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구정은의 '현실지구'

[구정은의 '현실지구'] 콩고, 호주, 캐나다, 독일... '도둑 맞은 아이들'

딸기21 2024. 12. 28.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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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항소법원이 이달 초 “식민 통치 시절 어머니와 강제로 헤어진 콩고 여성 5명에게 5만 유로씩 배상금을 지급하라”고 벨기에 정부에 명령했다. 법원은 70여 년 전에 발생한 납치 사건이 ‘반인도적 범죄’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다섯 명의 여성은 누구이고 ‘납치’는 무엇이란 말인가. 70년쯤 전에 일어난 일에 대해 이제서야 판결이 나온 이유는 뭘까.

 

원고인 여성들은 1945~1950년 사이에 지금의 콩고민주공화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다. 조셉 콘라드가 ‘암흑의 핵심’이라 불렀던 콩고 땅에서, 벨기에 식민지 당국은 ‘흑백 혼혈’ 아이들을 찾아내 어머니에게서 빼앗아 주로 가톨릭 교회가 운영하는 고아원에 집어넣었다. 어떤 엄마에게는 아이를 학교에 보냈다가 돌려준다고 거짓말 했고, 어떤 경우는 강제로 납치했다.

원고들은 법정에서 “그들은 우리를 '죄의 자식'이라고 불렀다”고 증언했다.

 

Clockwise from top left, Simone Ngalula, Monique Bitu Bingi, Lea Tavares Mujinga, Noelle Verbeeken and Marie-Jose Loshi pose for a group photo in Brussels on Monday, June 29, 2020. (AP Photo/Francisco Seco, File)

 

벨기에 남성과 흑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흔히 ‘메티스’라고 불렸는데, 상당수가 성폭행으로 태어난 아이들이었다. 벨기에 식민통치의 바탕은 인종주의였고, 행정당국의 정책은 인종 분리였다. 백인 피가 섞인 채로 흑인 사회에서 자라날 메티스들은 벨기에 당국에는 지워야 할 존재들이었다. 아버지는 인정하지 않고 어머니와는 떨어뜨려 놓아야 하는 아이들, 그들을 백인들은 ‘수치의 아이들’이라고 불렀다. 아프리카의 벨기에 식민지에서 태어난 메티스는 1만5000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그 중 많은 수가 저런 납치의 희생자가 됐던 것으로 보인다.

 

[AP] Belgian court rules against state in a landmark case addressing its colonial past

 

벨기에는 1908년부터 1960년까지 콩고민주공화국을, 1922년부터 1962년까지 오늘날의 부룬디와 르완다를 지배했다. 벨기에의 식민 통치는 유럽국들의 아프리카 지배 중에서도 잔혹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다른 유럽국 식민지들과 달리 콩고는 레오폴드2세 국왕의 ‘개인 재산’이었다. 자전거와 자동차가 나오면서 타이어 수요가 많았던 시절에 고무를 채취해 오라면서, 할당량을 못 채운 주민들의 손목을 자른 사실은 악명 높다.

 

잔혹한 식민통치에 대해 비판이 많았지만 반성은 늦었다. 몇 해 전 미국에서 인종 불평등에 항의하는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 시위가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미국 흑인들의 현실 뿐 아니라, 그들을 그런 지경에 놓이게 만든 근본 원인인 18~19세기 노예무역과 아프리카 식민통치 같은 백인들의 어두운 역사가 다시 부각됐고 아프리카연합(AU)도 이례적으로 제국주의의 역사적 책임을 강조하는 성명을 냈다. 유럽에서도 미국 흑인들 편에 선 시위가 일어났고 벨기에에서는 레오폴드2세의 동상이 끌어내려졌다.

 

2020년 레오폴드2세의 동상을 끌어내린 벨기에 시민들. Image: picture-alliance/NurPhoto/G. Spadafora

 

 

과거사를 들여다보려는 노력이 없지는 않았다. 2018년 3월 벨기에 연방의회는 11개 항의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해 인종 분리 정책을 인정하고 메티스가 과거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있게 했다. 이듬해 4월 샤를 미셸 당시 총리가 메티스들에게 사과했고 벨기에의 가톨릭 교회도 사과했다. 

