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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건영, <처음 만나는 국제정치학>

딸기21 2025. 4. 8.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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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국제정치학 - 투키디데스에서 코펜하겐학파까지
박건영. 사회평론아카데미. 4/8

국제정치학은 강대국들의 논리와 이해 관계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성을 인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한국적 정체성을 갖는 국제정치학이란 국제정치의 이러한 권력정치적 (power politics) 현실의 수용이라는 임계치 내에서만 현실적으로 타당 하다고 보는 '보편성-기반의 한국적 정체성'을 제시한다. 동시에 나는 기존의 국제정치학 또는 국제정치적 담론(discourse)이 서구의 이론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그들의 가치관과 시공간적 시대를 반영할 수밖 에 없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한국적 정체성의 일부라고 파악한다. 한국적 정체성을 가진 발상과 성찰은 서구발 국제정치학의 역사성(historicity)에 주목함으로써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15쪽)



박건영 선생님의 <국제관계사>를 엄청 잼나게 읽었다고 페북에 올렸더니 사회평론 김천희 선생님께서 박 선생님과의 만남을 주선해주셨다. 원로 교수님을 만나뵙고 지도편달을 받는 넘나 좋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영광스럽게도 새로 출간된 책을 선물받았다! 사인도 해주셨다!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국제정치학 개론서다. 앞쪽은 언급된 중요한 학자들의 책을 대충 한 권씩은 본지라 수월하게 읽었다. 이 책을 읽으니 쫘아악 한번 정리되는 기분이랄까. 영국학파 중국학파 코펜하겐학파는 읽은 게 없어서 헤들리 불과 배리 부잔의 책을 주문했다. 읽기 싫어서 제쳐놓고 있던 미어샤이머 책도 결국 세 권을 샀다(박상준 교수님 말씀을 들으니 이 자는 국제관계학계의 로버트 카플란 같은 인물;;). 이렇게 또 쌓여 가는 네모난 종이덩어리들 ㅠㅠ


회의론자들이 일부 있으나 분명한 것은 한국은 20세기 초 제국주의 투쟁의 한길가에 버려졌던 처량한 조선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문제는 우리가 불행했던 과거를 반복하지 않도록 강대국 국제정치의 논리를 잘 이해하고 그들 간의 전략적 득실 구조를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지력'과 ‘실천력' 을 갖고 있는가이다.
우리가 세졌고 변했다는 사실은 한국인들의 '지정학적 운명으로 간주되는 것'에 대한 인식도 그에 맞게 변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한국이나 한반도는 과거처럼 무기력하여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 간 쟁투의 빌미나 전장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지정학적 이점을 환용하여 한반도의 안정을 해칠 수 있는 강대국들 간의 전략 경쟁을 완화할 수 있는 중추적 역할을 할 수도, 또는 지경학적 이점을 활용하여 세계 물류의 핵심 거점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다른 국가들이 따를 수 있는 혁신적 인 아이디어와 규범의 창출을 통해 국제정치 전반의 변화와 발전을 주 도하는 이른바 '첫길을 내는' 규범-개척자적 역할(trailblazer)을 할 수도 있다.
-22-23

중국과 러시아

중국은 대놓고 반미 전선에 서서 러시아를 지원하기는 어 려운 조건에 있다.
첫째, 중화인민공화국의 핵심적 외교 이념은 반제국주의이다. 중국이 1950년대 초 반제국주의 '평화 공존 5원칙'을 채택한 데는 역사적, 현실적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 '100년의 수모'이다.
둘째, 중국이 러시아 지원에 '올인'할 수 없는 구조적인 이유는 국제정치의 '규범' 및 중국의 정치적 '정체성'과 관련이 있다. 100년의 수모'보다 중화사상이 우위를 점하는 가운데 중국이 세계를 이끌겠다는 새로운 자신감에 기초한 정치적 가치관으로 재구성되 고 있다. 중요한 것은 지속적으로 변하는 중국의 정체성은 국제사회의 정치적 문화이자 환경이라 할 수 있는 국제적으로 "공유된 규범(shared norms)"과 연동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은마오쩌둥 시대와 달리 국제사회의 가치관과 규범에 '자발적으로' 포섭되어 있다. 국제사회의 공유된 규범을 무참히 짓밟고 있는 러시아를 중국이 계속 비호하며 국제사회에 서의 외면과 고립을 무릅쓰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셋째, 중국은 이념이나 가치관적 이유와는 별도로 세계전략상의 필요에서 반패권주의, 뒤집어 말하면 국가주권과 내정 불간섭 원칙의 신성성을 강조해 왔다.
넷째, 중국의 최고 국가 목표인 "타이완 해방"을 정당화하는 차원의 이유이다.
다섯째, 가장 중요하고 현실적인 이유는 미국 등 서방이 중국을 제재할 가능성이다. 중국은 현재 서방의 전방위적 제재를 감당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다. 중국은 러시아와 달리 미국 등 서방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가 높아 '제재 전면전'의 파장은 심각할 것이다.
요컨대 중국은 중•미 패권경쟁 차원에서 대러 협력을 지속할 수는 있겠지만, "정의롭고 민주적"인 새로운 국제질서를 제창하는 마당에 신성화된 반제국주의, 반패권주의 외교원칙을 배신할 수 없고, 국제규범을 파괴하여 외교적 고립을 자초할 필요가 없으며, 특히 국가 목표인 "타이완 해방" 문제가 결부되어 있는 국가주권을 신성시하는 평화공존론을 훼손할 수 없을 것이다. 나아가 중국은 미국 등 서방의 시장을 버릴 수 없고, 서방의 중국 제재라는 실존적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다. 중국이 푸틴의 러시아를 대놓고 지원한다면 북대서양 동맹을 오히려 결집시켜 중국의 그러한 대전략(grand design)'을 좌초시킬 것이다.
-64-67

