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100년 전쟁: 정착민 식민주의와 저항의 역사 1917-2017
라시드 할리디. 유강은 옮김. 열린책들 4/19
너무나 소중한 책이다. 팔레스타인 사람이 직접 쓴, 그리고 최근 이야기까지 담고 있는 팔레스타인 역사다. 이스라엘의 가자 전쟁이 많은 것을 바꿀 테니 이 또한 어느 정도는 구문이 되겠지만.
저자가 팔레스타인 유력 가문 출신의 지식인이고 횹상 과정에도 관여했던 사람이라 흥미로운 내용이 많다. 팔레스타인 측의 잘못, 아라파트와 PLO의 문제점 등을 솔직하고 신랄하게 비판하는 부분도 있고. 이스라엘 건국 시기를 다룬 앞부분은 일란 파페 같은 이들의 책에도 나오는 내용들이지만 뒤로 갈수록 새로 알게 되는 것들이 많았다.
읽고난 느낌은, 역시나 슬프다는 것. 책장을 덮고 인터넷 브라우저를 여니,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압박 속에 초토화된 가자지구와 사실상 백기를 들 판인 하마스의 소식을 담은 뉴스가 첫 화면에 보인다.
영국 정부의 여러 동기 가운데는 히브리인에게 성서의 땅을 <돌려준다〉는 낭만적이고 종교적인 친유대주의적 열망과 영국으로 유입되는 유대인 이민을 줄이려는 반유대주의적 기대가 섞여 있었다. 영국은 무엇보다 제1차 세계 대전 이전부터 염두에 두었으며 전시의 여러 사건을 통해 더욱 강화된 지정학적인 전략적 이유 때문에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기를 원했다. 다른 동기들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이것이 핵심 동기였다.
세계 나머지 지역들에서는 이미 밸푸어 선언이 나온 직후에 소식이 퍼져 나갔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에서는 정부의 검열과 인쇄 용지 부족 때문에 지역 신문사들이 문을 닫은 상태였다. 연합군의 오스만 항구 봉쇄가 그만큼 강력했던 것이다. 1917년 12월 영국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뒤, 군정 당국은 밸푸어 선언 뉴스를 공개하는 것을 금지했다. 실제로 영국 당국은 거의 20년간 팔레스타인에서 신문이 다시 등장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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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적 신화는 팔레스타인인이 존재하지 않았거나 집단적 의식이 부재했다는 전제 위에 서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정체성은 시온주의와 마찬가지로 여러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등장했으며, 근대의 정치적 시온주의와 거의 정확히 동시에 나타났다. 반유대주의가 시온주의에 기름을 부은 여러 요인 중 하나에 불과했던 것처럼, 시온주의의 위협 역시 이런 자극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바야흐로 중동이 유럽의 식민주의 열강에 지배를 받으면서 질식 상태였다. 팔레스타인 정체성은 같은 무렵에 시리아와 레바논, 이라크에서 등장한 아랍 민족국가 정체성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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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위원회의 분할 권고에 대한 폭발적 반응은 1937년 10월 영국의 갈릴리 지구판무관 루이스 앤드루스Lewis Andrews 대령의 암살에서 정점에 달했다. 위임통치 당국은 팔레스타인 민족주의 지도자 거의 전원을 추방했다. 셋째 큰아버지인 예루살렘 시장 후세인 알할리디 박사는 다른 네 명과 함께 세이셸 제도로 보내졌다. 영제국이 민족주의 반대파의 단골 유형지로 선택하는 곳이었다. 동료 수감자들 중에는 예멘의 아덴과 잔지바르에서 온 정치 지도자들도 있었다. 팔레스타인의 다른 지도자들은 케냐나 남아프리카로 유형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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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에) 유대 국가 창설은 이제 더 이상 영국이 추구한 결과가 아니었다. 자신을 팔레스타인에서 몰아낸 시온주의의 폭력 행동에 분노하는 한편, 그나마 남은 중동의아랍인 신민들을 소외시키지 않기 위해, 영국은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의 팔레스타인 분할 결의안 제181 호) 표결에서 기권했다. 1939년 백서부터 줄곧 영국의 정책 결정권자들은 중동에서 우선적인 이해관계가 지난 20년간 자신이 길러낸 시온주의 기획이 아니라 독립 아랍 국가들에게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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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셸, 케냐, 남아프리카... 영국이라는 제국이 팔레스타인에 한 짓은, 영국이라는 제국이 다른 나라들에서 한 짓과 결국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결과는 다른 어떤 곳에서보다 혹독하게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밸푸어 선언과 제국주의의 위선을, 오늘날 이스라엘이 저지르는 반인도범죄의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꼽을 수는 없다. 이후의 상황은 미국 몫이다.
