007: 240 ~241), 또한 비서구 국가의 엘리트들에게는 국내외적으로 자신들의 위치를 상승시키는 데 동원될 수 있다(Niva, 1999: 150~ 152).
-309

탈구조주의
1990~91년의 걸프 전쟁은 개입과 전쟁을 서구가 어떻게 정당화하는지에 관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최초의 사건이었다(Luke, 1991: Der
Derian, 1992: 173~ 202: Shapiro, 1992: Campbell, 1993: Kusisto, 1998).
이것은 냉전기에 그랬던 것처럼 타자를 억지하거나 위협하기보다는, 타자 즉 국가들(쿠웨이트)과 지역(코소보) 혹은 사람들(보스니아인, 소말리아인)을 방어하면서 이루어진 군사적 행동에 관한 관심을 제고시킨 것이었다. 웨버의 Simulating Sovereignty(1995)는 개입에 관한 1990년대 탈구조주의 논쟁에 중요한 이론적 공헌이었다. 웨버는 개입하는 세력들이 타국의 '사람들'을 대신하여 그 정부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자신들이 행동에 나선 것이라 주장하며 스스로를 정당화했음을 보여주었다.
소말리아와 보스니아, 코소보의 '국내적 충돌/전쟁’에 대해서는 담론이 '전쟁에서 인도주의적 개입'으로 변했다. 이러한 표상의 이동이 서구가 스스로를 어떻게 만들어내는지, 특히 정부가 스스로를 국제 공동체, 분쟁에 의해 포위된 사람들, 그리고 '뭔가 해야만 한다고 요구하는 자국의 미디어와 자국 국민들에게 어떻게 정당화했는지에 미친 영향은 여러 탈구조주의적 분석의 주요 주제였다.
걸프 전쟁은 나아가 현대 기술, 특히 전쟁이 어떻게 수행되며 전 세계 미디어 시청자들에게 전달되는지에 대한 탈구조주의자들의 관심을 촉발시켰다.
-335-337

9/11과 테러와의 전쟁
현실주의의 시각에서 보면, 9•11은 국제분쟁이 없었던 모습이 거스를 수 없는 질적인 변화의 징후가 아니라 무정부체제 내의 긴장의 고저에서 나타나는 짧은 기간이라는 영원한 진리를 되새겨 준 것이다.
그러나 전지구적으로 네트워크화된 비국가행위자들의 등장은 전통적 사고를 지지하던 국가중심성과 합리성 가정 모두에 의문을 제기했다.
포즌(2001/2)이나 월트(2001/2) 같은 저명한 신현실주의자들은 빈라덴이 합리적 행위자이며 9:11 공격이 그의 더 큰 중동정책의 일환으로 이 루어졌다는 분석을 빠르게 발전시켰다. 미어샤이머와 월트(2003)는 사담 후세인이 폭력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으며, 따라서 전쟁이외의 다른 수단에 의해 억지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테러와의 전쟁은 현실주의자와 신보수주의자 및 자유제도주의자들 사이의 정치적 분석적 차이를 낳았다(Boot, 2004; Der Derian, 2004; Williams,
2005). 미어샤이머(2005: 6)의 직설적인 결론은 이라크에서 현실주의자들은 옳았고 신보수주의자들은 틀렸다는 것이 증명되었다는 것이다.
-351-352

기술
1) 주목할 것은 억지 논리에 대한 근심의 형태이건 아니면 핵확산에 대한 우려의 형태이건 간에, ISS의 사고에 있어서 핵무기가 차지하는 매우 크고 지속적인 존재이다.
2) 점점 더 세련되어지는 로봇 군인과 비행사의 영향과, 누가 무력을 사용하고 어떻게, 그리고 언제 그것이 사용되는가에 대한 도덕적이고 전략적인 사고에 그들이 갖는 함의를 고찰할 수도 있다. 3) 환경, 사이버-안보 그리고 핵확산의 시나리오는 ISS에 대한 기술의 영향에 관해 생각해 보는 통상적이지 않지만 중요한 방법을 제시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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