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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은의 '수상한 GPS']일본 총리 선출, 속도는 빠른데 변화는 안 보인다

딸기21 2020. 9. 13. 15:27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가운데)이 9월 8일 도쿄 시내 자민당 당사에서 이시바 시게루 전 간사장(오른쪽), 기시다 후미오 정조회장(왼쪽)과 주먹을 맞대고 14일 치러질 총재선거 출마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신화연합뉴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지난달 말 건강 문제를 들며 사임하겠다고 발표한 뒤 일본 정국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차기 총리 선출을 위한 과정이 초고속으로 진행되는 양상이다. 그런데 속도만 빠를 뿐 정작 일본의 ‘얼굴’이 바뀐다 해도 내용적으로는 달라질 게 많지 않아 보인다.

 

자민당은 지난 9월 1일 총무회를 열어 총리 선출방식과 일정을 확정했다. 14일 투표로 새 총재를 뽑고. 16일 총리를 선출하기 위한 임시국회를 열기로 했다. 당 지도부가 정한 새 총재 선출방식은 다소 논란이 됐다. 젊은층 사이에 인기가 높은 고이즈미 신지로(小泉進次郞) 환경상을 비롯한 젊은 의원들은 당원투표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당 지도부는 중·참의원 양원 총회만으로 새 총재를 뽑기로 했다. 정식 투표에서는 의원 수와 당원 수를 동수로 해서 뽑지만, 이번에는 약식 선거여서 중·참의원 의장을 뺀 의원 394명에 지역별 당원 대표 총 141명만 투표권을 갖는다. 의원들을 붙잡으면 총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스가 장관에게 유리한 선출 방식

 

당 장악력이 높은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다. 스가는 최대 파벌 호소다파를 비롯해 8개 파벌 중 5개, 의원 70% 이상의 표를 이미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전 간사장이 4번째 당권 도전에 나서고 있지만 ‘대세론’이 여론의 흐름도 바꾸고 있다. 그동안 차기 총리 선호도를 묻는 조사에서 줄곧 이시바가 1위였는데 요미우리신문의 4~6일 조사에서는 스가가 46%로 이시바(33%)를 밀어냈다. 스가와 이시바,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정조회장이 8일 총재선거 출마 신청을 하고 공식 선거전에 들어갔지만 결과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파벌 구조는 자민당의 일당 지배를 중심으로 한 일본 ‘1955년 체제’의 시작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의 자유당과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郞)의 일본민주당이 합쳐져 거대정당 자민당이 탄생했다. 자유당 계열은 ‘보수 본류’, 민주당 계열은 ‘보수 방류’가 된 것이 파벌의 시초다. 현재 8개 파벌 중 제일 큰 것은 의원 98명의 호소다파다. 전범으로 갇혔던 기시 노부스케(岸信介)가 풀려나면서 끌어모은 정치인들이 모태가 됐다. 훗날 총리가 된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가 1962년 ‘세이와정책연구회’라는 이름으로 이 파벌을 공식 출범시켰다. 후쿠다에 이어 회장을 맡은 사람이 아베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郞)였다.

 

호소다파 다음으로는 시코카이(志公會·아소파) 56명, 평화연구회(다케시타파) 54명, 고치카이(宏池會·기시다파)와 시스이카이(志帥會·니카이파) 각각 47명 순이다. 아소파의 수장은 망언 제조기로 유명한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다. 현재 중의원·참의원 의장을 모두 아소파가 맡고 있다. 다케시타파는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 전 총리가 만들었고, 지금은 동생인 다케시타 와타루(竹下亘)가 이끌고 있다. 줄줄이 언급되는 이름에서 보이듯이 파벌정치는 족벌·세습정치와도 이어져 있다.

 

스가가 총리가 된다면 보기 드문 ‘무파벌·비세습’ 총리가 된다. 근 30년간 자민당 총재는 의원 2~3세가 맡아왔다. 고질적인 파벌 구조 덕에 총리로 가는 길을 닦았지만 정작 스가 본인은 특정 파벌에 소속돼 있지 않다. 아베가 특정 파벌의 지도자가 되는 대신에 ‘창생 일본’이라는 파벌 연합을 이끌었던 것과 비슷하다.

 

지지통신에 따르면 스가 장관은 한때 다케시타파와 기시다파 등에 소속돼 있었으나 2009년 이탈한 이후로 무파벌을 고수해왔다. 반면 기시다는 회원 47명의 기시다파를 이끌고 있고, 이시바도 2012년부터 스이게츠카이(水月會)라는 이름으로 18명을 거느리고 있다. 그럼에도 스가가 다수의 지지를 얻어낸 것은 무파벌 의원들을 비롯해 여러 중견·신진 의원 그룹과 자주 접촉하며 좋은 평판을 유지했기 때문이라고 지지는 전했다. 정식 파벌은 아니지만 약 30명의 의원이 사실상의 ‘스가파’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AP·EPA·AFP연합뉴스

 

도호쿠 지방 출신의 ‘흙수저’

 

스가와 자민당 유력 정치인들 사이에는 또 하나의 뚜렷한 차이가 있다. 정계의 ‘흙수저’라는 것이다. 아베는 기시 전 총리의 외손자다. 기시의 동생이자 아베의 외종조부인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도 총리를 지냈다. 아베의 아버지는 의원이었다. 아베를 비롯해 1991년 집권한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총리 이후의 모든 자민당 총재가 이런 세습 정치인이었다. 스가와 경쟁하는 이시바의 아버지는 의원과 각료를 지냈고, 이시바는 아버지 친구인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전 총리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했다. 기시다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의원이었으며 미야자와 기이치 전 총리, 미야자와 요이치(宮澤洋一) 경제산업상과 인척 관계다.

 

빈농 집안에서 태어난 스가는 의원 비서로 시작해 요코하마 시의원을 거쳐 1996년 48세에 중의원에 진출했다. 게다가 고향은 아키타(秋田)현이다. 역사적으로 무시당하고 배척받아온 도호쿠(東北) 지방 출신이다. 도호쿠에서 나온 총리는 지금까지 1980년대 초반의 스즈키 젠코(鈴木善幸) 외에는 없다.

 

스가의 당선이 이런 면에서는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가 총리가 된 이후 이끌어갈 변화에 대해서는 뚜렷한 관측이 없다. 스가는 아베가 첫 번째로 집권한 2006년 총무상에 발탁된 이후 2인자로 군림하며 정치적 운명을 함께해왔다. 2012년 말 아베 2차 집권 뒤로는 7년 8개월 동안 줄곧 정부 대변인인 관방장관을 맡았다. 2일 출마 기자회견에서도 그는 “아베 정권을 확실히 계승하겠다”고 했다. 국내 정책에서나 한일관계에서나 큰 변화를 부를 것 같지는 않다.

 

다만 관건은 ‘얼마나 압도적으로 승리하느냐’다. 스가가 압도적 지지로 당선된다면 중의원을 해산하고 내년 10월로 예정된 총선을 앞당길 수 있다. 연내 혹은 내년 초 조기 총선을 치러 승리로 이끈다면 아베의 남은 임기를 채우는 ‘과도기형 총리’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리더십을 구축하려 나설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쉽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스가 캠프가 니카이파를 중용하면서 벌써 파벌 간 갈등 조짐이 일고 있다고 마이니치신문은 보도했다. 아베의 측근이었기 때문에 아베 주변의 부패 의혹 등이 부메랑으로 그에게 돌아갈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