“신사 여러분, 죄송하지만 저는 시온주의의 성공을 열망하는 수십만 명에게 응답해야 합니다. 제 유권자들 가운데는 수십만 아랍인이 없어요.”(트루먼)
처음에 국무부와 국방부, 중앙정보국은 트루먼과 보좌관들이 단호하게 시온주의와 이스라엘 신생 국가 편을 드는 것을 반대했다. 국무 장관 조지 마셜George Marshall부터 딘 애치슨 Dean Acheson과 조지 케넌 George Kennan을 비롯한 국무부와 다른 부서의 고위 관리들은 냉전이 시작되는 상황에서 신생 유대 국가를 지지하면 중동에서 미국의 전략적•경제적 이해와 석유 이권이 손상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새롭게 공개된 이 시기의 정부 문서를 꼼꼼하게 검토한 책에서 정치학자 아이린 겐지어는 관료 기구 내부의 핵심 집단의 견해가 불과 및 달 만에 바뀌었음을 보여 준다,
변화를 추동한 주된 이유는 냉전의 고려 사항들 및 중동의 거대한 에너지 자원과 관련된 경제적이고 전략적인 것이었다. 국방부는 군사적인 면에서 이스라엘을 잠재적으로 유력한 동맹국으로 보게 되었다. 게다가 사우디아라비아가 팔레스타인에 대해 고분고분한 상황에서 … 실제로 1933년에 처음 석유 탐사·개발 계약을 체결 했을 때부터 사우디 왕가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긴밀한 관계가 미국과 자국의 친밀한 연계와 완벽하게 부합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건국 이후 처음 수십 년간 이스라엘은 1970년대 초를 시작으로 굳어지게 되는 미국의 대규모 군사, 경제 지원을 받지 않았다. 게다가 유엔에서 미국은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을 비난하는 안보리의 거듭된 견의안에 표를 던지는 등 종종 이스라엘과 상충하는 입장을 취했다.
-123
미국이 중동에서 우선순위를 조정한 데에는 공공연하게 이스라엘에 동조한 존슨 대통령의 영향도 있었다.
세속적이고 부유하게 자란 케네디는 하버드 대학생이던 1939년 초여름에 팔레스타인을 방문해서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여기서 그는 여러 사실을 상당히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분쟁 양쪽의 주요 주장에 대해 회의적으로 평가했다. 이런 회의주의 덕분에 케네디는 대다수 미국 정치인에 비해 이스라엘 지지자들이 가하는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존슨은 젊은 시절 국내 정치에 주로 관심을 기울였다. 시온주의와 이스라엘에 매우 가까웠던 그의 성향은 가까운 친구와 보좌관 진영에도 반영되었다. 이스라엘은 존슨 대통령과 참모진이 철수를 강요한 압력을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스라엘이 정복한 아랍 영토를 지배하는 문제에 관해 1956년 미국이 보인 입장이 완전히 뒤바뀐 것으로, 그 결과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재앙이 되었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영토 획득을 용인한 결과물이 1967년의 유엔 안보리 결의안 제242호였다.
-155-156
그리고 아랍의 냉전.
(1960년대) 이집트 관리들은 파타를 예측 불가능한 집단으로 여기며 수상쩍게 보았다. 이집트가 예멘 내전에 깊숙이 군사 개입을 하고 경제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때에 무모하게 이스라엘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당시는 중동학자 맬컴 커Malcom Kerr가 말한 이른바 〈아랍의 냉전>이 최고조에 달한 때로서, 이집트가 급진 아랍 민족주의 정권들을 이끌면서 사우디아라비아가 주도하는 보수 블록에 맞서고 있었다. 양쪽의 경쟁 관계는 예멘에서 일촉즉발의 위기로 치달았는데, 1962년 예멘에서 왕정에 반대하는 혁명이 내전으로 비화하자 이집트 군이 대대적으로 휘말리게 되었다.
-148
중동은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가 선두에 선 가운데 아랍 냉전의 경계선을 따라 양극화되었다. 충돌은 세계적 차원의 냉전과 나란히 진행되었지만, 지역 고유의 특수성도 있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 투쟁도 있었지만, 이집트가 조장하는 권위주의적 아랍 민족주의와, 파이살 국왕의 사우디가 부추기는 와하비즘과 절대 왕정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이슬람의 이데올로기 투쟁도 있었다.
-154
저자는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의 실패 요인을 객관적이면서도 뼈아프게 진단한다. 하지만 동시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저항을 어떤 방식으로도 누를 수 없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결의안 제242호가 커다란 역할을 한 덕분에, 팔레스타인인과 시온주의 정착민들 사이에 벌어진 충돌의 식민주의적 기원을 가린 의도적인 기억 상실에 새로운 층위의 망각과 삭제, 신화 만들기가 덧붙여졌다. 결의안에서 1967년 전쟁의 결과에만 초점이 맞춰지자 1948년 전쟁에서 생겨난 근원적인 쟁점들이 그사이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있었다.