 

 

그 이후로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2020년 6월, 콩고민주공화국 독립 60주년을 앞두고 이제는 모두 할머니가 된 다섯 여성이 벨기에 정부를 상대로 배상을 요구하는 역사적인 소송을 제기했다. 1심 법원은 이미 공소시효가 지났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이번 항소심에서는 법원이 이전 판결을 뒤집고 이러한 범죄는 공소시효의 대상이 아니라고 밝혔다.

 

그러나 뿌리 뽑힌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고초가 5만 유로로 배상될 수 있을까. 콩고가 독립한 이듬해에 보복이 두려웠던 수녀들은 아이들을 버리고 벨기에로 도망치듯 떠나버렸다. 이번 원고들의 경우를 보면 당시 약 10명의 메티스를 포함한 약 60명의 아이들이 버려졌고 일부는 질병과 굶주림에 사망했다. 독립 후 종족 간 폭력 사태 속에서 부족 민병대들은 버려진 어린 소녀들을 강간하고 죽였다. 살아남은 여성들은 성폭행과 굶주림에 대한 트라우마를 지금까지도 겪고 있다.

 

 

그렇게 아이를 떼어내는 일은 세계 곳곳에서 벌어졌다. 대표적인 것이 호주의 ‘도둑맞은 세대(Stolen Generations)’다. 원주민 피가 흐른다는 이유만으로 가족을 잃고 강제 위탁 속에 자라난 사람들을 가리킨다. 호주 정부는 원주민들을 백인 문화 속에서 키워야 한다며 가족과 부족사회로부터 억지로 떼어내 위탁시설이나 백인 위탁가정에 맡겼다. 호주 본토의 토착민인 애버리지니 자녀들, 호주와 뉴기니 사이 토레스 해협 섬들에 살던 원주민 자녀들이 그 대상이 됐다. 18세기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 100년 넘게 ‘문명화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이런 범죄가 저질러졌다. 한 민족의 뿌리를 잘라내는 무자비한 제국주의 프로젝트였던 동시에, 한 인간을 혈육에게서 잘라내는 극악한 인권침해였다. 

 

1995년에야 폴 키팅 총리의 노동당 정부가 원주민 단체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분리정책에 대한 청문회를 열었다. 청문회는 ‘도둑맞은 세대’의 범위를 결정하고 피해사례와 청원들을 수집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1997년 ‘그들을 집으로 데려오며(Bringing Them Home)’라는 보고서가 만들어졌다. 연방의회에 제출된 700쪽 분량의 보고서는 1910~1970년 전체 원주민 아동의 10~30% 가량이 강제 분리된 것으로 추산했다. 몇몇 주들은 보고서의 권고에 따라 공식 사과를 했고 일부 주는 배상기금을 만들었다. 2007년에는 법원이 원주민 배상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우파 자유당 정권의 거부 때문에 ‘정부의 공식 사과’는 이뤄지지 않았다. 1996년부터 11년을 집권한 자유당의 존 하워드 총리는 ‘사과’ 대신에 ‘유감’이란 말을 썼다. 2008년 케빈 러드 총리가 마침내 사과했지만 배상은 거부했다.

 

[내맘대로 세계사] 호주의 '도둑맞은 아이들'과 케빈 러드 총리의 사과

 

캐나다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2021년 캐나다 서부 브리티시컬럼비아주에서 땅 속에 묻힌 아이들 수백 명의 유해가 발견돼 충격을 줬다. 캐나다 식민지를 만든 백인들은 원주민이 인종적, 문화적, 사회적으로 열등하다고 봤다. 그래서 만든 것이 인디언 주거학교(Indian residential school)였다. 원주민 아이들을 부모에게서 떼어내 정부와 교회가 운영하는 기숙학교에 가둔 것이다. 영어를 쓰게 하고 기독교로 개종하게 하고 ‘백인 교육’을 시켰다. 지금은 원주민들을 ‘퍼스트 네이션’ 즉 선주민으로 인정해주지만 당시만 해도 경멸적으로 ‘인디언’이라 불렀다. 그런 학교들이 1874년부터 전국에 130여 개가 운영됐다. 원주민 아이들 총 15만명이 끌려갔다. 1970년대 이후에는 강제 격리는 아니었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1996년이 되어서였다. 