미국의 외교사를 일관해 볼 때 유화정책(appeasement)은 화를 가져왔고, 강경일변도 정책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으나, 강경 조치를 배후에 둔 온건책은 극적으로 성공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이 배수진을 치면서도 대러 경제 제재 완화와 같은 퇴로를 열어놓는 당근과 채찍 전략으로 나오는 가운데, 푸틴은 러시아가 이미 점령하고 있는 크름과 우크라이나 동부 친러 지역을 잇는 교두보를 확보한 후, 그리고 일부 점령지역에 주민투표를 실시한 후, 이제 러시아인의 안전이 확보되었고, 또한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이 좌절되었다며 특별군사작전의 완수를 선언하고 철군하면서 휴전 협상에 임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는 러시아가 더 이상 NATO에 일방적으로 밀리던 냉전 직후의 '약대국(big but weak)'이 아니라는 점을 자국 국민에게 대대적으로 선전할 것이다. 젤렌스키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침공을 물리쳐 국가주권을 지켰으며 크리미아나 돈바스의 영토는 포기된 것이 아니며 언제든지 수복에 나설 것이라고 선언할 것이다.
-86-87

중국이 정점에 서는 전략적 삼각관계가 형성될 가능성이 높다. 우선 중•러 관계의 미래는 주로 미·중 관계의 미래와 연동될 것이라는 점이 부각된다.
어떤 이들은 항공모함과 같이 거대한 미국의 외교가 급격 한 방향 전환을 할 가능성은 낮으며, 만일 그렇게 된다면 가히 충격적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역사를 돌아보면, 미국이, 특히 정권이 바뀌었을 때 변하는 전술• 전략적 이해관계에 따라 태도를 바꿈으로써 세상을 충격에 빠뜨린 적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92

키신저는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통해 미국이 '전략적 삼각관계(strategic triangle)'에서 정점에 서게 되었으며, "보드카와 마오타이를 동시에 즐기게 되었다"고 대통 령에게 보고했다. 충격은 정보가 사전에 알려지지 않았을 때 발생한다. 그러나 국가나 정권 차원의 이익이나 그에 대한 정의가 바뀌게 되면 충격은 수시로 발생할 수 있다.
미•중 패권경쟁의 향방은 양국의 전술 및 전략적 득실구조의 변동과 함께 러시아가 얼마나 오랫동안 "불한당"으로 남으려고 할지에 크게 달려 있다.
키신저가 권고한 대로 미국의 외교안보정책이 이상주의적으로 일탈하지 않고 목표 지향적으로 유지된다는 전제하에 향후 국제질서는 1960년대 말-1970년대 말의 전략적 삼각관계가 재현된 형태의 외양을 가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 다만 과거의 단순 재현이 될 수는 없다. 즉 상처입은 러시아의 위협과 미•중의 실리주의에 따라 형성되는 '신 전략적 삼각관계'에서 이번에는 미국이 아닌 중국이 상대적 우위를 점하게 될 것이다.
-94

트럼프의 외교 정책은 일반적으로 거래적 접근(transactional approach)' 방식을 따르기 때문에 미국의 적대국으로 간주되는 다른 국가와도 거래를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 요컨대 우크라이 나전쟁 이후 국제질서의 모습은 '트럼프 효과'에 의해 상당 부분 달라질 수 있다.
-95

