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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숙적' 자크 시라크 전 프랑스 대통령 별세

딸기21 2019. 9. 26. 23:05

2007년 자크 시라크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 엘리제궁에서 TV 연설을 하고 있다.  AP자료사진

 

미국의 숙적, 프랑스 ‘앙시앵 레짐(구체제)’의 마지막 정치인. 유럽의 한 시대를 이끌었던 자크 시라크 전 프랑스 대통령이 26일 별세했다.

 

AFP통신 등은 시라크 전 대통령이 이날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보도했다. 유족들에 따르면 시라크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노환으로 타계했다. 그는 2016년 폐렴으로 병원에 실려가는 등 질병이 심해져 최근 몇 년 동안은 대외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파리 태생으로 파리정치대학(시앙스포)과 국립행정학교(ENA)에서 공부하고 미국 하버드대에 유학했던 시라크는 엘리트들이 밟는 코스를 그대로 걸어온 전통적인 프랑스 정치인이었다.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이 총리를 맡고 있을 때 개인 비서로 들어가 정치에 입문했다.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과 자크 시라크 총리. 1986년 5월의 모습이다.  로이터 자료사진

 

추진력과 업무 기술이 뛰어나 퐁피두가 “내 불도저”라는 애칭으로 불렀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이후 불도저(Le Bulldozer)라는 단어는 잦은 구설과 에피소드를 양산할 정도로 거침 없고 저돌적이었던 시라크의 스타일을 보여주는 별명이 됐다. 시라크와 접촉하고 대립할 일이 많았던 영국 외교관들이 그를 ‘거두절미하고 포인트로 치고들어간다’고 묘사했다는 일화도 있다.

 

드골주의자였던 퐁피두의 영향을 많이 받은 시라크는 1967년 의회에 진출했다. 우파 정치인으로서 좌파의 아성이던 고향 코레즈 지역에서 예상을 뒤엎고 의원으로 당선돼 돌풍을 일으켰다. 이듬해 프랑스 전역이 ‘68혁명’의 파도에 휩쓸리자 시라크는 학생 시위대와의 ‘휴전 협상’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정치인으로서 초반부 시라크는 ‘꽃길’만 걸었다. 정계에 진출한 지 몇 년 되지 않은 1974년 총리에 취임해 1976년까지 재임했으며 1986~1988년 다시 한 차례 총리를 지냈다.

 

행정관료 이미지가 강했던 시라크는 1977~1995년 파리 시장을 하면서 대중적인 명성을 얻었다.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이 1981년 물러나고 좌파인 프랑수아 미테랑 정부가 들어선 상황에서 시라크는 프랑스 우파를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부상했다.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1999년 5월 러시아의 모스크바를 방문, 크렘린에서 보리스 옐친 대통령을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다.  EPA 자료사진

 

아이러니하게도 시라크는 데스탱에 맞서 우파 대선후보 자리를 노렸으나 역부족이어서 파리 시로 물러났는데, 이것이 그에겐 막강한 발판이 됐던 것이다. 시장 재임 기간 시라크는 노인들과 장애인, 싱글맘을 위한 정책들을 대거 도입하며 이른바 ‘따뜻한 보수주의자’의 면모를 보였다. 하지만 인맥 중심으로 시를 운영해 반대파로부터 “부하들을 거느린 두목 같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95년 대권에 도전한 시라크는 공공부문 감축을 내세운 우파 내 경쟁자를 가리켜 미국식 신자유주의만이 옳다고 믿는 ‘팡세 위니크(하나의 생각)’라고 공격했다. 미국을 따르지 않고 프랑스만의 노선을 걷겠다는 이런 태도 덕에 좌우 양극단을 거부하는 ‘중도파’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결선투표에 진출한 시라크는 52.6%의 지지율로 좌파 후보 리오넬 조스팽을 꺾고 엘리제궁의 주인이 됐다. 하지만 뒤에 조스팽을 총리로 임명해 코아비타시옹(좌우 동거) 내각을 구성하기도 했다.

