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와 터키가 심상찮다. 지중해 가스전을 놓고 벌어진 갈등에서 그리스 편을 든 프랑스가 중동·북아프리카 여러 이슈에 개입하면서 터키와 전선을 긋고 있다. 터키는 “우리를 건드리지 말라”며 발끈했다.
아나돌루통신, 프랑스24 등에 따르면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12일(현지시간) 마크롱 대통령을 겨냥해 “터키와 터키인을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지난 10일 ‘남유럽 7개국 정상회의’에서 “터키를 동지중해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한 것에 대한 응수다.
마크롱 대통령은 앞서 이탈리아 코르시카섬에서 열린 남유럽 정상회의에서 “우리 유럽인은 터키의 용납할 수 없는 행동에 명확한 태도를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지난달 말에는 “터키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동맹국이 아닌 것처럼 행동한다”고 했다. 터키는 나토 내 유일한 이슬람국가이고, 이런 편가르기는 위험한 발언이 될 수 있다. 유럽 언론들은 지난달 프랑스가 그리스·키프로스와 군사훈련을 하며 터키를 자극할 때부터 나토의 균열을 우려해왔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프랑스를 비난하며 “인류애를 말할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프랑스 때문에 알제리에서 100만명, 르완다에서 80만명이 숨졌다”면서 제국주의 과거를 건드렸다. 하지만 터키도 역사를 꺼내들 처지는 아니다. 알제리가 프랑스 지배로 고통받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중동·북아프리카인들에게는 터키(오스만투르크)야말로 옛 지배국이다.
지난달 두 나라는 지중해 동쪽 키프로스 부근의 가스전 탐사를 놓고 갈등을 벌였다. 프랑스는 그리스와 합동 군사훈련을 하며 터키를 겨냥한 무력시위를 했다. 그러나 이 갈등 이전에도 터키와 프랑스는 리비아 문제로 부딪쳤다. 지난 6월 프랑스 구축함이 리비아로 가는 터키 화물선을 수색하려다가 화물선을 호위 중이던 터키 군함에 가로막혔다. 프랑스 측은 화물선에 금지된 무기들이 실려 있었다고 주장했다. 터키는 “인도적 지원품들뿐이었다”고 부인했다.
프랑스와 터키는 둘로 갈라진 리비아 정치진영 중 각각 한쪽을 지원하며, 이는 경제적 이익과도 직결돼 있다. 터키는 이슬람주의에 좀더 가까운 트리폴리 세력을 밀어주고 지중해 천연가스전 개발권을 얻어냈다. 프랑스 석유회사 토탈은 반대 진영과 손잡고 지난해 리비아 북부 시르테의 가스전에 6억5000만달러를 투자했다. 그러자 터키의 지원을 받는 세력이 친프랑스 진영을 공격했다. 프랑스군은 올 7월 트리폴리 남서쪽 와티야의 터키군 기지를 폭격했다.
프랑스는 이 싸움에 알제리까지 끌어들이려 하고 있으나, 알제리는 리비아를 무대로 프랑스와 터키가 경쟁하는 것이 역내 분란을 키울까 우려한다. 알제리의 사브리 부카둠 외교장관은 이달 초 터키를 방문해 경제협력을 논의하면서 “리비아의 정치 갈등은 협상으로 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알제리는 터키·프랑스 모두와 좋은 사이이지만 두 나라가 리비아에 군사 개입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고 중동 전문매체 아랍위클리는 보도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중동 문제에 근래 부쩍 관여하며 터키를 자극하고 있다. 마크롱 대통령은 폭발참사가 일어난 레바논을 두 차례 찾았고 이달 초 이라크도 방문했다. 이라크에서 그가 네치르반 바르자니 쿠르드자치정부 대통령을 만나자 터키는 곧바로 바르자니를 앙카라로 불렀다.
터키 국영방송 TRT월드는 마크롱 대통령이 “아무 계획도 없이 (샤를) 드골 흉내만 내려고 한다”고 했다. 레바논에 구조조정을 압박하며 정치개혁 시한까지 제시한 것은 무리수라는 지적이 프랑스 안에서도 나왔다. 르몽드는 최근 사설에서 “마크롱의 레바논 도박은 현지를 방문할 때마다 위험성이 커진다”고 지적했다.
프랑스 분석가 기욤 페리에는 터키·중동매체 아흐발에 “에르도안과 마크롱 모두 우파들 표를 얻으려 하고, 이것이 서로에 대한 강경한 태도를 부추기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마크롱 집권 이전에도 오랫동안 유럽 내 ‘반터키’ 여론을 주도해왔다. 2006년 프랑스 의회는 100년 전 터키의 ‘아르메니아 학살’ 비난 결의로 터키를 자극하고 유럽연합(EU) 가입에 훼방을 놓았다. 터키 친정부 언론 데일리사바는 프랑스가 그리스, 이스라엘, 이집트와 함께 지중해에서 반터키 동맹을 형성하고 있으며 “터키를 포위하는 정책”을 추진해왔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두 ‘구(舊)세력’의 패권 다툼에서 어느 쪽도 승자가 되기는 힘들어 보인다. 미국은 동지중해 갈등이 더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터키와 그리스 사이에서 물밑 중재에 들어갔다. 유럽국들도 프랑스의 독자 행보를 지지하지 않는다. 이집트 매체 알아흐람의 지적대로 “아무리 중동에 자신의 의제를 강요하려 한들, 프랑스의 영향력은 100년 전과 다르다.”
마크롱 대통령은 미국이 이라크 철군계획을 발표하기 직전에 바그다드와 북부 쿠르드지역을 찾았다. 마치 미군이 빠진 뒤 중동에서 힘의 공백을 메울 것처럼 굴었지만, 미국과 이란 사이에 끼인 이라크가 솔깃해할 어떤 제안도 내놓지 못했다. 새로운 패권을 추구할 역량은 없고, 그저 중동·북아프리카와 상업적 연계를 강화하는 수준에서 그칠 것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터키도 마찬가지다. 에르도안 대통령의 권력은 지난해 이스탄불에서 야당 소속 시장이 당선되는 등 흔들리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터키를 받쳐온 세속주의를 무너뜨리고 이슬람주의를 강요하는 행태에 내부 반발도 적지 않다. 아랍국들과의 관계도 그리 굳건하지는 않다.
패권 경쟁보다 더 현실적인 것은 두 나라의 문화전쟁이다. 지난해 프랑스는 터키가 이슬람 지도자들을 보내는 것을 경계하면서 프랑스 무슬림들이 토착 ‘이맘(이슬람 설교자)’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근 터키는 이스탄불과 앙카라에 있는 프랑스 학교들의 세속적인 교육이 터키와 맞지 않는다며 폐교를 거론했다. 프랑스 상원은 올 7월 244쪽의 보고서를 내 ‘프랑스 이슬람주의자들의 영향력 확대와 위험성’을 경계하며 터키의 입김을 우려했다. 며칠 뒤 에르도안 정부가 이스탄불의 소피아성당을 모스크로 개축하겠다고 발표하자 프랑스는 즉각 비난했다.
더 위험한 징후는 같은 시기 극우단체 ‘윌퀴 오자클라르(회색늑대)’를 추종하는 프랑스의 터키계 청년들이 아르메니아인들의 집회를 공격하겠다고 한 것이었다. ‘회색늑대’는 1970~80년대 터키에서 군사정권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암살하고 유럽에서는 쿠르드족이나 ‘터키의 적들’을 살해한 집단이다. 프랑스-터키 갈등이 지중해가 아닌 파리 복판에서 극단적인 양상으로 터져나올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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