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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성황, <중국필패>

딸기21 2025. 3. 28.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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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필패
야성황. 박누리 옮김. 생각의힘. 3/28


재미있었다. 번역도 넘 좋고.


중국 정권의 지속력을 잘못 판단한 이들의 역사는 유구하고, 고든 창(2001, <중국의 몰락>)은 그 가운데 한 명일 뿐이다. 1850년대에 마르크스는 청 왕조의 붕괴가 임박했다고 예측했다. 하지만 민중 반란과 외세의 침략이 라는 엄청난 압력에 시달리면서도 청나라는 60년이나 더 버텼고 마르크스는 죽을 때까지 청의 멸망을 보지 못했다.
중국을 잘 아는 사람들은 중국의 멸망을 섣불리 예측하지 않는다. 왕조 시대 중국에 대해 에릭 존스는 "중국의 유일무이함은 어마어마한 세월 동안 제국과 문화를 유지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정치학자 앤드류 네이튼Andew Nathan은 많은 사람이 천안문 사태가 중국의 붕괴를 불러오리라 예측할 때 중국의 "권위주의적 회복력"에 주목하며 반박했다.
마오쩌둥 치하에서 중국이 겪었던 권력 투쟁은 1978년 이후 개혁개방 시기를 거치면서 상당히 약화했다. 특히 1989년에는 천안문 사태가 일어났지만, 이러한 민중 반란은 대체로 중국의 전반적인 국가 구조를 크게 손상하지 않고 통제되었다.
-26-27

왕조 시대 중국은 때때로 분열에 빠졌지만 현상적인 분열이었지 법적인 분열은 아니었고, 6세기에 통일 국가로 재건된 후 단 한 번 도 이전으로 돌아간 적이 없다.
로마 제국과 중국 제국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차이점이 있지만 한 가지 요소만 강조해 보겠다. 중국 제국은 범위를 축소하여 규모를 확장할 수 있는 도구를 발명했다. 이것이 바로 EAST 공식의 첫 글자인 시험,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587년에 발명된 공무원 시험 즉 국가 주도 관료 채용 시험이다.
민주주의와 독재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규모와 범위 사이의 갈등을 해결한다. 독재는 강압, 정보 통제, 이념적 세뇌, 가치 관 주입을 통해 범위의 확장을 억압한다. 민주주의는 범위를 보존 하지만 모든 사안에 대해서 그렇지는 않다. 민주주의는 몇 가지 차원에서는 범위를 제한함으로써 다른 차원의 범위들- 예를 들면 정치적, 종교적, 성적 지향 등을 보존하고 확대할 수 있도록 한다.
-31-32

1980년대 초, 통제받지 않는 국가와 견제받지 않는 권력의 문제에 대한 중국 사회의 깊은 자아 성찰과 반성이 이루어진 시기가 있었음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중국공산당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철저한 자기 진단을 한 적이 없지만, 그나마 가장 근접한 경우가 바로 건국 이래 중국공산당의 행동과 성과에 대한 1981년의 사후 진단이었다. <건국 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 문제에 관한 결의>라는 제목의 이 문서는 '지배적인 계급 관계에 대한 잘못된 평가'를 내린 마오쩌둥에게 주된 책임을 돌렸지만, ‘전국적인 규모의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중국공산당과 중국의 오랜 봉건주의 전통에도 책임이 있다고 언급한다.
시진핑 체제에서 인격 숭배가 부활한 것은 이 운동이 얼마나 불완전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1980년대 중국공산당은 당내 민주주의와 집단적 리더십에 가까운 그 무엇을 향해 서서히, 점진적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1980년대 중국의 공식적인 국가 구조는 중국 역사상 그 어떤 시기와도 달랐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1980년대 내내 중국공 산당 수장(중앙위원회 총서기), 국가 원수(국가주석), 군 통수권자(중 앙군사위원회 주석)가 모두 다른 사람이었다. 1993년 이후로는 한 사람이 이 세 직책을 독점하게 된다.
천안문 사태가 일련의 역학 관계를 도미노처럼 촉발하여 결국 이러한 결과를 초래했다. 가장 먼저 무너진 것은 자오쯔양과 같은 선구적이고 개혁적인 지도자 그룹이었다. 후치리, 완리, 톈지원, 옌밍푸 등 중국 지도부 내에서 가장 진보적이었던 인물들 역시 당 지도부 개편에서 밀려났다. 그리고 그 자리는 중국에서 가장 국가주의적인 상하이 출신들로 채워졌다. 정치와 경제 양쪽의 자유주의를 연결했던 1980년대의 이념적 끈은 끊어졌다.
-195-196