 

The Qu'Appelle Indian Industrial School in Lebret, Assiniboia, North-West Territories, c. 1885 / WIKIPEDIA

 

주거학교들에서는 신체적 정신적 성적 학대가 다반사였고 질병과 학대로 숨진 아이들이 많았다. 1945년 주거학교 아이들 사망률은 캐나다 전체 아동사망률의 5배였다. 아이들이 숨지면 주검조차 부모에게 돌려주지 않고 매장해버렸다. 

 

2000년대 초반부터 곳곳에서 주거학교에 대한 조사가 시작됐다. 2015년 캐나다 진실화해위원회는 4000쪽 짜리 보고서를 발표하고 이 사건을 ‘문화적 제노사이드(인종말살)’로 규정했다. 수십 년 동안 주거학교에서 숨진 아이들 4100명이 확인됐고, 전체적으로 6000명 이상이 사망했을 것이라는 추산치가 나왔다. 2019년에는 주거학교 사망자들 가운데 신원이 확인된 2800명의 명단이 공개됐다. 그러나 그 뒤에도 집단 매장지들이 여럿 발견됐다. 2021년 최대 규모 수용시설이었던 캄루프 주거학교의 집단매장지가 드러나자 저스틴 트뤼도 총리는 “어두운 역사를 보여주는 일”이라며 탄식했고 이 참담한 과거를 외면했던 캐나다인들은 애도를 보냈다. 하지만 캐나다의 원주민들은 여전히 가난과 알콜 중독 속에 숨져간다. 자살율도 높다.

 

미국에도 '인디언 주거학교'가 있었다. Pupils at Carlisle Indian Industrial School, Pennsylvania, c. 1900 / WIKIPEDIA

 

지금은 잘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지만, 인종주의라는 끔찍한 이데올로기의 흔적은 너무나 많다. 독일에는 ‘미개한 인종들’에 대한 반감과 동전의 양면인 ‘레벤스보른의 아이들’이 있었다. 나치 정권은 정신지체인이나 로마족(집시), 유대인 등은 `생물학적으로 열등하다’며 강제 불임을 시키고 학살했다.

 

반대로 ‘아리안 인종’에 대한 신화를 퍼뜨리면서 아리안족 ‘순혈’ 가족에게는 다산을 장려했다. 금발에 푸른 눈, 흰 피부의 아이들을 뽑아 부모에게서 격리시켜 집단양육하면서 순수 아리안 혈통을 선전했다. 그것이 레벤스보른(Lebensborn), ‘생명의 샘’이라는 이름의 계획이었다. 인종적 우월성을 선전하기 위해 뽑아 기른 아이들은 나치 패망과 함께 방치됐다. 어두운 과거를 숨기고 살던 이들이 2006년 독일 북서부 베르니게로데라는 곳에 노인들이 처음으로 모여 마음을 나눴다. 그들 역시 안타까운 피해자였다.

 

Photo showing a child's  baptism  (christening) ceremony/ritual; conducted by members of the  SS  at a " Lebensborn  e.V." maternity care home in  Rheinhessen  somewhere between 1936-1944. / WIKIPEDIA

 

나치의 인종주의 피해자였던 유대인들도 이스라엘에서 비슷한 짓을 저질렀다. 이스라엘판 도둑맞은 아이들의 스토리 또한 기이하다. 이스라엘은 중동의 민주국가라고 자랑하지만 차별 구조가 층층이 쌓여 있다. 이스라엘의 건국 주역은 동유럽계 ‘아슈케나지’다. 과거 노동당 정권의 지지층이었고 ‘키부츠’의 주역이었던 이들이다. 그 아래가 남유럽에 뿌리를 둔 유대인 세파르디다. 중동과 북아프리카에 대대로 흩어져 살아온 유대인들은 미즈라히라 부른다. 그 다음엔 ‘베타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에티오피아계 유대인들이 있다. 아마도 인구 30% 이상인 아랍계는 그 밑일 것이고, 맨 밑바닥에는 네게브 사막의 베두인들일 것이다.