이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과 관련된 어려운 쟁점들을 해결하는 대신, 자신이 일부 영토를 점령한 개별 아랍 국가들의 불만을 양자 간 대화를 통해 다루는 훨씬 쉬운 과제를 안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은 주변으로 밀려났다.
-160-161
전쟁과 결의안 제242호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온갖 해를 가하긴 했어도, 이 두 가지는 결국 1936~1939년 반란이 패배한 이래 쇠퇴하고 있던 민족 운동을 부활시키는 불씨로 작용했다. 어느 노련한 전문가의 말을 빌리자면, “1967년의 핵심적인 역설은 이스라엘이 아랍인들을 쳐부숨으로써 팔레스타인인들을 부활시켰다는 것이다.”
-162
1964년 아랍연맹은 열렬히 고조되는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의 물 결을 흡수하고 통제하기 위해 이집트의 지휘 아래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창설했다. 원래 이집트 대외 정책의 보조 기관으로서 이스라엘을 공격하려는 팔레스타인의 열정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관리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을 아랍의 감독 아래 묶어 두려는 이런 시도는 급속히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1967년 전쟁 직후에 전투적인 팔레스타인 저항 단체들이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장악하면서 이집트에 치우친 지도부의 손발을 묶어 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단체들 가운데 가장 큰 파타의 수장인 아라파트가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집행위원회 의장이 되었다.
이후로 아랍 국가들은 주로 이스라엘과 국경을 접하는 나라들에 기반을 둔 팔레스타인이라는 독립된 정치적 행위자를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독립적 행위자가 부상하면서 이스라엘과 접한 국가들, 특히 이집트와 시리아의 전략적 상황이 한층 복잡해진 한편, 다루기 힘든 대규모 팔레스타인 난민이 존재하는 요르단과 레바논은 심각한 국내 문제를 떠안게 되었다.
그리하여 1948-1967년 이스라엘이 거둔 커다란 성과 가운데 하나가 뒤집어졌다. 중동과 세계 무대에서 거의 완전히 가려졌던 팔레스타인 민족 문제 자체가 되살아난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부활은 전략적인 면에서는 이스라엘에 거의 또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지만 광범위한 차원에서, 거의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전혀 다른 종류의 도전을 나타냈다. 시온주의 기획의 궁극적인 성공은 대부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대체하는지 여부에 달려 있었다. 시온주의의 시점에서 보면, 팔레스타인이라는 이름과 팔레스타인인의 존재 자체가 이스라엘에 치명적인 위협이 되었기 때문에 이 두 단어를 혹시라도 언급해야 한다면, 테러리즘과 증오를 함께 영원히 연결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였다.
마지막으로, 팔레스타인 문제가 재등장하자 미국의 외교에 문제가 제기되었다.
-173-174
그리고, 레바논 전쟁.
1982년 레바논 침공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에서 분수령이 되었다. 1948년 5월 15일 이래 아랍 각국 군대가 아니라 주로 팔레스타인인이 관여해서 최초로 벌어진 대규모 전쟁이었다.
이스라엘의 대레바논 전쟁은 여러 목표를 겨냥했지만,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주로 초점을 맞추고 팔레스타인 내부의 상황을 바꾼다는 원대한 목표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독특했다. 전쟁을 위한 전반적인 계획은 베긴 총리와 내각의 승인을 받았지만, 침공의 설계자인 국방장관 아리엘 샤론은 침공의 진짜 목표와 작전 계획을 대개 내각에 비밀로 부쳤다. 샤론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와 시리아 무장 세력을 레바논에서 축출하고 베이루트에 말 잘 듣는 동맹 정부를 만들어 그 나라의 상황을 바꾸기 를 원했지만, 주요한 목표는 팔레스타인 자체였다.
-209
1969년 채택된 카이로 협정에 따라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레바논 남부의 많은 지역에서 난민촌을 통제하고 행동의 자유를 누렸다. 하지만 중무장한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레바논의 여러 지역에서 점차 지배권을 쥐고 권력을 휘두르는 세력이 되었다. 레바논의 보통 사람들은 내전이 장기화됨에 따라 이렇게 억압적인 팔레스타인 세력이 더욱 강화되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1982년에 진실의 순간이 도래하자,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갑자기 세 핵심 집단을 포함한 여러 전통적인 동맹자들의 지지를 잃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나비 베리Nabih Beri가 이끄는, 시리아와 제휴한 아말 운동과 레바논 남부와 베카 계곡에 모여 있는 다수의 시아파 지지자들(하지만 아말의 젊은 전사들은 이후에도 여러 지역에서 팔레스타인해방기구 편에서 용감하게 싸웠다), 베이루트 동남쪽 슈프산맥에 전략적으로 자리한 왈리드 줌블라트Walid Jumblat의 드루즈 세력권, 베이루트와 트리폴리, 시돈의 수니파 도시 주민들이 그 세 집단이다.