천안문 사태의 영향이 충분히 평가되지 않고 있는 부문은 경제이다. 1989년 이후 중국은 높은 GDP 성장률을 유지해 왔지만, 데이터를 면밀하게 분석해 보면 천안문 이후 중국 GDP에서는 노동이 차지하는 비중이 감소하고, 가계 소비가 차지하는 비중도 감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80년대에는 가계소득 증가율이 GDP 성장률을 앞지르거나 비슷한 수준이었다. 천안문 이후 수 년 동안 GDP 성장률이 가계 소득 증가율을 앞질렀다.
천안문 이후 중국 지도부에 대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이들 중 압도적 다수가 중국에서 가장 개혁이 뒤처진 지역인 상하이 출신이라는 점이다. 상하이의 신통찮은 성적표에도 불구하고 천안문 이후 상하이 정부의 고위 공직자들이 거의 통으로 베이징으로 옮겨가 중앙 정부를 거의 완전히 장악했다. 시진핑은 정치적으로는 상하이방을 표적으로 삼았지만, 경제 모델은 상하이의 고전적인 국가주의 모델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218-219

상하이의 테크노크라트들이야말로 천안문 사태의 수혜자였다. 경제적으로 상하이 방식의 가장 큰 특징은 국가와 기업 간의 긴밀한 유대를 보장하는 방식으로 민간 부문의 발전을 촉진하는 이른바 ‘정실 자본주의'이다.
1998년 국무원은 농촌합작기금회를 포함한 모든 비공식 금융 활동을 불법화했다. 1980년대 소규모 농촌 기업가들의 중요한 자금 조달 수단이었던 농촌합작기금회는 결국 종말을 맞았다. 그리고 자본이 고갈된 향진기업들 역시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다.
-220

1990년대 정실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당 가입이 귀중한 자원과 사업 기회를 얻을 수 있는 통로였다. 민간 기업가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천안문 이후 중국 지도부의 정책 전환이 가져온 장기적 영향 중 하나는 지대 추구와 조직적 부패의 증가였다.
자오쯔양은 자신의 자녀를 먼저 조사하고, 중앙정치국에서 공식적인 부패 수사에 착수하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그는 이로 인해 다른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을 적으로 돌리고 말았다. 특히 자녀가 사업가로 활동 중이었던 리펑 총리는 더욱 강경하게 나왔다. 천안문 사태는 부패가 정치적으로 안전하다는 선명한 메시지였다.
경제 개혁에서 1990년대의 보수 개혁파들은 몇몇 문제에만 선별적으로 접근했는데, 특히 지대 추구 기회 극대화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민영화가 대규모로 진행되었다. 1996년부터 2003년까지 국유기업에서 5,000만 명에 달하는 노동자가 해고되었다는 추정도 있을 정도로 역사상 가장 큰 충격 요법이었다. 상하이의 테크노크라트들은 한 손으로는 농촌 기업가 정신을 찍어누르고 다른 한 손으로는 도시 부동산 시장을 자유화했다. 외국인 직접 투자의 문이 열렸고, 월스트리트와 우호적인 동맹을 맺었다.
상하이 테크노크라트들이 주도한 개혁은 중국의 성장과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졌지만, 중국 정치 시스템의 도덕성과 질적 수준은 처참하게 망가졌다. 개혁은 가격 특혜, 특권층 수혜, 내부자 약탈, 느슨한 규제 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여기에 정치적 불투명성이 더해지자 대규모 부패가 발생할 완벽한 조건이 갖춰졌다.
-225

