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세계사/해외문화 산책

[해외문화 산책]멜리사는 도서관에 돌아갈 수 있을까

딸기21 2020. 4. 25.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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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리사는 초등학교 4학년 ‘소녀’다. 학급에서 엘윈 화이트의 소설 <샬롯의 거미줄> 낭송 행사가 열린다. 여자아이들은 주인공 샬롯 역할을 따내려고 열심이다. 멜리사도 샬롯 역할에 도전하고 싶다. 하지만 가족들, 그리고 세상 사람들 눈에 멜리사는 멜리사가 아니라 조지라는 ‘소년’이다. 그래도 멜리사는 포기하지 않고, 샬롯 역을 따낸 친구 켈리를 설득한다. 켈리는 멜리사가 멜리사임을 믿어준다.

 

 

멜리사는 샬롯 역을 맡을 수 있을까? 현실은 늘 소설보다 엄혹한 법이다. 멜리사 이야기는 미국 작가 앨릭스 지노의 아동소설 <조지(George)>의 내용이다. 국내에는 <내 말은, 넌 그냥 여자야>라는 제목으로 번역돼 있다. 지노의 이 소설은 2015년 발표된 이래로 트랜스젠더 소녀를 다뤘다는 점 때문에 줄곧 논란거리가 돼왔다. 최근 미국도서관협회(ALA)는 ‘가장 도전적인 책들’을 선정한 목록을 발표했다. 해마다 공개하는 이 리스트는 도서관에 비치하지 말라는 독자들의 요청이 많이 들어온 책들을 정리한 것이다. 그 목록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조지>다. 이 책에 반대하는 이들은 “전통적인 가족구조와 갈등을 일으킨다”는 이유를 댄다.
 

항의가 계속 들어오면 공공도서관들은 책을 두기가 힘들어진다. 특히 학교 도서관들은 학부모 항의를 빌미로 책을 빼버리는 경우도 많다. 미국 도서관 서가에서 이렇게 사라지는 책들은 해마다 늘고 있다. 기독교 단체 등이 ‘금서’들을 꼽아 조직적으로 도서관에 항의서한을 보내기 때문이다. 미국 언론들 분석 결과 ALA 리스트의 80%가 LGBTQ, 즉 성소수자 캐릭터가 나오는 것들이었다. 저스틴 리처드슨과 피터 파넬의 <그리고 탱고로 셋이 됐다(And Tango Makes Three)>는 수컷 펭귄 두 마리 사이에 암컷 펭귄 ‘탱고’가 등장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렸다.

 

 

<사랑에 빠진 토끼(A Day in the Life of Marlon Bundo)>는 2018년 출간 이래 정치적 파장까지 불렀다. 이 책은 인디애나 주지사 시절 성소수자 차별을 아예 법으로 허용한 기독교 근본주의자 마이크 펜스 대통령을 직격했다. 펜스 부통령의 아내 캐런과 딸 샬롯이 <미국 부통령의 토끼 말런 분도의 하루>라는 그림책을 내 화제를 모았는데, 방송인 존 올리버와 질 트위스가 아예 그 책을 패러디해 <사랑에 빠진 토끼>를 냈기 때문이다. 동화는 동성 토끼 간의 로맨스를 통해 동성결합과 성소수자 권리를 옹호하는 내용을 담았다. 올리버는 아예 저자 이름에 ‘말런 분도’라는 가명을 올렸다.
 

ALA에 따르면 지난해 ‘도서관에서 치우라’는 요구가 들어온 책은 566권이었다. 그 전 해의 480여권에서 크게 늘었다. 2015년 미국 대부분 지역에서 동성결합이 합법화된 뒤 우익들의 ‘금서만들기 작전’이 조직적으로 벌어지기 시작했고, 그 때부터 도서관을 향한 항의가 매년 증가하고 있다. ‘도전적인 책’ 목록에서 성소수자 관련 도서가 20% 정도였는데 2015년에 40%로 뛰더니 지난해에는 80%까지 차지하게 됐다. ALA 목록이 나오자 표현자유를 주장하는 전국검열반대연합(NCAC) 등 40여개 시민단체들은 보수진영을 비판하는 성명을 냈다. 도서관이 미국 기독교 우파들과 자유주의 진영의 문화전쟁 무대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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