-222-223
사브라와 샤틸라 난민촌에 처음으로 들어간 서구인들인 『워싱턴 포스트』의 로렌 젱킨스 Loren Jenkins와 조너선 랜들Jonathan Randal 이었다. 두 사람은 라이언 크로커Ryan Crocker 와 함께 있었는데, 그는 미국 외교관으로는 최초로 셋이 목격한 상황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한 인물이었다. 학살에 대한 소름끼치는 증거였다. 전날 밤 내내 이스라엘군이 쏜 조명탄은 《레바논부대》 민병대원들이 무방비 상태의 민간인들을 도살하도록 난민촌을 환하게 밝혀 주었던 것이다. 9월 16일부터 9월 18일 아침까지 민병대원들은 1.300명이 넘는 팔레스타인과 레바논의 남녀노소를 살해했다.
-231
이 사태(PLO의 베이루트 철수)가 낳은 역설적인 결과는 팔레스타인 민족운동의 무게중심이 이웃 아랍 나라들로부터 점차 팔레스타인 내부로 옮겨 갔다는 것이다. 이런 뼈아픈 패배를 계기로 팔레스타인인들은 자신들을 겨냥한 다면적인 전쟁에 맞서 새로운 형태의 저항을 일으켰다.
레바논의 혼란 상태에서 자라난 헤즈볼라는 미국과 이스라엘에게 치명적인 적이 되었다. 이 운동을 창설하고 미국과 이스라엘의 표적을 겨냥해 치명적인 공격을 가한 많은 젊은이들이 1982년에 팔레스타인해방기구와 나란히 싸운 이들이라는 사실에 주목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 젊은이들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 투사들이 떠난 뒤에 남아서 사브라와 샤틸라의 팔레스타인인들과 나란히 자신들과 같은 시아파 수백 명이 학살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미국 대사관 폭발 사건에서 죽은 사람들, 병영에서 목숨 을 잃은 해병대원들, 그리고 베이루트에서 납치되거나 암살당한 많은 미국인들 -그중에는 맬컴 커를 비롯해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교의 내 동료와 친구들도 있었다 -은 대개 나중에 헤즈볼라가 된 그룹들의 공격에 희생되었는데, 미국과 이스라엘 점령자들이 공모한 대가를 그들이 치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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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 침공과 베이루트 포위 공격에 대해 눈길을 사로잡는 방송 화면이 널리 퍼지면서 엄청난 충격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경찰의 단속이 심한 대다수 아랍권 도시에서는 대중적 시위나 공공연한 소요가 거의 벌어지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쟁 때문에 중동에서 최대 규모의 시위가 벌어진 곳은 텔아비브였는데, 사브라와 샤틸라 학살에 항의하는 시위였다." (220쪽)
마음 아픈 고백.
1987년 12월에 벌어진 인티파다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의 법칙을 보여주는 완벽한 사례다. 1982년 전쟁으로 실제로 팔 레스타인해방기구를 약화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역설적 결과로 팔레스타인 자체 내에서 민족 운동이 강화되면서 행동의 초점이 외부에서 내부로 이동했다.
이른바 1차 인티파다는 이스라엘 군용 차량이 가자 지구의 자발랴 난민촌에서 트럭과 충돌해서 팔레스타인인 4명이 사망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인티파다를 거치면서 광범위한 지역 조직이 생겨났고, 비공개 조직인 통일민족지도부 Unifed National Leadership가 이끌게 되었다. 인티파다 시기에 결성된 유연하고 비밀스러운 풀뿌리 네트워크들은 군사 점령 당국이 진압을 하기가 불가능했다.
1988년 1월 국방장관 이츠하크 라빈은 군경에 <무력과 완력, 구타〉를 써서라도 진압할 것을 지시했다. 이런 《철권〉 정책은 시위대의 팔과 다리를 부러뜨리고 두개골을 깨부술 뿐만 아니라 군인들의 화를 돋우는 이들을 모조리 구타하는 공공연한 행동으로 실행되었다.
중무장한 군인들이 팔레스타인의 10대 시위자들을 잔인하게 폭행하는 장면이 텔레비전을 통해 퍼져 나가면서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 언론에서 대대적인 반발이 일어났다. 이 시기를 상징적으로 압축한 이미지는 팔레스타인의 땅딸막한 소년 하나가 거대한 이스라엘 탱크에 돌멩이를 던지는 모습이다. 영원한 피해자라는 이스라엘의 이미지는 팔레스타인의 다윗과 싸우는 골리앗으로 바뀌었다.