1970년 이전에 태어난 중국인과 1990년 이후에 태어난 중국인은 1970년대와 1980년대 출생자보다 반자유주의적이다. 하지만 1990년 이후 출생한 사람들의 반자유주의 성향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해답은 중국의 교육 커리큘럼에 있다.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의 교육 커리큘럼은 민족주의와 전통적인 가치를 더욱 지향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이들이 바로 시진핑 시대의 늑대전사 초국가주의에 기름을 붓고 있는 집단이다.
연구에 따르면 전통적 가치는 독재와 계획경제에 대한 지지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정치적, 경제적 자유주의 가치관은 35세에서 40세 사이에서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오늘날 가장 자유주의적인 중국인은 1970년대 후반에 태어났다.
-302-303

나는 역사적으로 만 개가 넘는 중국 발명품에 대한 상세한 데이터베이스를 바탕으로 주장을 구성하고 근거를 제공했다. 우리가 수집한 데이터에서 주목할 만한 발견은 중국의 기술 발전이 단절된 시점이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명나라 때가 아니라 훨씬 이전 6세기였다는 사실이다.
니덤의 질문을 "중국은 왜 특정 시기에는 창의적이었지만 다른 시기에는 그렇지 않았을까?"라고 변경한다면 더 생산적으로 답을 찾을 수 있다. 니덤 문제를 시간에 따른 동적 변화에 관한 질문으로 바꾸면, 일부 변수는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중국의 창의성과 상관관계가 있는 변수에 집중할 수 있다.
나는 6세기 이전과 이후의 중국을 비교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6세기에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과거 제도를 창시한 역사를 알고 있다. 중국의 절대주의를 영구화한 과거 제도의 도입은 수많은 정치적, 사회적, 인지적 효과를 낳았다. 문제는 이러한 과거 제도에서 기인한 효과가 6세기 이후 중국의 기술 쇠퇴와 침체를 촉발했는지 여부이다. 나의 대답은, "그렇다."
-344-345

개혁주의 공산당이 만들어 낸 이러한 숨겨진 범위 조건들 을 살펴보기에 좋은 시기이다. 그중 하나가 바로 내가 "학문적 세계화"라고 부르는 연구 및 교육 분야의 국제 협력이다. 중국이 국제 협력을 통해 국내에서의 사실상 학문의 자유를 확대했지만, 고도로 선별되고 조율된 방식이었다는 추정만 제시하겠다. 다른 범위 조건은 능력 있는 중국 기업가들이 중국공산당의 직접적인 감독을 벗어나 시장 기반 금융에 접근하고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홍콩은 이 점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아니 했었다.
그러나 독재적 범위라는 특수함이 있다. 개혁개방 시대 중국은 독재적 범위 아래에서 성공했다. 개혁주의 중국 공산당은 개방성과 국내 자유주의를 결합한 이단적 모델을 고안했다. 이 이종 교배 모델은 개혁주의 중국공산당에 큰 도움이 되었다.
우리는 중국의 규모 우위, R&D 지출, 산업 정책, 국가 주도 실행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눈에 잘 띄지는 않으나 중국의 성공 배경에 매우 중요한 기여를 해왔다. 바이든이 중국에 개방적이고 공정한 사법 시스템이 없다고 말한 것은 맞다. 그가 놓친 부분은 중국의 수많은 첨단 기술 기업가들이 1997년 이전에는 영국 영토였고 1997년 이후에는 일국양제 정책에 따라 상당한 자치권을 가진 홍콩에 자산을 두기로 했다는 점이다. 중국은 또한 ‘다르게 생각하기'를 '아웃소싱' 했다.
-396-397

