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구정은의 '현실지구'

[구정은의 '현실지구'] 마오리족은 왜 의사당 앞에 모였나

딸기21 2024. 11. 29. 18:10
728x90

뉴질랜드 수도 웰링턴 의사당 앞에 19일 수만 명이 모여 시위를 했다. 아흐레 동안 마오리족 출신 시민들이 뉴질랜드 북섬 수백㎞를 걷는 평화행진(히코이)을 하고 이날 의사당 앞에서 항의 집회를 한 것이다.
 

뉴질랜드 마오리족 출신 시민들이 이달 19일(현지시각) 웰링턴 의사당으로 가는 중심업무지구에서 건국조약 재정 움직임에 항의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웰링턴/AP 연합뉴스


발단은 뉴질랜드의 건국조약이라고도 불리는 ‘와이탕이 조약’을 우파 정당들이 무력화하려고 한 것이었다. 마오리 말로는 ‘테 트리티 오 와이탕이’인데 그냥 줄여서 ‘테 트리티(조약)’라고들 부른다. 1840년 영국이 보낸 초대 영사 윌리엄 홉슨이 왕실을 대신해 마오리 부족 지도자들과 합의해 체결한 이 조약은 전문과 3개 조항으로 구성돼 있다. 마오리족의 땅과 소유물, 그리고 영국 신민으로서의 권리를 인정해주는 대신 주권을 영국 왕실에 이양한다는 내용이다. 
 
당시 뉴질랜드회사라는 영국 식민지 회사가 마오리족의 섬에 영국인들을 실어나르고 있었다. 동시에 프랑스도 이 땅을 노렸다. 그래서 마오리 지도자들이 프랑스를 막기 위해 영국의 도움을 받기로 한 것이었다. 영국 총독이 다스리되 땅과 숲에 대한 마오리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 즉 다른 식민지들과 달리 영국 왕실과 마오리 부족장들이 ‘파트너’의 성격을 갖게 됐다는 것이 핵심이다.
 
하지만 마오리 말과 영어의 표현이 좀 달랐고, 조약의 성격을 놓고 해석이 엇갈려 5년 뒤 전쟁이 일어났다. 1845~1872년 근 30년 간 ‘뉴질랜드 전쟁’이라 불리는 싸움이 이어졌다. 그렇게 저항했지만 결국 영국이 원주민들 땅을 몰수하거나 강압적으로 매입했다. 중남미에서 그랬듯이, 마오리도 전쟁과 함께 유럽에서 온 질병에 노출돼 80만명 넘는 인구가 20세기 초 한때 5만명으로까지 줄었다. 
 
자기네 언어와 문화가 사라질까 우려한 마오리족의 자각이 커졌고 마오리 정치운동이 일어났다. 아피라나 응아타(Āpirana Ngata)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있었다. 1905~1943년 근 40년 하원의원을 하면서 마오리를 위한 토지 정책을 추진했다. 뉴질랜드 50달러 지폐에 그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2차 세계대전 때 영국이 유럽을 비롯한 세계 곳곳의 전선에 호주-뉴질랜드 군대를 투입했고 마오리도 뉴질랜드 군으로 참전했다. 이 또한 마오리가 위상을 높이는 데에 영향을 줬다. 

이미지 출처 https://www.intuto.com


뉴질랜드가 1947년 완전히 독립한 이후 마오리족의 자각과 정치 운동은 ‘마오리 르네상스’라는 것으로 이어졌다. 1950년대부터 마오리족은 권리를 주장하고 잃어버린 땅을 되찾기 위한 발판으로 와이탕이 조약을 활용했다. 1960년대는 세계적으로 저항의 시대였고 뉴질랜드에서도 광범위한 마오리 부흥운동이 벌어졌다. 빼앗긴 권리를 되찾기 위해 독립 전 정부들이 무시했던 조약을 헌법적인 근거로 내세우게 되면서 와이탕이 조약은 더욱 중요한 위상을 갖게 됐다. 원주민들은 와이탕이의 날(2월 6일)을 기념하기 시작했고, 1973년 정부는 그 날을 공식 국경일로 제정했다. 1973년 의회는 와이탕이 조약법을 통과시켜 오래 전의 조약을 해석하고, 왕실이나 정부의 위반 사례들을 조사하고, 피해를 입은 원주민들을 구제하고 배상하도록 했다. 
 