세력전이론

오르갠스키는 1958년 『세계정치(World Politics)」에서 세력전이를 최초로 개념화했다. 그는 세력균형론이 산업 혁명 이전 시기의 전쟁과 평화 문제를 설명하는 데는 유용했을 수 있지만, 각국 간의 국력의 차이가 급격히 발생하기 시작한 산업혁명 이후의 전쟁과 평화를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산업혁명 이후에는 각국의 내적 성장이 차별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에(differential growth rates) 이로 인한 국가 간 역학관계의 변동(미국과 소련의 성장, 영국과 프랑스의 쇠퇴를 보라)이 전쟁의 핵심 변수가 되었다는 것이다. 지배국가가 어떤 동맹을 가지고 있는가보다는 그 국가의 국력이 '불만 가득한' 도전국에 비해 얼마나 월등한지, 또는 도전국이 얼마나 신속히 성장하여 국력 격차를 줄이는지가 핵심 변수라는 말이다.
오르갠스키는 국제정치가 법리적으로는 주권과 평등의 원칙에 기초해 있지만, 사실은 국력의 우열을 바탕으로 하는 위계체제(global hierarchy)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상정하는 위계체제의 맨 꼭대기에는 지배국가(dominant power)가 존재한다. 지배국가 아래에는 잠재적 경쟁자인 몇 개의 강대국(great powers)이 있고, 그 아래에는 지역적 영향력을 갖고 있지만 지배국가나 국제체제의 구조를 전복할 능력은 없는 중간국가(middle powers)가 있으며, 그 아래에는 약소국(small powers)이 있고, 국력의 피라미드의 제일 아래에는 식민지가 있다.
-266

오르갠스키의 세력전이론이 현실주의 전제를 대부분 수용하지만 한 가지 도드라지는 차별점은 비물질적 변수인 '체제 만족도'를 중시한다는 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불만족한 강대국(dissatisfied great power)'이다. 세력전이론이 주목하는 부분은 불만족한 강대국이 지배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급속히 성장하는 경우이다.
세력전이론이 관심을 갖는 전쟁은 국제체제의 주도권을 두고 벌이는 장기간에 걸쳐 대규모 무력이 동원되는 세계 수준의 패권 전쟁이라는 점이다("수정주의적 도전revisionist challenges"에 따른 전쟁).
다른 한편 전쟁은 지배국가가 세력전이 과정을 중단시키거나 역전시키기 위해 "예방적" 차원에서 일으킬 수도 있다(예방 전쟁 preventive wars). 지배국가가 도전국의 공격이 ‘임박'했다고 판 단하여 개시하는 전쟁은 "선제 전쟁(preemptive war)”이다.
-267-269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

자유주의 이론은 민주주의/비민주주의 와 같은 국가의 유형이 외교 행태에 미치는 영향과 경제적 이익 공유 또는 상호의존이 국가 간 협력의 촉매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지적하고, 다른 한편 문화, 외교, 비강제적 수단의 영향력을 인정하는 소프트 파워의 개념을 제시함으로써 국제정치에서 권력정치와 권력투쟁, 그리고 상위정치로서의 군사력이나 안보 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현실주의 이론의 '권력-외골수적' 사고방식에 융통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현실주의 전제를 이완하거나 변수를 추가함으로써 이론의 간결성에 타협한다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 나아가 일부 자유주의 이론은 민주주의, 인권, 정의와 같은 가치를 강조하는 규범적 요소를 포함하는데 규범적 원칙은 행위자와 사회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요소를 포함 하면 이론의 복잡성이 배가될 수 있을 것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가치나 규범이 서구중심적이라는 데 있다.
또 다른 비판은 자유주의와 관련된 경제적 결정론, 특히 자유시장 과 경제적 상호의존성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과 관련이 있다. 경제적 상호의존만으로는 국제 협력이 보장되지 않으며 자유주의 이론이 국제체제에 내재된 근본적인 불평등과 그것을 영속화하는 역사적 유산과 같은 구조적 요인의 영향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336-337

영국학파

영국학파(the English School of International Relations)의 주요 구성원인 런던정경대의 부잔(Barry Buzan)에 따르면 영국학파의 핵심적 논지는 현실주의적 '국제체제(international system)'와 이상주의적 '세계사회(world society)' 사이의 간극을 메우면서 양 개념의 현실성과 바람직성을 종합한 ‘국제사회(inter-national society)'의 개념에 기초해 있다. 여기에서 국가들은 무정부적 상태에서 물질적 이익을 추구하는 경쟁적 행위자이지만 동시에 간주관적 규범과 관행, 그리고 상호 합의된 규칙과 제도로 운영되는 "구조화된 공동체(structured community)"에 참여하는 사회적(social) 존재이기도 하다.
-338