과거 제도는 중국 인식의 역사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 중국공산당은 과거 시험의 형식과 용도를 공격적으로 조정하여 가오카오로 재탄생시켰다.
역사가 현재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또 다른 분야가 있으니 바로 인공지능이다. 중국 사회는 국가가 개인의 행동 데이터를 수집하고 활용하는 데 있어 '사전동의' 또는 거의 백지수표에 가까운 관대한 동의를 제공해 왔다. 중국을 ‘디지털 권위주의'의 전형으로 보는 논의는 중국 정부가 감시 기술에 대해 국민으로부터 받는 상당한 지지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 디지털 권위주의가 중국인의 성향과 이익을 자동으로 해치고 억압한다는 관점보다는 중국인의 동의가 가진 제한적 성격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중국은 오랜 데이터 수집의 역사를 자랑한다. 이미 진한 시대에 각 가정 단위로 데이터를 수집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401

중국이 확실하게 앞서고 있는 분야는 데이터이다. 이것이 바로 중국과 미국의 진짜 차이점이다. 중국 정부는 데이터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 방식과 프로그램을 보유하고 있으며 고도의 데이터 인프라를 구축해 왔다.
그동안 서방 언론은 중국의 공공장소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들에 초점을 맞춰왔다. 사실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국이 행동 데이터만 수집한다고 가정한다면 섣부른 판단이다. 중국의 감시망에는 산업적인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산업용 센서는 자율주행차, 예측 분석, 환경 모니터링 및 기타 빅데이터 애플리케이션의 AI 개발에 매우 중요하다. 중국 정부는 사람은 물론 사물, 에너지의 흐름, 유체의 움직임도 감시하고 있다. 행동 데이터는 디지털 권위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센서가 내장된 인프라는 에너지 효율, 보존, 안전을 개선하고 사회에 실질적인 혜택을 가져다준다. 중국 동부 장쑤성의 우시는 센서 내장 인프라 구축의 선구 도시이다.
-406-407

중국의 건강 코드는 구글과 애플의 작품보다 훨씬 더 침입적이고 투명하며 검증이 쉽다. 중국이 AI 분야에서 앞서 있는 이유는 규모뿐 아니라 범위에서도 우위를 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 두 가지 유형의 데이터 통합이 필요하다. 첫 번째는 서로 다른 영역의 데이터 통합인데, 중국과 미국의 디지털 플랫폼 기업 간 큰 차이를 불러온다. 중국 기업은 거대 기업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실제로 중국 기업은 시장 평가로 보나 사업 관점으로 보나 미국 기업보다 훨씬 작다. 그 이유는 중국 기업이 훨씬 더 경쟁적인 환경에서 활동하기 때문이다. 이커머스 업계에서 아마존은 이렇다 할 경쟁자가 없지만, 알리바바는 핀둬둬, 징동닷컴과 같은 경쟁 기업들이 끊임없이 물고 늘어진다. 또 다른 이유는 중국 기업이 재벌 집단이라는 점이다. 알리바바는 전자상거래(미국의 경우 아마존), 전자 결제(페이팔), 핀테크(월스트리트)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업을 영위하고 있다. 알리바바의 장점은 규모가 아니라 범위이며, 평범한 중국인 의 일상생활 속 다양한 영역에서 데이터를 통합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다.
두 번째 데이터 통합은 정부와 기업 간의 데이터 통합을 말한다. 알리바바는 사용자가 제공한 건강 코드 속의 데이터를 소유하지 않는다. 이 데이터베이스는 정부가 관리한다. 하지만 중국 최초로 건강 코드를 개발한 곳은 알리바바의 전자 결제 부문인 알리페이였다. 알리페이는 중국인의 거래 활동에 대한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다. 코로나19 초기, 방역 정책이 우한 관련 노출 여부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 때 우한을 여행했는지를 파악한 것은 정부가 아닌 알 리페이였다. 알리페이는 사용자가 제공한 정보를 방대한 결제 데이터베이스와 대조하여 검증했다.
-411-412

