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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단스크 역사박물관의 개작된 동영상...폴란드의 과거사 싸움

딸기21 2019. 9. 2. 16:54

1939년 9월 1일 새벽. 독일 전함이 폴란드의 단치히(지금의 그단스크)에 있는 베스테르플라테반도를 공격했습니다. 동시에 폴란드의 소도시 비엘룬에도 독일군 공습이 쏟아졌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후 80년이 지났으나 ‘기억의 전쟁’은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특히 한국과 마찬가지로 주변국의 침략에 고통을 겪었던 폴란드는 안팎에서 벌어지는 역사논쟁의 중심에 서있습니다.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이 1일 새벽(현지시간) 폴란드 비엘룬에서 열린 제2차 세계대전 80주년 추모행사에 참석해 폴란드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사과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비엘룬 AFP연합뉴스

 

1일(현지시간) 폴란드 중부 비엘룬에서 2차 대전 80주년 추모식이 열렸습니다. 80년 전 독일이 공격을 개시한 시간인 오전 4시40분에 시작됐다고 합니다. 추모식에서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은 독일어와 폴란드어로 “독일에 희생된 폴란드인에게 용서를 구한다”고 말했습니다. 2차 대전 기간에 폴란드는 유대인 300만명을 포함해 600만명이 숨지는 피해를 입었지요.

 

추모식에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 등도 참석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허리케인 비상이 걸려 오지 못했습니다. 그단스크에서도 이날 똑같이 추모행사가 열렸습니다.

 

1970년 바르샤바 방문 때 무릎을 꿇고 폴란드인들에게 사죄하는 빌리 브란트 독일 총리. 경향신문 자료사진

 

독일이 폴란드에 사죄한 것은 처음이 아니죠. 1970년 바르샤바에서 무릎을 꿇은 빌리 브란트 당시 독일 총리의 사죄를 비롯해 여러 차례에 걸쳐 사과를 했고 배상도 했습니다. 하지만 유럽의 정치지형도가 복잡해지면서 과거사를 둘러싼 싸움은 다시 가열되고 있습니다.

 

독일은 1990년 폴란드에 전쟁 배상금 1억5000만마르크를 줬으니 법적 책임은 끝났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2015년 집권한 폴란드의 우파 법과정의당(PiS)은 독일의 배상이 충분하지 못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현재 폴란드의 주된 상대는 독일이 아닌 러시아인 것 같습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009년 그단스크의 70주년 추모식에 왔고 2014년 프랑스에서 열린 노르망디 상륙작전 70주년 기념식에도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폴란드는 푸틴을 아예 초청하지도 않았습니다. 2014년 크림반도 병합 뒤 러시아와 유럽의 관계는 급속 냉각됐고, 폴란드는 특히나 러시아를 경계합니다. 푸틴 정권과 법과정의당 정권은 각기 자국 내 극우민족주의를 부추기고 있습니다.

 

러시아 외교부가 1일 트위터에 올린 이미지.   러시아외교부 트위터

 

나치는 소련과 비밀리에 불가침조약을 맺고 나서 일주일 만에 2차 대전을 일으켰습니다. 10년 전 추모식 때 푸틴은 독일과의 불가침조약은 “(소련의) 실수였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비엘룬 행사를 앞두고 러시아 외교부는 “폴란드가 처음에 소련군의 진입을 막은 탓에 전쟁 피해가 커졌다”는 주장을 담은 동영상을 트위터에 올렸습니다. 소셜미디어에서 ‘2차 대전의 진실(#TruthaboutWWII)’라는 이름의 캠페인까지 벌였습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일종의 러시아판 수정주의 역사관”이라고 지적합니다.

 

러시아 외교부는 1일에는 독일과 폴란드의 1934년 불가침조약을 거론하며 독·소 조약을 옹호하는 사진을 트위터에 게재했습니다. 러시아 측은 “지금 서구 여러 국가들은 2차 대전 발발을 놓고 히틀러의 독일과 소련에 비슷하게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며 독·소 불가침조약을 전쟁 원인으로 보는 시각을 비판했습니다.

 

폴란드도 러시아에 비난의 화살을 돌렸습니다. 안드레이 두다 대통령은 추모식 연설에서 소련군이 폴란드군 2만2000명을 처형한 사실과 1940년 소련군이 저지른 ‘카틴 숲 학살사건’ 등을 거론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날 유럽에 제국주의 경향성이 다시 나타나 무력으로 다른 나라 땅을 차지하고 국경을 바꾸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폴란드 그단스크의 2차대전 역사박물관. 사진 역사박물관 웹사이트(muzeum1939.pl)

 

과거사 싸움은 폴란드 안에서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베스테르플라테반도의 2차 대전 추모공원은 과거엔 그단스크 시 정부가 관리했는데 정부가 법원에 소송까지 내면서 중앙정부 관할로 바꿨습니다. 2017년에는 2차대전 역사박물관의 관장을 갈아치웠습니다. “애국적 열정이 부족하고 반폴란드적”이라는 이유를 들었습니다. 

새 관장은 박물관 입구 벽면의 홀로코스트 유대인 희생자 사진들을 없애고, 유대인들을 숨겨줬다가 처형된 폴란드인 가족의 사진으로 바꿨습니다. 

 

가장 큰 논란거리는 관람객들에게 보여주는 4분짜리 동영상입니다. 동영상은 뒷부분에 우크라이나와 시리아의 난민들을 보여주며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이 폴란드 군인들의 영웅적 활동을 그린 컴퓨터그래픽 영상으로 대체됐다는 겁니다.

 

정부는 그단스크에 아예 새 역사박물관을 지을 계획입니다. 그러나 야당 소속인 알렉산드라 둘키에비츠 시장은 불투명한 절차에 반발하고 있다고 현지 방송 TVN24 등은 전했습니다. 2023년 완공될 이 박물관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애국주의 역사 테마파크를 짓겠다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법과정의당은 폴란드의 자유화를 앞당긴 1980년대 말 그단스크의 솔리다르노시치(연대) 노조 운동을 폄하하며 이데올로기 공세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폴란드에서 벌어지는 일들, 어째 우리도 많이 듣던 스토리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