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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의 또다른 그늘, 평화유지군의 ‘버려진 아이들’

딸기21 2019. 12. 19. 15:04

유엔 평화유지군으로 아이티에 파병됐던 브라질 군인들이 2017년 10월 포르토프랭스에서 해단식을 하고 있다.  포르토프랭스 EPA연합뉴스

 

브라질에서 온 유엔 평화유지군 병사 미겔을 만났을 때, 마리는 기독교계 학교에 다니던 14살 소녀였다. 아이를 가졌다고 알리자 미겔은 마리와 아이를 돌보겠다고 약속했지만 파병기간이 끝나니 브라질로 돌아가버렸다. 그 후로는 연락이 끊겼다. 딸이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마리를 집에서 내쫓았고, 마리는 힘들게 혼자 아이를 키우고 있다. 시간당 25구르드, 약 300원 정도를 받으며 일하는 마리는 근근이 아이와 함께 살아가고 있으나 학교에 보낼 돈이 없어 걱정이다.

 

중미 카리브해의 섬나라 아이티에서는 2004년 대통령을 몰아낸 쿠데타가 일어났다. 정정불안 속에 사상자가 늘자 유엔이 평화유지군을 보냈다. 2010년 1월 이 나라에서는 대지진이 일어나 22만명 이상이 숨졌다. 유엔이 다시 평화유지군을 대거 파병했다. 재건을 돕기 위한 군대였으나 유엔 소속 병사들이 현지 여성들을 성적 착취한 사례들이 속속 보고됐다. 영국과 캐나다 학자들이 조사를 해보니, 10여년에 걸친 파병 기간에 평화유지군이 남기고 간 아이들이 수백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 버밍엄대의 사빈 리, 캐나다 온타리오 퀸즈대의 수전 바텔스가 이끄는 연구팀은 2017년 평화유지군 기지가 있던 곳 주민들을 인터뷰해 마리와 같은 여성들을 만났고, 조사결과를 호주 잡지 더컨버세이션에 18일(현지시간) 공개했다. 연구팀이 주민 2500명을 만나 조사하면서 확인한 ‘버려진 아이들’이 265명에 달했다. 프랑스어 약칭을 따서 평화유지군은 ‘미누스타’라고 불렸고, 이들이 남긴 아이들은 ‘프티 미누스타’라 불리고 있었다. 확인된 ‘아버지’들의 국적은 13개국이며 우루과이와 브라질 군인들이 많았다.

 

평화유지군과 현지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수. ‘아버지’의 국적은 우루과이와 브라질이 많았다. 더컨버세이션

 

일부는 성폭행을 당해 아이를 가졌다. 심지어 11살에 성폭행으로 임신한 소녀도 있었다. 일부는 굶주린 여성들이 돈과 음식을 얻기 위해 평화유지군과 성관계를 맺은 케이스였다. 폭력적이든 ‘거래’였든, 여성들의 열악한 처지를 이용해 성적으로 착취한 것은 분명하다. 마리처럼 ‘지속적인 관계’를 맺었던 이들도 있으나 이미 태어난 아이를 버리고 아버지들은 다 귀국해버렸다.

 

현지 변호사들로 구성된 민간단체는 버려진 아이들 10명 편에 서서 각국 법원에 친권확인소송을 낸 상태다. 미국 법률단체 등과 협력해 “유엔이 버려진 엄마와 아이들을 도와야 한다”고 촉구해왔으나 유엔의 응답은 없었다고 이들은 밝혔다. 이 단체에서 활동하는 한 변호사는 뉴욕타임스에 “가난한 아이티 시골 여성이 우루과이에 있는 남성을 상대로 국제적인 행동을 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파병 책임을 지는 유엔이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평화유지군이 주둔지에서 성매매·성폭행 등으로 문제를 일으킨 사례는 많다. 1990~1998년 유엔이 내전을 진정시키기 위해 파병했던 라이베리아에도 ‘버려진 아이들’이 수천 명에 이른다. 캄보디아에선 평화유지군의 성매매가 기승을 부렸고 에이즈가 확산됐다. 1996년 모잠비크 퍼스트레이디였던 그라사 마셸의 주도로 이뤄진 조사에서는 평화유지군 주둔지역에서 아동 성매매가 급격히 늘어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5년 중앙아프리카공화국 평화유지군의 경우 유엔 자체 조사결과 최소 98명의 소녀들이 성적 착취를 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부룬디와 가봉에서도 비슷한 사례들이 확인됐다.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 외곽 시테솔레일에 있는 유엔 평화유지군 기지. 더컨버세이션

 

국제앰네스티 조사에서는 평화유지군이 특히 아동들을 성착취하는 경우에, 소유주처럼 군림하며 노예로 부리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엔이 자체 조사한 아이티 성착취의 경우 1인당 75센트를 주고 평화유지군 40여명이 12~15세 소녀들을 아예 기지에 살게 하면서 노예처럼 부리기도 했다.

 

안토니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2013년부터 평화유지군의 성착취 사례가 줄어들고 있지만 여전히 매우 심각한 사안임을 인식하고 있다”는 성명을 냈다. 그러나 유엔의 무책임한 태도는 계속 도마에 오르고 있다. 평화유지군은 유엔이 비용을 대고 희망하는 국가들이 병력을 제공하는 구조다. 대체로 소득이 높지 않은 국가들이 많이 참여한다. 파병부대의 인권교육을 강화하고, 범죄행위에 대해선 유엔이 책임성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범죄행위자들을 자국 법에 따라 처벌하길 회피해온 파병국가들의 책임도 적지 않다. 유엔은 2004~2007년 아이티에 주둔한 스리랑카 평화유지군 134명의 아동 성폭행을 확인하고 출국시켰으나 귀국한 뒤 처벌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이티에서는 지진 뒤 네팔 평화유지군 주둔지에서 콜레라가 퍼져 2차 재앙을 낳기도 했다. 80만명이 감염됐고, 1만명이 숨졌는데도 반기문 당시 유엔 사무총장은 대응을 미루다 뒤늦게 사과하고 보상을 거부해 비판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