영국학파는 국제사회는 물질론적 실증주의를 배척하지 않는 가운데 행위자들의 가치관이나 내적 동기에 주목하는 해석학적 접근'에 의해 보다 타당하게 조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공동의 이익과 가치에 대한 인식이 변하면 국제사회의 성 격도 변한다며, 변화를 포착•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접근' 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나아가, 국제사회의 변화 가능성과 관련하여 국제사회의 관행과 규범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동시에 역동적으로 영향을 주는 비국가 주체들을 포함하는 ‘세계사회'의 역할에 주목한다. 세계사회의 개념은 탈냉전, 글로벌리제이션, 기후 변화 등에서 비롯된 현대 국제정치의 지구적, 인류적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전통적인 국가중심주의를 넘어서는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 차원에서의 '규범적 접근'의 중요성을 부각한다.
-340-341

영국학파의 이론적 기초를 내린 와이트는 16세기 이후 서구 사회에서 국제관계를 보아온 세 가지 이론적 렌즈를 제시하였다. 그에 따르면 마키아벨리와 홉스에 의해 상징되는 현실주의(realism)는 무정부적 국제체제(international anarchy)에서 권력투쟁을 벌이는 국가들을 연구 대상으로 하는 반면, 그로티우스와 글래드스톤(William Gladstone)에 의해 대표되는 합리주의(rationalism)는 관행, 규범, 국제법 등을 만들고 준수하는 것이 이익이라고 인식하는 국가들이 국제사회(international society)를 구성하는 합리성에 주목하 며, 칸트와 윌슨(Woodrow Wilson)에 의해 대표되는 급진주의(revolutionism)는 국가주권에 기초한 베스트팔렌 체제를 넘어 개인과 비국가적 주체의 의미가 강조되는 세계시민적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와이트는 자신의 이론을 경험적으로 검증하는 차원에서 서구뿐 아니라 고대 중국에도 그러 한 세 가지 전통적 시각이 존재했다고 제시하였다(법가 유교 도가).
정작 그가 생각하던 국제사회는 후일 영국학파가 그에 대해 평가하는 것보다 훨씬 더 현실주의에 가까운 발상에 기초한 것이었다.
-346-347

헤들리 불

중도론을 표명한 와이트가 사실상 현실주의에 가까웠다면 불은 국제사회에 방점을 찍는 그로티우스적 접근을 채택했다. 그가 정의한 그로티우스적 접근이란 "국제정치는 국제사회 내에서 일어나는 것으로서, 국가는 분별력이나 편의성의 규칙(rules of prudence or expediency)
뿐만 아니라 도덕과 법의 명령에도 구속된다"고 보는 관점을 말한다.
불은 홉스적 현실주의가 개인이 아닌 국제 수준에서는 적용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국가는 개인과는 달리 군사력 등 (자위를 위한) 조직화된 힘을 갖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고, 나아가, 자연 상태에서는 개인이 모두 타자를 해할 수 있는 균등한 능력을 갖고 있지만 국제정치에서는 강대국과 약소국 간에 내재적 불평 등이 존재하기 때문에 평화를 강제하기 위한 보편적 주권자, 즉 '지구적 리바이어던(Leviathan)'의 필요성이 줄어든다는 점을 부각했다. 국가들이 무정부 상태에서도 행동을 규율하는 공통의 규칙과 규범을 준수함으로써 중앙 권위 없이도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제사회는 국제체제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불에 따르면 무정부적 국제정치에서 두 개 이상의 국가들이 충분한 접촉을 유지하고 타국의 결정에 대해 충분한 영 향을 주며, 이 국가들이 하나의 전체에 속한 일부로 행동하게 할 때 국제체제(international system, system of states)가 존재한다. 불에 따르면 국가군(또는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독립적인 정치공동체 집단)이 하나의 체계를 형성할 뿐 아니라, 대화와 합의를 통해 그들 간 관계를 규율하는 공동의 규칙과 제도를 형성할 때, 그리고 이러한 장치들을 유지하는 것이 공동의 이익이라고 인정할 때 그로 티우스적 국제사회(international society, society of states)가 존재한다.
-351

불은 세력균형은 단순히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들이 국가 간 역학관계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선택하는 정책 행위의 결과라고 보았다. 중요한 것은 세력균형이 당장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일시적이거 나 편의적인 조치라기보다는 국제사회의 항구적인 제도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제도적 관행은 군사력이나 경제력에 의한 직접적인 균형뿐만 아니라 그러한 균형을 가능하게 하는 체계를 유지하려는 '공유된 약속(shared commiment)'을 통해 작동한다.
-352