중국의 4대 안면 인식 기술 회사인 센스타임, 이투, 메그비, 클라우드워크는 두 대학과의 관계에 따라 나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센스타임과 이투는 MIT 졸업생이, 메그비와 클라우드워크는 칭화대학교 졸업생이 운영하는 회사들이다.
두 학교의 닮은꼴은 여기서 끝난다. 연방 정부로부터 수억 달러 의 연구 보조금을 받고 있음에도 MIT는 연방 정부로부터 독립적이며 학문의 자유 문제에 대해서는 반발도 주저하지 않는다. 2021 년 1월 기계공학과 강 첸 교수가 전자 사기와 탈세 혐의로 미국 법무부에 의해 체포되어 기소되었다. 실제 표적은 그가 중국 과학자들과 수행한 공동 연구였다. 200명이 넘는 MIT 교수진이 그를 지지하는 시위에 나섰고, 라파엘 레이프 MIT 총장은 강 첸 교수뿐만 아니라 과학의 개방성과 학문적 자유의 원칙을 옹호하는 공개 성명을 발표했다. MIT는 그를 위한 법률 비용을 모두 부담했다.
노엄 촘스키는 MIT의 언어학 및 철학부 명예교수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 국방부는 여러 차례 MIT에 촘스키 교수의 해고를 요청했지만, MIT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전쟁 관련 연구를 많이 하는 대학에서 어떻게 일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촘스키 교수는 MIT가 "자유주의적 가치"와 개인의 권리, 그리고 시민 불복종에 대한 오랜 전통을 구현하고 있다고 답했다. 촘스키와 칭화대 로스쿨 교수 쉬장룬의 상황을 비교해 보자.
-417

1980년대와 1990년대 초, 대학이 국가로부터 더 많은 운영 자율성을 부여받았던 짧은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더는 아니다. 최근 몇 년 동안 당서기가 대학 총장보다 더 많은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교육부가 박사과정 학생을 지도할 자격이 있는 교수진을 정하고 대학의 학위 수여 요건을 결정한다. 심지어 커리큘럼 개발에도 교육부의 검토와 승인이 요구된다. 한 저명한 경제학 교수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수업에서는 학생들이 대만과 티베트의 독립을 옹호하는 발언을 제외하고는 무엇이든 원하는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제 그는 종종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지시를 받고, 일부 학생들은 그가 수업 시간에 한 말을 대학 당국에 보고한다. 중국 대학들은 네거티브 통제에서 포지티브 통제로 전환하였다.
-418

2009년부터 2014년까지 남방과기대학의 창립 총장을 지낸 주칭시는 2008년 한 인터뷰에서 대학에 대한 정부 감독을 폐지할 것을 촉구하고 가오카오를 비판했다. 주칭시는 이듬해 중국과기대 총장직을 잃었으나 대신 남방과기대학의 창립 총장으로 영입되었다. 진보적인 성향의 선전시 정부가 대학 운영에 있어 교육부로부터 더 자율적이고자 하는 의지로 설립한 학교이다.
교육부는 3년 동안 남방과기대의 학생 입학을 허가하지 않았다. 2010년 주칭시는 50명의 학생을 직접 입학시켰고 입학 사정 절차에서 가오카오 성적을 아예 보지 않았다. 2012년 교육부가 한발 물러서서 남방과기대를 공식 인가하기는 했으나, 시진핑 집권 이후 이를 번복했다. 주 칭시는 2014년 총장직에서 사임했다. 정치적 안전판을 더하기 위해 선전 공안국장 출신이 교내 당서기로 임명되었다. 이제 이 대학은 경찰이 운영하고 있다.
-419

