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난지도에 나를 데리고 가주신 목사님이 계셨다. ‘쓰레기마을 사람들’을 본 건 그 때가 처음이었다. 1983년.
그 후로 시간이 많이 흘렀고, 목사님과의 인연은 이어지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기억은 생생하다. 그분 인척이 울엄마와 아는 사이라 얼마 전 소식을 전해 들었다. 여전히 내 이름을 기억하고 계시고, 가끔 신문에 내가 쓴 글도 읽었다고 하셨댄다.
내 책의 에필로그를 쓰면서 난지도의 기억도 짤막하게 적었다. 그러면서 목사님 생각이 났다. 지난 토요일에 36년만에 목사님을 만났다. 늙으셨다. 국민학생이던 내가 쉰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으니. 내 책을 선물해드렸다.
목사님은 그 조그만 개척교회(당시엔 전도사님이셨다)를 만들 무렵에 난지도 빈민들과 함께 하고 있었고, 근육병 장애인들과 함께 하고 있었고, 태권도를 가르치고 있었다고 하셨다. 당시에 난지도엔 따라가봤지만 장애인들과도 함께 하셨던 것은 몰랐다.
몇년 전까지 대학에서 법학을 가르치신 건 이해되지만(법학 전공이시니) 태권도 때문에 같은 대학에서 학생들 생활체육 지도도 하셨다고. 벌써 오래 전에 가라테 국제심판 자격증도 따셨고. “내가 50 될 때까지도 근육장애인 업고 다녔다. 근데 삐끗 하니까 ‘목사님 이제 업지 말아요’ 하더라. 그래서 요샌 가벼운 애들만 안아서 옮겨준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걸 하세요, 여쭸더니 “하나하나 차례로 하면 되지”라고 하셨다. 세상에나.
한 몇년 난지도 다니니까 거기 사람들이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오고. 그러면 가서 의논해주고. 장애인들이랑 한 몇년 같이 하니까 또 그렇게 이어지고. 그렇게 ‘차례로’ 하면 된다는 어마어마한 얘기...를 마치 아무 것도 아닌 듯이 말씀하셨다. 운동은요? 하루 한 시간만 하면 되는데, 라고 또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신다. 그날은 얘기 안 하셨지만 학교에서 퇴직한 뒤에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따신 모양이다.
목사님이 일하신 개척교회는 그 시절 우리 건물 4층에 세들어 있었다. 내가 태어나 자란 집을 허물고 아버지가 빚내어 지은 건물이었다. 혹시 내가 건물주 딸인 걸로 오해하실 분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몇년 못 가 울아부지가 그 작은 건물을 말아드셨고 ^^;; 우리 가족은 그 동네를 떠났다.
며칠전 택시를 타고 우연히 그 동네를 지났다. 역시나, 상전벽해처럼 건물은 헐렸고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우리집 자리엔 상가가 세워져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던 동네, 목사님은 아직도 그 동네에 사신다고 했다. “거기 시민아파트 자리가 공원이 됐어. 산책로도 있고 근사해.” 내가 잊었던 우리 집, “그 건물이 생기고 사라지는 것까지 내가 다 봤다”고 하셨다. 집 옆에 교회를 만들었는데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작은 빌라를 쓰고 있는 것 같고, 소속된 '교단'은 없다고 한다.
헤어지기 전에 목사님께서 쓰신 책을 내게 한권 주셨다. 집에 와서 펼쳐 몇 장을 읽었다. 목사님께 내가 드린, ‘졸저’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그저 자료와 인상들을 모았을 뿐 삶이 담겨 있지 않은 내 책이 너무 부끄러웠다. 반갑고 기뻤고, 돌아서자마자 부끄러웠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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