배리 부잔

부잔의 국제체제, 국제사회, 세계사회는 상호 중첩되어 공존하고 동시에 상호구성, 상호작용하는 세 가지 층위의 국제적 현실이자 구조이다.
국제사회의 존재는 세력균형이 실현되고 유지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국제사회에서 합의된 규범과 규칙은 합리적 국가들이 그러한 합의를 준수할 개연성이 높다 할 때, 순수한 무정부 상태의 국제체제에 내재된 불확실성을 줄여 보다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세력의 균형을 이끌어낼 수 있다. 이 사례는 영국학파의 규범과 구조적 현실주의의 무정부적 구조가 다층적으로 구조화된 틀 내에서 통합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부잔에 따르면 국가 중심의 국제사회와 개인 중심의 세계사회는 서로 다른 기반(국가 대 개인)으로 인해 처음에는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선진 국제사회'에서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구축하고 유지할 수 있다.
불에 비해 부잔은 상대적으로 연대주의에 가깝다. 그는 국제사회가 국제정치 질서나 공존뿐 아니라 인류적 가치인 정 의, 자유, 평등, 환경 보존과 같은 집단적인 윤리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국제사회의 '질서냐 정의냐'의 문제에서 부잔이 세계사회를 위한 정의를 선택한 것은 아니다. 그는 발상의 전환을 꾀하여 이 둘 모두가 하나의 틀 안에서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통합적 인식의 틀을 제시한다.
-368-369

부산의 접근법은 "자유주의 프레임에 잘 맞지 않는 공유 가치"에 대해서도 토론할 수 있는 이론적 공간을 창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예를 들어 공산주의 '인민 공화국들', 이슬람 국가들, 군주제 또는 다른 형태의 이념적 표준화(ideological standardisation)"에 의해 구성된 연대주의적 공동체, 즉 "비자유주의적 국제사회(iliberal international society)"를 상상하고 토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부잔은 빈센트나 휠러와 같은 '인도주의적 개입' 옹호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연대주의를 더 이상 인권 문제로 축소하거나 환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잔의 스펙트럼은 서로 다른 유형의 국제사회를 서술/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하고, 그것들이 공유하는 가치의 유형과 공유의 '두께/깊이'를 설명하며, 결과적으로 강압(질서 유지), 계산(이해 관계), 신념(가치와 규범)이 서로를 밀고 당기며 이러한 공동의 가치를 유지/변화하는 방식을 드러내준다.
부잔의 주장의 핵심은 연대주의는 다원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으므로 다원주의에서 연대주의로의 전환은 생존과 이기심이라는 다원주의적 가치에 연대주의적 가치를 추가하는 것이다.
-370

비판자들은 (영국학파가) 국제사회가 비유럽 사회와의 만남을 통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알렉산드로비치(Charles Alexandrowicz)는  16-18세기 유럽인들이 동인도로 이주했을 때 그곳에서는 이미 잘 발달된 국제사회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17세기에 그로티우스가 공해가 국제영토(international territory)라는 원칙을 유럽인들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인도양은 이미 이 원칙의 선도적인 선례가 되어 있었다.
베이징대의 장샤오밍은 초기 영국학파가 중국 등 비서구 국가들을 '타자'로 묘사하며 국제사회의 서사에서 그들을 소외시켰다고 비판한다. 조공 제도와 같은 중요한 동아시아적 제도가 유럽 중심의 주권국가 모델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시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조공 제도를 국가 간의 상호작용, 특히 약소국들이 강대국(역사적으로는 중국)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영향을 준 구조화된 관행이자 규범으로 제시한다.
영국학파, 특히 초기의 저작들은 유럽의 국제사회가 확장되는 과정에서 노정된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강압적, 착취적 폭력적 측면을 주요 의제로 설정하지 않음으로써 부지불식간에 유럽의 지배가 정당하다는 인식을 심어 준다는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376