이 조치로 ‘와이탕이 재판소’라는 것도 만들어졌다. 영국 왕실은 모른 체 했지만, 영국을 대신해 뉴질랜드 정부가 여러 마오리 집단에 총 10억 달러 규모의 배상금을 줬다. 1985년에는 와이탕이 조약법이 개정돼 마오리뿐 아니라 이위족, 하푸족 등 다른 토착민족들도 배상을 요구할 길이 열렸다. 와이탕이 조약이 현대 뉴질랜드 불문헌법의 기초가 된 것이다. 
 
정치적, 경제적 권리 뿐 아니라 언어와 문화를 되살리려는 움직임도 컸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교육 받은 젊은 마오리 세대는 문화에 활기를 불어넣을 방법을 모색했다. 오클랜드대 학생들이 결성한 ‘나 타마토아(Ngā Tamatoa, 젊은 전사들)’라는 그룹이 대표적이다. 마오리들은 유럽계를 ‘파케하’라고 부르는데, 마오리들이 문화를 잃고 ‘가짜 파케하’가 되어가는 것에 저항하고 마오리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운동을 조직했다. 1975년에는 북섬을 횡단하는 행진을 하고 웰링턴 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했다. 최근 시위에서 마오리족과 지지자들이 ‘히코이’라고 불리는 행진을 했다고 현지 언론들이 보도했는데, 히코이는 오랜 역사가 있는 마오리의 정치적 자기 표현인 셈이다. 

전통춤 ‘하카’를 추는 마오리. WIKIPEDIA


뉴질랜드의 지명들은 마오리 말과 영어로 표기된다. 1979년 뉴질랜드의 주요 정당들은 자기네 나라가 인종적으로 다양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마오리가 ‘파케하’의 관습에 매몰돼서는 안 된다, 자기들의 문화를 지키며 자신들의 길을 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특히 1980년대 노동당 정부 때에 ‘이중문화적 접근’이라고 불리는 이런 태도가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되기까지 마오리의 치열한 싸움이 있었다. 1960~70년대 저항운동에 이어, 1980년대에 마오리어인 테레오(Te Reo) 살리기 운동을 적극 펼친것이다. ‘코항가 레오(kohanga reo)’, 언어 둥지 운동이라고도 하는데 마오리 공동체들이 돈을 모아 교육기관을 열고 마오리 언어를 가르쳤다. 1987년에는 정부가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마오리 언어법을 만들었다. 마오리어가 공용어로 지정됐고, 정부 산하 ‘마오리 언어 위원회’가 설치돼 테레오를 죽은 언어가 아닌 살아 있는 언어, 일상의 언어로 장려하게 됐다. 
 
호주에서 원주민들이 절멸되다시피 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호주에도 애버리지니, 토레스해협 원주민, 태즈메이니아 원주민 등으로 불리는 토착민 집단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대륙처럼 큰 땅에 흩어져 살고 있었고, 쉽게 말해 각개격파됐다. 호주 식민통치 당국은 조직적으로 이들을 학살하고, 생존자들도 부모에게서 아이들을 떼어내 백인 가정이나 학교에 집어넣는 등 문화와 언어를 말살하는 데에 전력했다. 원주민 인구는 현재 80만명, 호주 전체 인구의 3.2%에 불과하다(2021년 센서스). 

호주의 ‘도둑 맞은 아이들‘과 케빈 러드 총리의 사과
 
반면 뉴질랜드의 마오리족은 예전부터 강력한 부족사회를 운영해 왔다. 이들은 원래 폴리네시아 원주민인데 14세기에 카누를 타고 뉴질랜드에 이동해 정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부는 채텀 제도라는 섬들로 옮겨가서 모리오리족이 됐다. 
마오리는 영국과 협상하고, 전쟁하고, 독립 이후에도 저항과 부흥운동을 계속했다. 지금 뉴질랜드의 마오리 인구는 약 100만명이고 호주 등 외국에 사는 이들이 20만명 정도 된다. 뉴질랜드 인구 540만명 중 68%가 유럽계이고 마오리가 18%다. 아시아계 17%, 그 밖에 태평양 섬 민족들이나 다른 지역 출신들이 있다. 인구조사에서 상당수 주민들이 유럽계와 마오리와 아시아계 중에서 복수의 정체성을 고른다. 
 