레노버는 엄밀히 말하면 외국 기업이라 해야 한다. 1984년 중국과학원 산하에 설립된 레노버의 생산 및 기술 개발에 대한 실질적인 경영권과 지분은 홍콩 지사가 보유하고 있다. 레노버 베이징과 레노버 상하이라는 두 사업부가 제조, R&D, 소프트웨어 개발 및 고객 서비스를 운영한다. 두 사업부 모두 외국 기업 완전 자회사 WFOE로 등록되어 있다. 즉 법적으로 외국 기업인 홍콩 레노버가 100퍼센트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레노버의 획기적인 발전은 홍콩의 금융을 활용할 수 있었던 점에서 가능했다. 1993년 홍콩 레노버는 홍콩 증권거래소에 상장하면서 조달한 자금으로 중국 본토에 투자할 자금을 마련했다. 당시만 해도 중국의 국영금융은 어디에 도 등장하지 않았다.
성장을 촉진하는 이러한 제도들에 대한 접근은 중국의 개방 정책의 의도하지 않은 효과일 가능성이 크다. 중국의 관문인 홍콩과 중국 경제의 세계화는 개방의 범위를 넓히는 두 가지 중요한 조건이었다.
-431

중국의 3대 인터넷 기업이라 불리는 일명 BAT -바이두, 알리바바, 텐센트 중 텐센트만 중국 선전에 국내 사업체로 등록되어 있다. 알리바바의 지주회사는 케이먼 제도에 등록되어 있다. 또 다른 등기 기록에 따르면 알리바바의 중국 내 사업체는 1999년 홍콩 법인과 중국 법인의 합작 투자로 설립되었다. 케이먼 제도의 지주회사가 홍콩의 중간 지주회사를 통해 중국 내 사업회사를 설립했을 가능성이 높다. 바이두는 미국령 버진 아일랜드에 등록되어 있으며, 2000년에 설립된 중국 내 사업체는 외국 기업의 100퍼센트 자회사다. 센스타임은 홍콩에 등록되어 있다. 징동닷컴은 케이먼 제도, 틱톡의 최종 지주회사 지제타오둥은 홍콩에 등록되어 있다. 앤트그룹은 모회사가 외국에 등록되어 있다. 알리바바, 바이트댄스, 바이두, 디디추싱, 메이투안, 징동닷컴 모두 홍콩 또는 여타 국외에 본사를 두고 있다.
-433

책을 쓰는 시점에서 약 400만 명이라는 숙청 규모는 단순한 정치적 청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커 보이지만, 분명 정치적 어젠다가 있었다. 시진핑의 반부패 캠페인에는 내 생적 특성이 있었다. 원래의 어젠다가 순수하게 부패에 관한 것이었더라도 그물에 걸린 사람들이 입는 피해가 워낙 혹독하다 보니 캠페인 자체가 적대감과 반대의 씨앗이 되고, 그로 인해 캠페인이 더욱 강화되는 악순환이다.
시진핑의 반부패 캠페인은 이제 10년째에 들어서고 있다. 더는 캠페인이 아니라 '영구 혁명 permanent revolution'과 같이 중국공산당이 만들어 낸 모순적인 개념 중 하나라고 설명하는 것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450-451

개혁주의 중국공산당은 GDP를 목표로 삼음으로써 총체적인 결과만 만족스럽다면 일상적인 업무의 마이크로매니징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GDP 목표제에는 또 다른 장점이 있다. 중국공산당이 끝없는 계급 투쟁, 파멸적인 권력 다툼, 이데올로기 세뇌, 공격적인 외교 정책, 적색 테러라는 이미 여러 번 가본 길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중국과 같은 과잉 정치 체제에서는 정부의 우선순위를 아주 조금이라도 정치에서 떨어지게 하는 모든 것이 순이익을 창출한다. 이념적 온도를 낮추고 중국 사회를 더 정상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GDP 목표제는 품행 목표제와는 달리 어느 정도의 표준화를 기반으로 한다. GDP 목표제를 버린다는 것은, 중국공산당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는 귀중한 몇 개의 정박장에 닻을 내릴 수 없게 됨을 의미하며, 이는 개혁주의 중국공산당이 하나로 이어 붙여놓은 조직의 기초적인 일관성을 잃는 길이다.
-460-461