중국학파

중국학파의 형성은 1970년대 중•후반의 중국 내 정치변동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다. 저우언라이가 1976년 1월 사망한 후, 4월 청명절 동안 천안문 광장에서 대규모의 공개 집회가 열렸다. 원래 저우언라이를 추모하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곧 '4인방'에 대한 규탄으로 변질되었다.
(화궈펑에 의해 복권된) 덩샤오핑은 당중앙 판공청의 주요 간부들과의 대화 중에 "전쟁을 피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발언은 중국공산당 내에서의 이념적 변화에 대한 광범위한 논의의 일환이었다. 덩은 자신의 노선을 1982년 제12차 중국공산당 대회에서 재확인하였다. 그리고 '무산계급의 이익'이라는 용어는 모든 당 문서에서 사라졌다. 이는 중국이 기존 국제사회와 국제기구에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이해 가능한 기준에 따라 통합될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를 서방 사회에 보낸 것이었다. 덩은 1985년 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에서 국제정세를 분석한 결과 전쟁이 임박했다는 기존의 관점을 변경했다며 "우리가 잘 대처한 다면 전쟁을 피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제 중국 외교의 주된 목표는 계급이익이 아닌 국가이익을 수호하는 것이 되었다. 전쟁불가피론의 폐기에서 시작된 중국 외교 안보 노선의 실용주의적 전환은 중국의 외교와 국제정 치, 그리고 중국국제정치학파의 형성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덩샤오핑의 선언과 축적되는 개혁· 개방의 성과는 마오주의와 마르크스-레닌주의 정치이론에 몰두하던 중국 학자들이 서양의 국제정치이론을 연구하고 모방할 수 있게 했다.
-380-381

1987년 8월 국제관계이론에 관한 전국학술대회가 상하이에서 열렸다. 여기서 중국 특색의 국제정치학을 구축하 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 시점부터 중국적 특색과 관점을 담은 국제정치이론을 개발해야 한다는 주장이 잇따라 등장했다. 이러한 학문적 운동에서 가장 대표적이고 영향력 있는 세 명의 중국 학자와 그들의 이론, 즉 칭화대 옌쉐퉁의 도덕적 현실주의(Moral Realism), 중국사회과학원 자오양의 천하체계론(Tianxiaism), 그리고 산둥대 친야칭의 세계정치의 관계성 이론(Relational Theory of World Politics)은 세계 국제정치학계의 주목을 끌고 있다.
-382

쉐퉁은 자신의 이론을 도의(도덕적) 현실주의(Moral Realism)로 명명하면서 권력정치, 권력투쟁, 국가이익으로 상징되는 서양의 현실주의에 고대 중국의 유교사상에서 중시하는 왕도 또는 인도적 권위(humane authority)라는 정치 개념을 결합한다.
그는 자애로움(인), 의로움(의), 예의(예)가 핵심인 왕도에 입각한 인정(어진 정치)은 정당성(legitimacy)을 가진 권력으로서 '자발적 복종'을 이끌어내어 왕도적 주체의 권력과 영향력을 오히려 증진시킬 뿐 아니라 국가 간 관계에서도 진정한 신뢰(credibility)에 기초한 안정과 평화를 조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옌은 조지프 나이와는 달리 문화나 가치보다 정치적 지도력의 '신뢰성'이 매력의 원천이라고 본다. 정치권력이 약속을 지키고 일관된 정책을 펼치는 능력인 "전략적 신뢰성(strategic credibility)"은 문화적 차이를 초월하여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며 국제 사회에 안정과 협력을 가져올 수 있다.
옌이 말하는 왕도정치는 서양의 헤게모니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옌에 따르면 서양의 "규범적 설득(normative persuastion)" 모델은 패권국이 자신의 담론적 권력(또는 소프트 파워)을 통해 다른 국가들에게 자신에게 이익이고 자신이 주도하는 국제규범과 국제질서를 따르도록 설득한다. 반면, 중국적 본보기-모방(example-emulation)" 모델은 강대국이 "역할 모델(role model)"로 행동함으로써 다른 국가들이 자발적으로 따르도록 이끈다. 중국어로는 이를 '이신작칙'이라고 하며, 솔선수범으로 다른 나라들을 이끄는 능력(leading by examples)을 의미한다.
-384-386

자오는 주나라 시대(기원전 1046-256년)의 이상화된 천하체계를 전형적인 모델로 삼아, 이 모델이 세계평화를 위한 대안적 접근이 될 수 있다고 제시한다.
388

친야칭은 중국의 대표적인 구성주의자이다. 2009년 친야칭은 사회적 구성주의(오누프 류의 주체 간 상호작용과 구조의 역동성에 주목하는 구성주의)와 중국의 사상적 전 통의 두 가지 핵심인 '과정'과 '관계'를 통합하고 개념화함으로써 '과정적 구성주의의 이론적 모델(Processual Constructivism)'을 시론적으로 제시하였다.
2016년 이후 친야칭은 관계성이론을 체계화하여 제시했다. 그의 이론은 네 가지 기본 가정을 포함한다: (1) 관계성은 사회적 세계를 분석하는 기본 단위이다, (2) 합리성은 관계성 내에 포함되어 있다, (3) 관계성은 정체성을 결정한다, (4) 관계성은 권력을 생성한다. 친야칭에 따르면 중국사회는 유교사상에 내재된 개념인 관계성, 즉 '관시'에 큰 의미를 둔다. "모든 것이 모든 것에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개념"을 강조하는 이 유교적 우주론은 개별 요소를 이해하려면 그 상호 간 그리고 전체적 맥락과의 연관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390-391