-246-247
대부분 젊은 징집병인 군인들이 주민들을 상대로 체계적으로 잔인한 폭력을 행사한 것은 욕구 불만이나 공포 때문만은 아니었다. 〈박살을 내라〉는 라빈의 지시가 지침이 되긴 했지만, 사회 전체가 끊임없이 반팔레스타인 감정을 주입한 것이 과도한 폭력의 밑바탕이 되었다.
중무장한 이스라엘 순찰대를 지나치는 데, 지프차에 탄 군인들이 사격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는 그들의 얼굴에서 1982년 베이루트를 점령한 이스라엘 군인들에게서 보았던 표정이 떠올랐다. 두려워하는 얼굴이었다.
동네 전체가 군인들을 앞세워 강제하는 점령에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정규군 병사들은 아무리 중무장을 하더라도 그런 환경에서는 절대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할 것이다.
-250-251
인티파다는 시위와 나란히 파업, 불매 운동, 세금 납부 거부에서부터 다른 창의적인 형태의 시민 불복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전술을 활용했다.
1차 인티파다는 억압에 맞선 대중적 저항의 탁월한 사례였고, 1917년에 시작된 기나긴 식민주의 전쟁에서 팔레스타인이 처음으로 진정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1936~1939년 반란과 달리 인티파다는 폭넓은 전략적 전망과 통일된 지도부에 따라 진행되었고, 팔레스타인 내부의 분열을 악화시키지 않았다.
인티파다는 팔레스타인인과 아랍인을 결집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세계의 인식을 바꾸는 것도 공공연한 목표로 삼았다. 인티파다가 여러 전술을 구사하고, 또한 인터파다가 어떤 의미인지를 국제사회에 설명해 줄 수 있 는 이들이 정교하고 효과적인 소통 전략을 활용한 것을 보면, 이것이 핵심 목표라는 사실이 분명했다. 팔레스타인 내부의 여러 논리 정연한 세속적 활동가와 지식인들이 여기에 포함되었다. 에드워드 사이드와 이브라힘 아부루고드 같은 외부의 사람들도 비슷한 영향을 미쳤다.
-253
인티파다의 성과를 훔쳐간 파타.
명료하고 매력적인 대변인들을 갖춘 효과적인 현지 지도부의 등장에는 숨겨진 내적인 위험이 존재했다. 기성 정치 엘리트들을 대체하는 풀뿌리 운동은 그들의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진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풀뿌리가 주도하는 봉기가 발발하자 깜짝 놀라면서 곧바로 이 봉기를 조직으로 흡수하고 이익을 챙기려고 했다. 문제점은 튀니스에 있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지도자들이 근시안적 시각과 제한된 전략적 전망에 갇혀 있다는 것이었다.
-254-255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지도자들은 점령지와 이스라엘 내부의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미국에 대해서도 결코 온전히 파악하지 못했다. 워싱턴의 정부 구조와 의사 결정에 대한 단순한 시각 때문에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미국 정부에 팔레스타인을 정당한 대화 상대로 인정받는 데모든 희망을 걸었다. 그렇게만 되면 미국의 주선으로 이스라엘과 공정한 거래를 확보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에는 이전 세대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의 순진한 믿음, 즉 영국의 식민 장관이나 총리, 미국의 국무 장관이나 대통령에게 개인적으로 호소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의 흔적이 담겨 있었다(오늘날까지도 아랍의 많은 통치자들이 이런 믿음을 고수한다). 권력 관계의 개인적 요소에 대한 이런 환상적 시각의 밑바탕에는 아랍 세계에서 변덕스러운 무소불위의 독재자와 절대 군주를 상대한 경험이 깔려 있는 것 같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미국과 이스라엘 양국의 정책이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그들이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258-260
1982년 이전에도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많은 이들은 이제 무장 투쟁을 중단해야 할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아직 레바논에 본부를 두고 있던 시절에 지도자들은 에드워드 사이드와 절친한 사이이자 나와도 친구인 파키스탄의 저명한 지식인 에크발 아마드에게 군사 전략을 평가하는 과제를 준 바 있었다. 아마드는 1960년대 초 알제리 민족해방전선 FLN과 함께 일하면서 프란츠 파농을 알게 된 저명한 제3세계 반식민주의 사상가였다. 레바논 남부의 팔레스타인해방기구 기지들을 방문한 뒤 돌아온 그는 ... 원칙적으로 알제리 같은 식민주의 정권에 맞선 무장투쟁을 헌신적으로 지지하는 사람이었지만, 팔레스타인해방 기구가 이런 전략을 수행하는 방식에서 무능하고 종종 오히려 역효과를 낳는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더욱 심각한 질문으로, 그는 과연 무장투쟁이 이스라엘에 맞서는 올바른 행동 방침인지에 의문을 제기했다. 무력 사용은 이스라엘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피해자 인식을 강화할 뿐인 한편, 이스라엘 사회를 통합시켰고, 시온주의의 가장 전투적인 경향을 강화했으며, 외부 행위자들의 지원을 부추겼다. 민족해방전선이 폭력을 사용해서 결국 프랑스 사회를 분열시키고 식민주의 기획에 대한 지지를 잠식하는 데 성공한 알제리와는 달랐다.