호주는 독립 이후 백인 우선주의 이민정책으로 악명 높았던 반면 뉴질랜드는 포용적인 사회로 알려져 있다. 두 나라의 길이 갈라진 데에는, 뉴질랜드에 마오리라는 큰 규모의 소수집단이 있었다는 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역대 정부들은 차별 철폐 조치(어퍼머티브 액션)를 통해 마오리와 유럽계의 사회경제적 격차를 줄이기 위해 애써야만 했다. 사회문화적 이슈에서는 와이탕이 조약을 바탕으로 마오리 부족 지도자들과 정부가 협상을 했다. 현재까지 뉴질랜드의 이중문화적 접근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정치적 대표성을 놓고 보자면 작년 총선으로 구성된 현 의회에서는 마오리 의원이 33명으로 전체 의석의 27%를 차지하고 있다. 인구 비례보다 더 많다. 

https://teara.govt.nz/en/ephemera/34894/te-reo-maori-report


그럼에도 유럽계에 비하면 열악한 조건에서 살고 차별을 받아온 게 사실이다. 빈곤 지역에 몰려 있고, 실업률도 높다. 인구의 20%도 안 되는데 교도소 수감자 절반 이상이 마오리다. 미국 흑인들처럼 형사절차에서 차별이 심하다. 사회경제적 여건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기대수명은 마오리족이 아닌 이들과 마오리 사이에 7년 이상 차이가 난다(마오리 남성 73.4세, 여성 77.1세인 반에 마오리가 아닌 남성은 80.9세, 여성은 84.4세다). 
 
그럼에도 마오리가 아닌 사람들 중에는 과거 선조들이 저지른 잘못을 갚아준다는 이유로 정부가 마오리에 끌려다닌다 생각하는 이들이 적잖다. 세금으로 배상해주는 것에 대한 불만도 늘 있었다. 예를 들면 2004년 뉴질랜드 정부가 해저 개발 추진하는데 마오리 집단이 반대하자 지원액을 늘려줬다. 그러자 특정 인종집단에 대한 특혜가 아니냐는 반발이 나왔다. 2000년대 이후 고등교육 분야나 관리직, 전문직 일자리에서 마오리인의 비율이 올라가며 생겨난 유럽계의 반발도 저변에 깔려 있다.
 
이런 불만을 발판 삼아 우파 정당인 뉴질랜드 행동당은 “와이탕이 조약이 국민을 인종적으로 분열시켰다”는 주장을 펼쳤다. 2세기 전 조약은 여러 나라에서 온 이주민이 늘어가는 시대에 맞지 않는다, 마오리를 위한 할당제들은 “평등권 원칙에 위배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쉽게 말해, 뉴질랜드는 여러 민족-인종집단이 사는 나라인데 한 집단만 배려해주는 것은 역차별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와이탕이 조약을 ‘재해석’하기 위한 법안을 내놓았다. 최근 시위는 직접적으로는 거기에 반대해서 조약을 지키기 위해 일어난 것이었다. 14일에는 마오리 의원이 국회에서 전통 춤인 ‘하카’를 추며 항의하기도 했다. 
 
세계가 우경화되고 있는데 뉴질랜드도 그 흐름에 휘말리는 듯하다. 2019년 3월 크라이스트처치의 모스크에서 극우파가 총기를 난사, 51명이 숨졌다. 저신다 아던 당시 총리는 무슬림 피해자들 편에 서서 애도하고 세계를 감동시켰다. 하지만 다른 곳도 아닌 뉴질랜드에서 일어난 사건이라 세계가 몹시 충격을 받았다. 뉴질랜드에 아시아 무슬림 이민자가 늘어난 것에 대한 적대감이 백인 우월주의자의 테러로 표출된 것이다. 점점 입지가 줄어가는 유럽계의 반발심이 우경화를 부르고, 역사적으로 피해를 입어온 마오리족을 상대로 ‘공정성’을 외치는 상황이 됐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한국계 인구 비율이 한국 다음으로 높은 나라가 뉴질랜드라고 한다. 한국계 뉴질랜드인은 약 3만6000명. 우리 입장에선 많지 않은 것 같아도 뉴질랜드 전체 인구의 1%에 좀 못 미친다. 이민자 시대가 불러온 여러 풍경들 속에서 토착민의 지위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역사적 피해에 대한 배상과 책임의 한계는 무엇인지를 마오리들은 묻고 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