 

2004년 11월 리비아를 방문해 트리폴리의 ‘바브 아지지아’ 궁전에서 무아마르 카다피와 악수를 하는 시라크. 카다피가 2011년 ‘아랍의 봄’ 혁명을 무력 진압하려 하자 프랑스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군의 주축으로 라살 전투기 등을 보내 리비아를 공습했다.  EPA 자료사진

 

세금 감면과 일자리 창출 등 좌우를 구분하기 힘든 혼합된 정책을 내세웠지만 집권 첫해에는 노동자들의 파업에 내내 시달렸다.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무루로아 환초에서 실시한 핵실험 때문에 환경주의자들과 반핵운동가들, 원주민 단체들로부터도 거센 비난을 받았다.

 

첫 임기는 큰 무리 없이 마쳤지만 인기가 높지도 않았다. 프랑스 경제는 내내 부진했고, 좌파와의 동거를 택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재정 문제로 국방예산도 줄여야 했다. 진짜 시험대에 올랐던 것은 2002년 대선 때였다. 극우파 장-마리 르펜이 사회당 후보를 떨어뜨리고 결선투표에 진출하는 돌풍을 일으킨 것이다. 시라크는 전통 우파 정당 공화당의 이름을 버리고 대중운동연합(UMP)이라는 연합정당을 만들었지만 역부족이었다. 르펜을 막아야 한다는 공감대 속에 이주민 출신 축구스타 지네딘 지단까지 나서고 사회당이 대거 시라크 지지를 선언한 끝에 결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파리 시장 시절인 1985년 11월 시라크가 에이즈 연구기금 마련 자선행사에 참석해 미국 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왼쪽)에게 기념메달을 준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AP 자료사진

 

시라크의 집권 2기는 ‘미국과의 전쟁’으로 점철됐다. 미국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려 하자 유엔 등 국제무대에서 반미·반전 여론을 이끌었다. 시라크는 부시와의 갈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미국과 다른 ‘유럽의 목소리’로 자처했고, 미국 편에 섰던 영국 토니 블레어 정권을 대놓고 비하하기도 했다.

 

국방비를 줄이면서도 아프리카에 남겨둔 군사기지들을 없애는 것은 거부했고, 미국에 맞서고 독일 눈치를 보면서도 아프리카의 프랑스어권 국가들을 규합하며 세계 정치의 주역이 되기 위해 애썼다. 2007년 퇴임했지만 유럽인들은 그를 여전히 ‘프랑스의, 프랑스에 의한, 프랑스를 위한’ 정치인으로 기억한다. 2011년 공금 유용 혐의로 기소돼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는 등 부패 스캔들에 휘말리기도 했다.

 

2009년 출간된 자크 시라크 전 프랑스 대통령의 회고록 <모든 걸음이 목표가 돼야 한다>.  AP자료사진

 

시라크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후임자였던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은 “내 인생의 한 부분이 떠났다”며 애도했다. 오랜 기간 유럽 정치무대에서 함께 활동했던 장-클로드 융커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은 “유럽은 위대한 정치인이자 좋은 친구였던 사람을 잃었다”는 성명을 냈다. 하이코 마스 독일 외교장관은 “그는 이라크 전쟁에 ‘노(no)’라고 말했고, (나치에 협력한) 비시 정권을 거론할 용기가 있었던 위대한 정치인이자 유럽인이었다”고 했다.

 

‘이라크전 반대’ 동지였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시라크의 부인 베르나데트 여사에게 “러시아는 양국 우호관계를 발전시킨 고인의 공로를 기억할 것”이라는 서한을 보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프랑스를 만든 인물”이라고 했고,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도 고인을 애도했다.

 

정치·사회적 갈등으로 나뉘어 있던 프랑스도 모처럼 하나가 됐다. 파리에 있는 시라크 가족의 아파트 앞에는 시민들이 몰려들어 꽃다발을 놓고 있으며, 조문객들이 많아지자 경찰이 바리케이드까지 쳤다고 AP통신 등은 보도했다. 의회도 시라크를 추모하며 1분 동안 묵념을 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오후 8시(현지시간) TV에 방송되는 대국민 애도 연설을 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