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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탐욕이 만든 죽음, ‘미국판 가습기 살균제 사태’ 존슨&존슨에 6900억원 배상판결

딸기21 2019. 8. 27.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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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오이드는 아편계 진통제 성분이다. 주로 미국에서 암 환자나 수술 후 극심한 통증을 겪는 환자들에게 제한적으로 쓰였다. 그러나 1990년대 말부터 규제가 완화되고 제약사들이 적극 홍보에 나서면서 일반적인 진통제처럼 널리 사용됐다. 특히 오클라호마와 오하이오 주 등에선 약국에서 ‘시간 당 몇 백 건씩’ 처방되는 바람에 남용 문제가 심각했다.

 

그렇게 만든 것은 제약회사들의 마케팅이었다. 존슨앤드존슨의 자회사인 얀센은 오피오이드로 만든 듀로제식, 뉴신타 같은 약품을 팔면서 “모든 고통을 안전하게 효과적으로 줄여준다”고 선전했다. 아편계 진통제라 중독성이 강하다는 사실은 감췄다. 듀로제식과 뉴신타는 한국에서도 판매되는 진통제들이다. 다른 제약회사들도 가담했다. 퍼듀 사는 옥시콘틴을 만들어 팔았고, 이스라엘 제약회사 테바는 선데이라는 이름으로 오피오이드 제품을 판매했다.

 

지난 5월 미국 뉴욕증권거래소 전광판에 표시된 존슨앤드존슨의 로고. 오클라호마주 법원은 26일 이 회사가 아편계 진통제 성분인 오피오이드 남용을 부추겨 대규모 사망·후유증 피해를 낳았다며 7000억원 가까운 돈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뉴욕 EPA연합뉴스

 

결과는 참혹했다. 1990년부터 2017년 사이에 오클라호마에서만 6000명 이상이 숨졌다. 미국 전체로 보면 4만7600명이 오피오이드 남용 때문에 사망한 것으로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집계했다. 진통제 등 약물 남용은 미국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1999년 이후 진통제·헤로인·불법 펜타닐 과용으로 죽은 미국인이 40만 명을 넘는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주 정부가 나섰다. 마이크 헌터 오클라호마 주 법무장관은 2017년 오피오이드 남용을 유발한 존슨앤드존슨과 퍼듀, 테바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퍼듀와 테바가 올초 피해자들에게 2억7000만달러, 8500만달러를 각기 물어주기로 합의하면서 존슨앤드존슨만 피고로 남게 됐다. 헌터 장관은 소장에서 존슨앤드존슨이 오피오이드 유통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진통제 처방을 부추겼을 뿐 아니라, 직접 아편을 재배해 오피오이드를 생산하고 유통시켰다는 것이다. 헌터 장관은 오피오이드 유통량의 60%를 이 회사가 공급했다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사상 최악의 공공보건 위기상황이었다”고 말했다.

 

주 정부는 향후 30년 간 피해자 치료를 위해 175억달러를 배상하라고 요구했다. 2년에 걸친 재판 끝에 클리블랜드법원은 26일(현지시간) 오피오이드 남용 책임을 물어 존슨앤드존슨이 5억7200만달러(약 6937억원)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존슨앤드존슨 측은 “식품의약국(FDA)이 허용한 수준에서 소량의 오피오이드만 사용했다”고 주장했으나, 문제는 약 하나에 들어 있는 오피오이드의 양이 아니라 남용·과용이었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워싱턴포스트는 “약물 후유증에 대해 제약사에 책임을 물은 기념비적인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미국 오클라호마주 클리블랜드 카운티의 노먼에서 열린 ‘오피오이드 남용’ 재판에서 서드 발크먼 판사가 존슨앤드존슨에 거액 배상을 명령하는 판결을 내리고 있다.  노먼 AP연합뉴스

 

이번 사건 판결이나 보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단어는 ‘탐욕’이다. 법원은 “기업의 탐욕이 부른 사태”라고 못박았고, 로이터통신 등 언론들도 ‘기업의 탐욕이 원인이었다’고 지적한다. 건강과 안전을 가장 먼저 생각했어야 할 제약회사들이 돈을 벌기 위해 약물남용을 부추겨 비극을 불렀기 때문이다. 기업과 손잡고 규제와 감시를 게을리한 당국도 도마에 올랐다. 잡지 뉴리퍼블릭은 제약사들의 로비에 넘어간 마약단속국(DEA)이 중독성 약물에 대한 관리감독 책임을 방기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DEA는 2017년 내부고발자의 입을 통해 ‘제약회사들에 장악된’ 실태가 드러난 적 있다.

 

배상액은 주 당국이 요구한 액수에 크게 못 미치지만 미국 전역에 비슷한 소송 2000여건이 계류돼 있는 가운데 나온 첫 판결이라 파장이 클 것으로 보인다. 1998년 2460억달러의 흡연피해 배상을 명령한 ‘담배회사 판결’에 비교하는 이들도 있다. 연방법원은 오피오이드 남용 관련 소송 1850건을 묶어 10월에 오하이오주에서 판결을 한다. 로이터통신 등은 이번 판결이 여기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전했다. 이밖에 40여개 주에서 피해자들이 소송을 준비하고 있지만 아직은 대부분 피고를 특정하지 않은 상태인데, 오클라호마 판결에 따라 존슨앤드존슨이 주범으로 지목될 공산이 크다.

 

133년 역사를 자랑하는 존슨앤드존슨은 최악의 위기를 맞을 판이다. 지난해 매출액만 815억달러에 이르렀던 이 회사에 오클라호마의 배상액은 큰 타격이 아니지만, 배상 규모가 훨씬 더 불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소송을 포기하고 서둘러 합의한 퍼듀는 파산신청을 검토 중이고, 또다른 오피오이드 생산업체 인시스는 이미 법원에 파산신청을 냈다. 존슨앤드존슨은 이번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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