-261
아라파트의 걸프전 오판.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지위가 또다시 큰 타격을 입은 것은 아라파트와 그의 동료 대다수가 걸프전과 관련해 심각한 오산을 했기 때문이다. 아라파트는 이라크에 맞서 쿠웨이트를 확고하게 지지하는 대신 <중립> 방침을 따르면서 양쪽 사이를 중재하려고 했다. 당사자들은 모두 아라파트의 제안을 무시했고… 이 결정으로 재정적 지원을 제공하던 페르시아만 국가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받아 여러모로 피해를 입었다.
첫째 이유는 아라파트가 하페즈 알아사드의 고압적인 시리아 정권에 오래전부터 격한 반감을 품고 있었고 반사적으로 균형추를 모색했다는 것이다. 사다트가 변절한 직후에, 특히 시리아 정권이 1982년 동족상잔의 반란을 배후 조종해 아라파트의 지도력을 훼손하려고 한 뒤,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점차 이라크의 정치•군사•재정적 후원에 기대게 되었다.
이라크 정권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다잡아 두 기 위해 걸핏하면 응징했다. 이런 목적으로 활용한 많은 도구 가운데 바그다드는 아부 니달의 테러망인 바트당의 아랍해방전선 Baithist Arab Liberation Front과 아부 알아바스가 이끄는 팔레스타인해방전선PLF 같은 명목상의 팔레스타인 분리 그룹들을 여럿 거느렸다. 이 소규모 그룹들은 하나같이 대중적 기반이 없었고, 사실상 무시무시한 이라크 정보기관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실제로 한동안 아부 니달의 살인 청부업자들은 유럽에서 모사드와 거의 맞먹을 만큼 많은 수의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사절과 지도자들을 살해했다.
-265
아버지 부시~ 클린턴~ 오바마 시대 미국의 평화협상.
부하 직원들 누구와도 무척 달랐던 제임스 베이커는 대단히 섬세한 정치적 본능과 권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예리하게 지각한 인물이었다. 베이커와 부시는 냉전 이후 시기에 아랍-이스라엘 분쟁을 포괄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미국에 이익이 된다는 사실을 이해했고, 항구적인 합의에 도달하려면 이스라엘에 압박을 가해야 한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았다.
우리는 그가 점령 상태에서 팔레스타인인이 겪는 곤경에 공감하고 샤미르 정부가 강요하는 불합리한 제한에 우리가 좌절하는 상황을 십분 이해한다는 것을 감지했다. 이런 공감은 그가 회담을 준비하기 위한 회동에서 후세이니와 아슈라위, 압둘 샤피 등과 오랫동안 대화를 나눈 결과이기도 했다. 하지만 베이커의 능력과 의지는 딱 그만큼이었을 뿐이다.
-274-275
빌 클린턴과 국무장관 워런 크리스토퍼와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별 성과를 내지 못했다. 새로운 행정부의 고위 인사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이스라엘, 또는 팔레스타인 문제의 평화 교섭 과정에 대해 부시나 베이커 같은 시야가 없었고, 부시 행정부로부터 물려받은 관리들, 특히 데니스 로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국무부의 한 고위 관리가 평한 것처럼, 〈로스의 나쁜 습관은 이스라엘 사람들하고 사전에 협의하는 것>이었다. 또 다른 관리는 훨씬 더 통렬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로스는 <상대가 고수하려는 마지노선에 미리 굴복하는> 경향이 있었다.
-276-277
독립적 사고를 갖춘 노련한 워싱턴의 일꾼인 조니 미첼은 ... 메인 주지사와 상원 다수당 원내 대표를 지냈고, 빌 클린턴 대통령 특사 시절에는 1998년 북아일랜드 성금요일 협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면서 찬밥 신세였던 아일랜드공화군을 합의에 참여시켰다. 클린턴 시대의 평화 교섭 담당자들과 달리, 미첼은 이스라엘의 입장을 미국 정책의 한계로 수용하지 않았으며, 유대인 정착촌 건설 중단, 예루살렘의 미래 지위,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 등 가장 곤란한 교섭 쟁점들을 정면으로 다루려고 애를 썼다. 아일랜드공화군을 상대로 거둔 성공을 바탕으로, 그는 하마스를 교섭 과정에 참여시키자고 제안했다.