드라이어는 중국인 중국학자들을 인용하며 천하체계론이 허구를 포함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예를 들어, 하버드대의 량리엔은 소위 천하체계라는 "중국중심적 국제질서는 여러 시기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으며, 때로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고 단언한다. 호주국립대의 왕궁우는 중국의 황제들이 실제로는 유가가 아닌 법가의 원칙에 따라 통치했음을 지적한다. 드라이어는 유교적 사상이나 중국적 전략문화(strategic culture)가 무력 사용을 자제토록 했다는 천하체계론적 주장에 대해 중국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주장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잘 안다고 말한다. 가톨릭대 박건영이 지적했듯이, 이른바 천하관은 화이관과 별도로 논의될 수 없다.
-399

캘러핸(William A. Callahan)은 천하체계론이 제국 중국을 연상시키는 새로운 위계적 세계 질서를 조장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한다. 그는 천하가 중국 특유의 패권적 관행을 정당화한다고 주장하며 "베스트팔렌 체제가 국가 중심적이라는 비판을 받는 것은 마땅하지만, 천하의 예시는 비서구적 대안이 더 국가중심적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그는 천하체계라는 '탈패권' 체제에 대한 제안은 새로운 (그리고 폭 력적일 수 있는) '포함과 배제'의 체제를 내포하고 있다며 이는 제국 중국의 위계적 통치를 21세기에 맞게 업데이트한 새로운 패권의 대표적인 예시라고 비판한다.…자오의 천하체계론이 서구 중심의 패권을 중국 중심의 새로운 패권으로 대체하는 데 이론적으로 복무할 가능성이다.
-401

관계성을 중국 특유의 개념으로 간주하는 친야칭의 관계성이론 역시 비판받고 있다. 비판자들은 관계성이론이 이미 서구 이론에서 개발되고 학계에 정착된 이론의 일부일뿐이라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기든스의 구조화이론은 친의 관계성이론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행동과 사회 구조 간의 상호작용, 상호구성을 강조한다. 부르디외의 '장(field)' 개념은 다양한 형태의 자본(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자본)을 바탕으로 개인들이 상호작용하고 경쟁하는 다양한 사회적 공간의 구조와 동학을 설명한다. 이는 사회적 상호작용을 이해하는 데 관계성을 기본으로 보는 친야칭의 시각과 일치한다.
-402

웬트의 세계국가 불가피론

최근 국제정치학계에서 목적론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목적론적 설명에 과학적 위상을 부여하는 '자기조직화'라는 개념에 대해 살펴보자. 독일 사회학자 루만(Niklas Luh-mann) 등이 주도하고 있는 시스템이론(Systems theory)에 따르면 자기 조직화는 한 시스템의 구성 요소들이 상호 소통하면서(또는 상호 이해에 기초하여) 외부로부터의 지시나 개입 없이 '자생적 질서(spontaneous order)'를 창출하는 과정을 가리킨다.
자기조직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최종 상태(end stale)'이다. 이론가들은 최종 상태를 무언가를 끌어들이는 끝개(attractor)라고 부른다. '세계국가 불가피론'을 펼치는 웬트의 최종 상태는 세계국가이다. 무정부 상태는 월츠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세력균형이 아닌 세계국가를 향해 경향적으로 또는 추세적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423

미첸의 존재론적 안보

미첸은 국가들이 자신의 물리적 안보가 위협받는다 하더라도 정체성을 확인하고 존재론적 안보를 확보하기 위해 일상에 매몰되는 구체적인 사례로 오슬로협정을 붕괴시킨 '갈등적 일상에 고착'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심리적 욕구를 들고 있다.
양측은 물리적으로 안보를 보장할 수 있는 오슬로합의를 사실상 파괴하고 존재론적 안보를 제공하는 일상화된 적대와 갈등을 ‘생각 없이' '선택'하였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적대와 갈등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는 국가들의 일부였다. 요컨대, 미첸의 존재론적 안보론은 협력적이든 갈등적이든 '감정적 행위자(emotional actors)'인 국가들 간의 사회적 관계가 변하기 어렵다는 점에 주목하는 이론이다.
-473