시진핑은 한 조직에 공산당원이 세 명을 초과할 경우 당 지부를 설치하도록 한, 이전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던 당현 조항을 엄격하게 시행했다. 2020년 말까지 상위 500대 민간 기업 중 92퍼센트가 조직 내에 당 지부를 설치하여 중국공산당의 직접적인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소유 없는 영향력"은 개혁 시대 이래 이어진 시민사회의 명맥을 완전히 끊어버렸다.
시진핑은 민간 기업의 국유화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는데, 직접적인 국유화뿐만 아니라 '압박 청산'이라 불리는 간접적인 메커니즘도 동원했다. 2014년부터 2019년까지 서른 개 상장기업이 이러한 압박 청산을 통해 국유화되었다.
시진핑은 국가 행정기구의 권한과 자율성도 대폭 축소했다. 국무원 대신 당 기구에 의사 결정을 집중시켰고, 전통적으로 국무원의 특권이었던 경제 관련 의사 결정은 이제 시진핑이 의장인 중앙재경위원회의 권한이 되었다. 중국 국가공무원국을 사실상 폐지하고 그 기능을 당 중앙위원회 조직부가 흡수하게 했다. 사이버 보안은 공업정보화부에서 당 기관인 중앙사이버안전정보화위원회로 넘어갔다. 언론, 출판, 라디오, 영화, TV 방송 등 미디어에 대한 감독 책임 역시 국가광파전시총국에서 당 중앙선전부로 이관했다.
당과 정부의 융합은 전문성과 프로페셔널리즘을 내다 버리면서 문 화대혁명 당시의 수준으로 퇴보했다.
-464

민간 부문이 이끈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중국공산당은 명시적으로 민간 부문을 중국 경제성장의 진정한 엔진으로 인정한 적이 없다. 사유재산권의 신성함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경우는 더욱 드물다.
해외에서 중국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시진핑이 민간 기업과 기업가들, 심지어 중국의 보물이라 불리는 알리바바, 마윈 등을 의도적으로 찍어누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며 독점을 억제하기 위한 강력한 기술주의적 근거가 있겠거니 추측한다.
중국 지도자들은 민간 부문을 보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내가 인터뷰한 상하이 공무원처럼, 이들은 지난 40년 동안 중국이 어떻게 그리고 왜 성장했는지에 대해 완전히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중국이 기업가와 민간 부문에 움직일 공간과 자유를 제공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이 설계한 지혜 덕분에 성장했다고 진심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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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중국에는 또 다른 안정화 요소가 부재하고 있다. 바로 지도자의 카리스마이다. 시진핑은 덩샤오핑이나 마오쩌둥이 가졌던 특별한 위상을 획득했는가? 그럴 가능성은 매우 적다. 한 가지 단서는 시진핑의 별명인 ‘모든 것의 주석'이다. 시진핑의 권위는 막스 베버가 말한 권력의 세 가지 원천 중 하나인 '법적 권위'에만 의존하고 있다. 다른 두 가지는 카리스마와 전통이다.
시진핑이 직함과 칭호를 쌓는 데 열심이라는 사실은 그가 자신을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카리스마는 형태가 없고, (법적 권위와) 대체 가능하며, 그 자체로 합법적이다. 즉 공식 직함으로 부여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역사적으로 중국공산당의 후계 갈등은 시스템 위기로 확대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중국은 다음번에도 운이 좋을까? 두 가지 요인이 매우 중요하다. 하나는 중국의 군사 및 안보 기관이 향후 후계 갈등에 개입하는가이다. 이 부분은 중국 정치의 블랙 박스에서도 가장 어두운 구석이며 가장 예측이 어려운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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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정책의 장기적인 결과가 정말로 끔찍하고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지면 그에 대한 반 발이 있을까?
우리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알지 못한다. 중국은 이전에도 우리를 놀라게 한 적이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시진핑의 시대가 이미 해소되었다고 생각했던 많은 질문을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는 사실이다.
코로나19 봉쇄와 같은 시진핑의 극단적인 정책은 의도치 않게 중국 엘리트들에게 롤스의 명제[신변 안전의 불확실성]를 일깨워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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