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수상한 GPS

[구정은의 '수상한 GPS']‘민주주의 지킴이 160년’ 잡지 애틀랜틱과 싸우는 트럼프

딸기21 2020. 9. 8. 19:20

1857년 만들어진 미국 잡지 ‘애틀랜틱 먼슬리’의 창간호. 위키피디아

 

2008년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로 나섰던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잘 알려진 대로 군인 집안 출신이다. 베트남전 때 포로로 붙잡혔지만 포로석방 협상 때마다 기회를 양보하고 부하들부터 풀려나게 해, 귀국 뒤 ‘베트남전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20여년 동안 줄곧 그를 비난해온 사람이 있다. 가짜 진단서를 내고 베트남전 징집을 피했다는 의혹을 받는 도널드 트럼프 현 대통령이다.

 

워싱턴포스트는 7일(현지시간) “(대통령은) 미국 정부가 실종군인들을 찾으려고 왜 그렇게 애를 쓰는지 모르는 것 같다”며 트럼프 대통령의 과거 미군 관련 발언들을 분석한 기사를 실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1990년대 말부터 대권 도전을 꿈꿨는데, 그 시절부터 매케인 의원을 향해 “포로로 잡힌 것도 영웅이냐”며 여러 방송에서 비아냥거렸다는 것이다. “젊었을 때 베트남에 가지 않았어도 우리에겐 우리의 베트남(전쟁)이 있었다, 바로 연애전쟁이다”라는 말도 했다.

 

발단은 시사잡지 애틀랜틱이 3일 트럼프 대통령이 과거 참전군인들을 ‘호구’ ‘패배자’ 따위로 비하하는 말을 했다고 보도한 것이었다. 미국인들의 애국주의와 자부심을 건드리는 발언이다. 위기에 몰린 트럼프 대통령은 “짐승이나 그런 소리를 할 것”이라며 참전군인을 비하한 적 없다고 부인했다. 7일 브리핑에서 그는 “나보다 더 그들을 존경하는 사람은 없다” “장병들이 나를 엄청 좋아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펜타곤 고위 인사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며 미 국방부와 군수산업의 ‘결탁’을 비난하는 쪽으로 화살을 돌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7일(현지시간) 워싱턴의 백악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AP

 

하지만 후속 보도를 예고한 상태여서 정치적 파장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 잡지의 제프리 골드버그 편집장은 트위터에 워싱턴포스트 등의 기사를 링크했고, 트럼프 대통령이 성폭행과 성추행 등으로도 잇달아 고소를 당했다면서 피해 여성들의 증언을 생생히 보도한 지난달의 애틀랜틱 기사들도 공유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동안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스, CNN 같은 ‘레거시미디어(전통 매체)’들을 ‘가짜뉴스’로 몰아가며 언론과의 전쟁을 벌여왔다. 그 대신에 그가 좋아하는 것은 우익들의 메가폰격인 루퍼트 머독의 폭스뉴스와 온라인매체 브레이트바트뉴스 같은 것들이다. 브레이트바트는 4년 전 대선 때 트럼프 후보를 맹렬히 지지하며 가짜뉴스 퍼뜨리기의 선봉에 섰던 매체로 미디어라기보다는 ‘유사 언론’에 불과하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뒤 이 매체 출신 인사들을 중용하면서 대접해줬다.

 

반면 이번에 트럼프 대통령과 맞붙은 애틀랜틱은 그저 미국의 유명한 잡지가 아니다. 1857년 보스턴의 출판업자 모제스 필립스가 주도해 ‘애틀랜틱 먼슬리’라는 이름으로 창간됐다. 자연주의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 함께 했던 문인 겸 철학자 랠프 왈도 에머슨, 미국의 ‘국민시인’ 헨리 워즈워드 롱펠로, 작가 겸 편집자 프랜시스 언더우드가 창간멤버였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쓴 해리엇 비처 스토를 비롯해 노예 출신 흑인 해방운동가 윌리엄 파머 등이 초창기부터 이 잡지에 글을 썼고 미국 노예해방 운동에 큰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마크 트웨인의 작품들도 상당수가 애틀랜틱을 통해 발표됐다.

 

1862년 미국 남북전쟁을 다룬 ‘애틀랜틱 먼슬리’ 기사.   위키피디아

 

20세기 이후에도 애틀랜틱은 문학과 저널리즘 사이에서 미국 지식사회를 주도하는 작가들의 저널로 군림해왔다. 1960년대 민권운동 시절에 ‘시민 불복종’을 지지하는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옥중 서한을 실은 것도 이 잡지였다. 21세기가 되어서도 미국에서 긴 내러티브의 기사와 글들을 싣는 플랫폼으로 위상을 이어왔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좋아하는 작가로 유명해진 타-네히시 코츠, 국제정치 전문가 앤 마리 슬로터 프린스턴대 교수 등도 이 잡지의 주요 필진이다.

 

편집장 골드버그는 뉴욕의 유대계 가정 출신으로 이스라엘에서 군 복무를 하면서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포로수용소 등에서 근무한 이례적인 경력을 갖고 있다. 미국으로 돌아와 워싱턴포스트를 통해 언론계에 들어왔고 2007년 애틀랜틱으로 옮겼다. 올해로 9년째 편집장을 맡고 있다.

 

애틀랜틱은 16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지만 대선에서 특정 후보를 명시적으로 지지한 적이 별로 없다. 하지만 1860년 노예제를 폐지하겠다고 선언한 에이브러햄 링컨을 지지한 것을 비롯해 몇몇 예외도 있었다. 1964년 대선에서는 배리 골드워터 당시 공화당 대선후보가 남부의 인종차별주의자들, 특히 KKK같은 백인 인종주의 테러집단과 우호적인 관계라고 비판하며 린든 B 존슨 민주당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그리고 2016년, 트럼프 후보에 반대하며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를 지지했다.

 

미국 보스턴의 애틀랜틱 본사를 그린 그림.  위키피디아

 

애틀랜틱은 보스턴의 출판계 인사들이 주로 경영했다. 1980~90년대 캐나다계 미국인 미디어 재벌 모티머 저커먼이 매입했지만 1999년 손을 뗐다. 그후 ‘애틀랜틱 미디어그룹’이라는 모회사를 만들었고 온라인 잡지 ‘쿼츠’ 창립자인 데이비드 그래들리가 애틀랜틱의 경영을 맡아왔다. 수익환경이 나빠지자 2017년 ‘에머슨 콜렉티브’가 애틀랜틱에 투자했으며 현재 이 기구가 대부분의 지분을 갖고 있다.

 

에머슨 콜렉티브는 교육개혁과 이민제도 개혁, 환경과 저널리즘, 보건 등 여러 분야에서 미국 사회의 개혁을 추구한다는 목표에 맞춰 투자하고 지원하는 민간기금이다. 애틀랜틱의 초창기 멤버 에머슨에게서 이름을 따온 재단으로, 2004년 스티브 잡스의 부인 로린 파월 잡스가 설립했다. 공교롭게도 트럼프에 비판적인 온라인 뉴스사이트 ‘악시오스’도 에머슨 콜렉티브가 최대주주다.

 

애틀랜틱 기사 때문에 화가 난 트럼프 대통령은 6일 트위터에 “아내가 가짜뉴스와 증오를 토해내는 극좌 잡지에 돈을 낭비하는 걸 안다면 스티브 잡스도 꺼려할 것”이라는 글을 올렸다. CNN, CBS, 마켓워치 등 미국 언론들은 대통령이 미군 모욕 발언에 이어 자선가이자 사회개혁가로 활동해온 잡스 부인을 비방한 것을 주요 뉴스로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