반면, 스틸은 국가는 자신의 행동과 정체성에 대 해 성찰적 이해를 갖고 있으며, 이러한 성찰적 이해는 내적 대립과 불일치를 배태하고 있기 때문에 변화를 추동하는 힘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스틸은 일상이 제공하는 사회적 관계에서의 신뢰가 "교란적(disruptive) 상황" 또는 "중대한(critical) 상황"에 의해 위협받을 때 주체는 그의 일상적 행동을 성찰적으로 관찰(monitor)하며 필요하다면 변화를 모색할 수 있다고 제시한다.
국가가 교란적 상황에 직면하면 어떻게 하는가? 스틸의 답은 '정체성을 바꾸기보다는 정체성에 맞는 행동을 선택한다'이다.
반복 되는 갈등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고착된 국가 간 일상'을 발견하고 이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미첸 이론의 뚜렷한 시사점이다. 스틸의 관점에 따르면 국가는 베이즈적으로 학습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변화를 추동하는 내적 대립과 불일치를 격려하는 요인으로서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고 독립적인 언론 매체를 지원하며 시민사회에 권한을 부여하는 정책이 중요하다고 본다.
-475-476

스틸은 미국 남북 전쟁에 대한 '영국의 불개입' 결정에서 물리적 이익보다 수치심에 따른 존재론적 불안감을 더 못견뎌하는 국가 지도자들의 성찰 능력을 보여 주고자 한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국가가 자신의 물리적 생존을 위태롭게 하면서까지 자전적 명예(honor)를 잃지 않고 존재론적 안보를 추구한 사례로서 1914년 자신의 영토에 대한 제한 없는 접근을 요구하는 막강한 독일제국의 최후통첩을 거부하고 맞서 싸우기로 한 벨기에의 결정을 들고 있다.
스틸은 결과만을 설명하기보다는 의사결정과정에서의 동기의 역할을 이해하는 것이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국가 행위에 부여되는 동기가 무엇인지, 또는 국가가 '어떠한 종류의 안보'를 충족시키려 하는지에 대한 보다 포괄적이고 복합적인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480-382

코펜하겐학파의 안보화론

안보화론의 핵심 논지는 안보가 화행(illocutionary speech act)'이라는 점에 있다. 안보라는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가 이루어진다는 의미다. 특정 사안을 안보 문제라고 명명하는 순간, 그 사안은 실제로 안보 문제가 된다. 안보화 행위자(securitising actor) 는 특정한 '안보 대상(referent object)'의 존재가 위협받고 있다고 선언 함으로써 그 대상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한 특별 조치에 대한 권리를 주 장한다. 이 '안보 대상'은 국가의 생존이나 주권, 핵심 국의 또는 국가적• 민족적 정체성 등 사활적 가치나 핵심 이익을 포함할 수 있다.
안보화 행위자가 이러한 위협을 언급하는 순간, 그 문제는 정상 정 치의 영역에서 비상 정치의 영역으로 옮겨지게 되어 정상적인 (민주적) 정책결정 절차를 거치지 않고 신속하게 처리될 수 있게 된다. 이는 안 보가 더 이상 고정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안보화 행위자가 안보라고 말하는 모든 것이 안보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490

"탈-안보화 전략'과 관련해 비판이론가인 하이스만스(Jef Huysmans)는 이주(migration)의 예를 들며 이미 안보화된 이슈를 하향 조정하는 세 가지 경로를 제시한다. 객관적 전략(objecive strategy, 이민자들을 "우리"라는 집단적 정체성에 위협이 되지 않는 것으로 프레임하는 전략)", "구성주의 전략(constructivist strategy, 이주 현상에 대한 보다 광범위한 사회적 이해를 촉진하여 안보화 조치가 이민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에 미치는 영향을 줄이는 전략)'", 그리고 "해체주의 전략(deconstrucitivist strategy, 이민자와의 대인 경험을 통해 "우리"와 "그들" 간의 배타적 구분을 해체하는 전략)"이 그러한 경로이자 전략이다.
그러나 "견고하게 자리 잡은(entrenched)" 또는 "깊이 뿌리를 내린(deep)" 안보 담론과 서사는 이슈나 집단의 정의 자체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안보화의 담론과 서사가 어떤 이슈나 집단이 정의되고 인식되는 방식의 근본에 깊숙이 직조되어 있으면 '탈-안보화'가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텔아비브대의 아불로프(Uriel Abulof)는 예를 들어, 특정 민족 집단이 지속적으로 안보 위협으로 간주되는 경우 이러한 인식은 대중의 의식 속에서 그 집단의 정체성의 한 요소로 굳어져… 한번 형성되면 깨기 어려운 "자기 강화적 순환“을 만든다는 점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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