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올 1월 유럽연합(EU)과 서명한 브렉시트 합의에 위반되는 ‘국내시장법’을 내놨다. 영국 땅이지만 EU 단일시장에 남기로 한 북아일랜드를 징검다리 삼아 경제적 충격을 줄여보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EU는 국제법 위반이라고 반발했으며 영국 내에서도 비판이 거세다.
BBC 등 영국 언론들에 따르면 존슨 총리는 9일(현지시간) ‘국내시장법’을 공개하고 의회에 가결을 촉구했다. 북아일랜드 물품이 영국 나머지 지역으로 들어올 때 통관절차를 밟지 않아도 되고, 내년 1월 1일부터 발효되는 탈퇴협정의 상품이동에 관한 사항들을 영국 각료들이 수정하거나 ‘불복’할 수 있고, 정부가 기업에 내주는 국가보조금에 대한 기존 합의사항 또한 뒤집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 법안의 골자다. 즉 올 연말까지의 ‘브렉시트 전환기간’이 끝난 이후에도 북아일랜드산 물품이 영국으로 들어올 때 관세를 매기지 않아도 되며, EU 법에 맞지 않는 기업 보조금 지원도 영국이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북아일랜드는 영국 땅이지만 아일랜드와 닿아 있어 검문과 통관 등 ‘국경문제’가 불거졌다. EU 안에 있을 때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사이에 검문소나 장벽 같은 물리적인 분리장치가 없었다. 역사적으로도 두 지역 주민들은 같은 생활권이었고 자유롭게 오갔다. 브렉시트 뒤에도 물리적으로 분리된 ‘하드 보더’ 즉 정식 국경선을 설치하지 않는다는 데에는 일단 합의했다.
하지만 브렉시트 이후 북아일랜드의 지위는 탈퇴협상의 최대 쟁점이었다. 영국이 북아일랜드가 관세동맹에 남는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올초 협상이 타결됐다. 탈퇴협정에 따르면 북아일랜드는 EU의 관세체계를 따른다. 북아일랜드 물품이 영국 나머지 지역으로 ‘수출’될 때에는 통관절차를 밟아야 하고, 영국 상품이 북아일랜드로 갈 때에도 관세가 붙는다. 반면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의 교역에는 지금까지 그랬듯 통관절차를 두지 않는다. EU와 영국은 이런 내용으로 ‘북아일랜드 의정서’를 만들었고, 그 외 관세와 상품 기준에 대해서는 계속 협상을 해왔다.
올 연말까지 별도 합의가 없고 자유무역협정(FTA)도 체결되지 않으면 의정서는 법적 효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새 법안은 영국 정부 각료들이 일방적으로 수출신고의무나 통관절차를 바꾸거나 없앨 수 있게 했다. 또 EU 단일시장에 묶여 있는 북아일랜드에 대해서도 EU 국가보조금 규정을 따르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존슨 총리는 “영국, 스코틀랜드, 웨일즈, 북아일랜드 시장의 통합”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의정서의 극단적이거나 비합리적인 규정으로부터 영국을 보호할 법적 안전망”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설득력은 떨어진다. 존슨 총리는 브렉시트 국민투표 이전부터 EU를 떠나겠다고 누구보다 목소리를 높였던 인물이다. 그런데 결별을 넉달 앞두고 이제 와서 슬그머니 북아일랜드에 얹혀가려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영국산 제조업 상품이 팔리는 10대 수출상대국 중 8개가 유럽국들이다.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로의 수출액만 연간 1174억파운드, 180조원에 이른다. 블룸버그통신은 영국 제조업체들이 이런 수치를 들며 정부에 탈퇴협정의 수정을 요구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영국 제조업협회 ‘메이크UK’의 스티븐 핍슨 회장은 10일자 성명에서 “가장 큰 시장에 대한 접근이 영국 제조업자들에게는 최우선이 돼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EU와의 탈퇴협정 4항에는 이 협정이 법적으로 국제조약의 지위를 가지며 영국 국내법에 우선한다고 명시돼 있다. 새 법안을 강행하면 국제법 위반이 된다. 그런데 존슨 정부는 법안에 “국제법에 위배되도 이 법은 발효된다”는 조항까지 집어넣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탈퇴협정을 위반하려는 영국 정부의 의도가 신뢰를 해칠 것”이라며 “크게 우려한다”고 말했다. EU 집행위는 곧바로 영국에 회의를 요구했다.
가디언 등은 집권 보수당에서도 국제법을 어기는 것이 향후 영국의 외교관계와 위상에 큰 타격을 입힐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고 보도했다. 존 메이저 전 총리는 “우리가 한 약속을 스스로 존중한다는 평판이 깨져버리면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잃을 것이며 다시 회복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법안이 상하원을 통과할지도 현재로선 불투명하다.
스코틀랜드와 웨일스도 북아일랜드와의 관계와 관련된 권한을 중앙정부가 갖도록 법에 명시한 것에 반발하고 있다. 니콜라 스터전 스코틀랜드 행정수반은 자치를 훼손시킬 “역겨운 조치”라고 했다. 웨일스 정부는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이자 웨일스,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주민에 대한 모욕”이라고 비난했다.
아일랜드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북아일랜드는 아일랜드로 귀속되길 바라며 수십년 동안 영국을 상대로 싸웠다. 양측은 북아일랜드의 자치를 폭넓게 인정한 1998년의 ‘성(星)금요일 협정(벨파스트 협정)’을 통해 간신히 평화를 찾았다. 새 법은 이 협정의 취지에 반해 영국이 통제권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미홀 마틴 아일랜드 총리는 존슨 총리와의 통화에서 “(브렉시트 협상에)북아일랜드를 다시 끌고들어가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말했다.
대서양 건너편에서도 반대의 목소리가 나왔다. 미국은 유럽에서 떨어져나올 영국을 FTA로 묶어 미-영 단일시장을 만들려 하고 있다.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은 존슨 총리의 행보가 북아일랜드의 평화를 위협한다면 미국과 영국의 FTA도 “기회가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양국 협상단은 이번 주 내 4차 FTA 협상을, 다음달 중순에 5차 협상을 진행하기로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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