 

이스라엘의 ‘도둑맞은 아이들’미즈라히, 그 중에서도 주로 예멘에서 이스라엘로 온 유대인 가정의 자녀들이다. 1950년대에 병원 관계자들이 산모에게는 “사산했다” 하고 아이를 사실상 훔쳐서 아슈케나지나 유럽 유대인 가정들에 입양시켰다. 1950년 예멘인 협회가 경찰에 수사를 요구했지만 매장지도 사망증명서도 없이 사망자로 분류된 아이들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입양된 줄 모르고 자라다가 의료 검사 등에서 부모와 혈연관계가 아님을 알게된 사람들이 생겨났고 일부 피해자들은 성인이 되어 부모를 찾아냈다.

 

2001년에야 정부가 조사에 나서서 케드미 조사위원회(Kedmi inquiry)가 꾸려졌고 5000명 넘는 아이들이 ‘실종’됐을 수 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하지만 정부는 그 중 1000건만 조사했고 그나마도 조사위원회가 확보한 증언과 수십만 건의 문서는 70년간 공개하지 못하게 했다. 기밀이 풀리려면 2071년이나 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덴 캠프'로 가는 예멘 유대인들. 이스라엘은 1949년 6월부터 1950년 9월까지 49,000명의 예멘 유대인을 '마법의 양탄자 작전' 혹은 '독수리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데려갔다. / WIKIPEDIA

 

왜 아기들을 가족으로부터 데려갔을까. 병원과 복지 단체들이 입양 명분의 인신매매를 한 것일까. 국가 기관들도 연루돼 있었을까. 이스라엘 정부는 답을 회피하고 있지만 실종 아동 가족들을 돕는 단체에 따르면 당시 유럽에서 온 유대인 사회에는 미즈라히, 특히 예멘 출신들에 대한 편견이 많았다고 한다.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 벤구리온은 미즈라히를 ‘폭도’ ‘사막 세대’로 묘사하면서 “유대인 또는 인간의 흔적이 부족하다”고 한 적도 있다. 역사학자 일란 파페는 아슈케나지 엘리트들이 유대인의 ‘탈아랍화’를 추구했다고 주장한다. 미즈라히 부모는 원시적인 사람들이므로 아이들을 아슈케나지 가정에 맡겨서 새로운 시온주의 국가에 적합한 사람들로 키워야 한다는 인식을 가졌다는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도둑맞은 아이들 사연도 극적이다. 1976~1983년 아르헨티나 군부정권은 반정부 인사들이나 학생운동가들, 지식인들을 고문, 감금, 살해했다. 7년간 3만 명이 숨진 이 비극을 ‘더러운 전쟁’이라 부른다. 실종된 자식을 찾는 어머니들, ‘5월 광장의 어머니’라 불리는 여성들이 수십 년 동안 진실을 밝히기 위해 시위를 했다. 그런데 당시 반체제 활동가들만 실종된 게 아니었다. 감옥에 갇히거나 체포된 반체제 여성이 아이를 낳으면 빼앗아서 아이 없는 군인 가정 등에 입양시켰다. 그렇게 불법 입양된 아기들이 500명이 넘는다. 군부에 자식을 잃고 손주마저 빼았겼다는 것을 알게 된 여성들은 ‘5월 광장의 할머니들’이 되어 다시 진실 찾기에 나섰다. 입양된 줄도 모른 채, 부모를 살해한 자들 밑에서 자라나 성인이 된 사람들이 가족찾기에 합류했다. 

 

나치 시절이 끝나고 30년도 더 지나 벌어진 일이다. 스페인에서도 1970년대 프랑코 독재정권 시절까지 인종주의 우생학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증거들이 있고, 반체제 인사의 아이들을 데려다가 국가에 충성하는 가정에서 키운다는 발상이 아르헨티나에서 현실화됐던 것이다. 벨기에의 소송이 보여주듯이 과거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도둑 맞은 아이들은 빼앗긴 인생을 찾으려 지금도 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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