결국 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스라엘이 반대한 탓이 컸다. 하지만 미첼은 특별히 불리한 상황에 시달렸다. 오바마 행정부 내에서 그의 시도를 훼손한 것이다. 미첼이 맡은 임무를 사보타주한 핵심 인물은 이름을 거론하기도 민망한 데니스 로스였다. 로스는 조지 W. 부시 시절에 정부에서 물러나 있었지만, 2008년 플로리다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오바마 선거 운동을 벌이면서, 오바마가 이스라엘을 제대로 지지하지 않는다는 공화당의 비난에 맞서 그를 옹호했다. 따라서 신임 대통령은 그에게 신세를 졌다.
의회의 예전 동료들이 미첼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하마스를 교섭 과정에 포함시키는 것은 수용 불가하고 미국 법에 위배된다고 선언한 것이다.
-335-336
그러나 오슬로 협정에 대한 저자의 냉혹한 평가 중에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와 아라파트에 대한 것이 상당한 부분을 차지한다.
1990년대 중반 이래 점령지 팔레스타인인들의 상황이 악화된 것은 대부분 교섭에 서투른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사절들이 그릇된 선택을 하고, 그들이 작성한 결함투성이 합의안에 아라파트와 그 동료들이 기꺼이 서명을 한 결과다.
오슬로에서 합의된 문서를 처음 보았을 때, 마드리드와 워싱턴에서 21개월간 잔뼈가 굵은 우리는 곧바로 팔레스타인 쪽 교섭자들이 이스라엘이 말하는 자치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음을 간파했다. (PLO가 라빈 측과 비밀리에 합의하기 전에 워싱턴에서 협상을 했던) 점령지에서 온 대표들은 이스라엘식 자치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았고, 팔레스타인에서 살거나 오랜 시간을 보낸 대표단 고문들도 잘 알았다.
아예 합의를 이루지 못하더라도 오슬로에서 나온 합의보다는 더 나았을 것이다. 점령은 계속되었을 테지만, 팔레스타인의 자치라는 포장이 없고, 이스라엘이 수백만 명을 통치하고 관리하는 재정적 부담을 더는 일이 없으며, 불만에 찬 팔레스타인인들을 단속하는 데 팔레스타인 자치당국PA이 이스라엘을 돕는 〈안보 협력〉- 오슬로가 낳은 최악의 결과다-같은 건 없었을 것이다.
-289-299
(2차 인티파다에서) 이스라엘 군경이 처음부터 비무장 시위대에 실탄을 대대적으로 사용한 것(봉기가 시작된 <처음 며칠> 동안 130만 발의 총탄을 발포했다"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충격적인 사상자 수를 야기했다.
하마스와 하위 파트너인 이슬람지하드는 자살 폭탄 공격을 대대적으로 확대하는 식으로 대응했다. 2001년 말 파타가 공격에 합류하면서 치명적인 경쟁이 이루어졌다. 극악무도한 자살 폭탄 공격이 가속화되었는데, 어느 정도는 두 정파 사이의 경쟁 때문에 촉발된 것이었다.
-308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지도부는 파행을 거듭하는 오슬로 교섭 과정을 진행시키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이런 공격을 저지하려고 압박했다. 자치당국의 보안 기구-이스라엘 감옥에서 복역한 경험이 있는 파타 전사들이 주축이었다 -는 이런 목적 달성을 위해 하마스 용의자들을 고문했다. 과거에 이스라엘 심문관들에게 당한 방식대로 거리낌 없이 동포를 고문한 것이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양쪽 모두에서 동족상잔의 증오가 깊어졌고, 2000년 중반을 시작으로 팔레스타인해방기구와 하마스의 공개적인 분열이 터져 나왔다.
-309
뒷부분은 트럼프 1기 때 쓰인 것인데, 2기 집권을 맞은 지금 읽으니 여러가지 생각이 든다.
이스라엘이 이런 (강제 추방이라는) 행동에 나서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이 쫓겨나면 또다시 치열한 싸움에 나설 테고, 국제사회도 분쟁에 주목하고 있으며, 팔레스타인의 서사가 점점 널리 퍼지고 있기 때문에 쉽사리 행동에 나서기는 어려울 것이다.
대규모 지역 전쟁을 틈타서 추방에 나선다 하더라도 이스라엘이 의지하는 서구의 지지에 치명타를 가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만 1948년 이래 어느 때보다도 최근 몇 년 사이에 이스라엘이 추방에 나설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공 포가 커지고 있다. 종교적 민족주의자와 정착민들이 역대 이스라엘 정부를 계속 지배하고, 요르단강 서안을 병합하려는 계획을 공공연 하게 세우고, 이스라엘 주요 의원들이 팔레스타인인의 일부나 전부를 쫓아내라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344
수십 년간의 경험을 돌아보면, 팔레스타인의 현실을 이해하는 방법을 확대하는 데 세 가지 접근법이 효과적임을 알 수 있다. 첫 번째는 팔레스타인의 사례를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남아프리카인, 아일랜드인 등 다른 식민-정착민 경험과 풍부하게 비교해 보는 것이다. 두 번째 접근법은 모든 식민지 분쟁의 특징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인들의 엄청난 힘의 불균형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세 번째이자 아마 가장 중요한 접근법은 불평등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이런 영웅적인 신화에 이의를 제기하기가 어렵다. 미국은 복음주의적 개신교에 깊이 빠져 있어서 성경에 근거한 호소에 특히 취약하며 또한 과거 식민지 시절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기 때문이다.
《정착민〉과 〈개척자)라는 단어도 미국사에서는 긍정적인 함의가 있다. 게다가 팔레스타인과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경험을 비교하는 것은 위험한 일인데, 미국은 아직 과거사의 이 어두운 장을 완전히 인정하거나 그것이 현재에 미치는 유독한 영향을 바로잡지 않았기 때문이다.
-346-347
분쟁의 약자인 팔레스타인은 분열된 상황을 유지할 여력이 없다. 하지만 통합을 이루기 전에 우선 새로운 민족적 합의에 바탕을 두고 목표를 재정의해야 한다. 최근 수십 년간 <보이콧·투자 철회·제재〉 운동 같은 시민사회의 선도적 기획과 학생 운동이 파타와 하마스가 벌인 어떤 행동보다도 팔레스타인의 대의를 진척시키는 데 더 많은 기여를 했다. 이 사실은 양대 정파에게 던지는 혹독한 고발장이다.
시급이 필요한 핵심 변화 한 가지는 1980년대 이래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채택한 외교 전략에 치명적 결함이 있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민족 운동은 미국의 입장의 실체를 인정하고, 미국 내에서 자신의 주장을 펴기 위해 헌신적인 풀뿌리 정치 활동과 비공식 활동을 벌여야 한다. 팔레스타인인들은 미국을 이스라엘의 확장판으로 대해야 한다. 초강대국인 미국은 어느 회담에든 반드시 참석하겠지만, 테이블 반대편에 이스라엘과 함께 앉아 있는 적대 세력으로 간주해야 한다.
-361-362
이스라엘에 유리하게 종결된 모든 중대한 쟁점을 다시 논의할 필요가 있다. 1947년 유엔 총회 결의안 제181 호의 경계 분할과 예루살렘의 분할체 제안, 난민의 귀환과 보상, 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인들의 정치·민족·시민적 권리 등이 그것이다.
팔레스타인의 정치 의제에서 잊혔지만 본질적인 요소 하나는 이스라엘 내부의 활동이다. 팔레스타인인들을 계속 억압하는 것 말고 다른 대안이 존재한다는 것을 설득시키는 활동이 필요하다. 이런 활동은 이스라엘과의 관계 <정상화>라는 형태로 간단히 처리해 버릴 수 없는 장기적인 과정이다.
-364
그럼에도, 저자의 말에 기운을 좀 얻고 싶다.
"(트럼프 1기 시대) 이스라엘과 미국이 아랍의 독재자 파트너들과 공모해서 팔레스타인 문제를 묻어 버리고, 팔레스타인인을 깡그리 없애고 승리를 선언하기에 더 없이 좋은 기회가 온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쉽지는 않을 것이다. 잠깐 속일 수는 있어도 영원히 속이지는 못하는 적지 않은 아랍 대중이 문제로 대두될 것이다. 2011년 카이로와 2019년 봄 알제의 사례처럼, 그들은 독재에 맞서는 민주주의 물결이 높아질 때마다 어김없이 팔레스타인 깃발을 휘날린다." (365쪽)
"점점 이스라엘에 종속되고 있는 비민주적인 아랍 정권들의 정통성도 도전을 받고 있다. 마지막으로, 미국은 제 아 무리 힘이 세더라도 시리아와 예멘, 리비아 등 중동 여러 지역에서 벌어진 위기 사태에서 부차적인 역할을 했을 뿐이다. 미국이 언제까지고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독점에 가까운 지위를 유지하지는 않을 테고, 오랫동안 누려 왔던 대로 중동 전체에 대해서도 계속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지는 못할 것이다." (3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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