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수상한 GPS

[구정은의 ‘수상한 GPS’] 베네수엘라도 IMF가 '접수'?

딸기21 2019. 4. 15. 16:56

베네수엘라가 계속 혼돈스럽다. 우고 차베스의 후계자인 니콜라스 마두로는 자신이 여전히 대통령이라 하고, 우파 정치인 후안 과이도는 자신이 의회의 인정을 받은 정당한 지도자라고 주장한다. 국민들은 갈라졌고, 경제는 엉망진창이 됐다. 미국을 비롯한 50여개 나라는 과이도를 ‘승인’했다. 그 밖의 나라들은 마두로를 여전히 지지하거나, 입장을 밝히지 않은 채 사태를 지켜보는 중이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지난 13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세계은행-IMF 국제통화금융위원회(IMFC) 회의를 마친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라가르드 총재는 베네수엘라의 혼란과 관련해, “누가 대통령인지 먼저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AP


 

누가 이길까. 베네수엘라 국민들에겐 어떤 결과가 들이닥칠까. 어쩌면 국민들에게 선택권은 별로 없을 수도 있다. 돈줄을 쥐고 한 국가의 경제·사회를 쥐락펴락하는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 같은 ‘워싱턴 기구’들이 한 나라의 운명마저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멋대로 남의 나라 경제구조를 뒤바꿀 수는 없을지 몰라도, 미국과 글로벌 자본의 이익을 대변해온 워싱턴 기구들이라면 할 수 있다.

 

돈줄 끊은 IMF

 

지난 11일(현지시간) 워싱턴에서 열린 IMF와 세계은행 합동 총회에서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는 “베네수엘라를 돕고 싶어도 도울 수가 없다”면서, 먼저 누가 대통령인지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라가르드 총재는 “회원국들 뜻에 따르겠다”고 했으나, 그러면서도 IMF는 최근 마두로 정부의 돈줄을 끊었다. 지난 10일 IMF는 현금이 바닥난 마두로 정부가 가진 4억달러(약 4500억원)의 특별인출권(SDR)을 제한했다. IMF 회원국은 외환위기를 맞을 경우 특별인출권을 다른 나라에 넘기고 돈을 꺼내갈 수 있는데 이를 막은 것이다.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 시절 만들어진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민병대’ 대원들이 13일(현지시간) 카라카스에서 창립 10주년 기념식을 하고 있다. 의회 승인을 받은 국가수반을 자처하는 우파 정치인 후안 과이도는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 측이 민병대를 동원해 위협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AP


 
IMF는 “베네수엘라 정부가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아야만 모든 거래가 이뤄질 수 있다”고 했다. 마두로 정부를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하기를 거부한 셈이다. 과이도 측은 “특별인출권 싸움에서 우리가 승리했다”며 환영했다. IMF는 지난해 3월에도 한 차례 베네수엘라의 특별인출권을 1억달러 줄였다.
 

베네수엘라의 외환보유고는 90억달러 규모이지만 3분의2 가까이가 금이라 당장 현금이 필요하다. 돈줄을 막으면서 IMF가 내놓은 명분은 단순하다. 누가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인지 확실하지 않고, 따라서 IMF 안에서 누가 그 나라를 대표할 지 알 수 없으므로 자금을 지원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IMF가 특정 국가 정부의 대표성을 인정하고 회원국 지위를 누리게끔 결정하는 절차는 단순하다. IMF 지도부가 회원국들에 요청해서 회원국들이 투표를 해 다수결로 결정하면 된다. IMF는 아직 이런 절차를 밟지 않았으나, 로이터통신이 집계해보니 이미 과이도 측이 IMF 회원국 과반 이상의 지지를 확보한 것으로 나타났다. 투표는 다수결이지만 어차피 미국이 IMF 의결권 16.5%를 갖고 유일하게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나라이니 결과는 정해져 있다.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은 지난 10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에 참석해서 이사국들에게 과이도를 국가수반으로 인정하라고 촉구했다. 
 

지난 6일 선출된 세계은행의 데이비드 맬패스 신임 총재는 “개입할 준비를 하고 있지만 상황이 복잡하다”고 했다. 베네수엘라 경제가 걱정된다면서도 당장 지원하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미주개발은행(IADB)은 지난달 과이도가 임명한 사람을 베네수엘라 대표로 인정했다. 잉글랜드은행은 지난 1월 마두로 정부의 계좌 인출을 막았고,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정부는 베네수엘라 정부 은행계좌의 통제권을 과이도에게 넘겼다.

 

베네수엘라인들이 14일 북동부 타치라의 시몬볼리바르 다리를 건너 이웃한 콜롬비아로 향하고 있다. 경제위기가 심해지면서 콜롬비아 등 인접국들로 넘어가는 베네수엘라인들은 갈수록 늘고 있다. AP 


 
베네수엘라 경제는 무너졌다. 학교들은 문을 닫았고, 관공서는 전기가 안 들어와 일을 못 한다. 중앙은행조차도 최근 수돗물이 끊겨 직원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IMF는 올해 베네수엘라의 실업률이 1996년 내전 직후 보스니아와 비슷한 44.3%에 이를 것이며, 내년이면 일자리 수가 반토막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대로라면 베네수엘라의 실업률은 전시가 아닌 나라로서는 세계 최악을 기록할 것이고, 국가 전체의 경제규모는 4분의 1이 날아간다. IMF는 이를 2014년 내전 당시 리비아의 상황과도 친절하게 비유했다. 미국 칼럼니스트 케네스 라포자는 최근 경제전문지 포브스에 “사회주의가 끝난 뒤 베네수엘라인들에게 필요한 건 IMF의 생활지원”이라는 글을 실었다.

 

‘쇼크 독트린’ 재연될까
 

베네수엘라와 IMF의 관계는 차베스 시절 매우 나빠졌다. 차베스는 제3세계 저개발국들을 망가뜨린 주범으로 지목된 IMF와의 관계를 아예 끊으려고까지 했다. 회원국 탈퇴를 실행에 옮기지 못한 건 투자자들이 빠져나가 일시적인 디폴트(채무불이행)가 올까봐서였다. 
 

IMF와 세계은행, 미국이 주도해온 ‘워싱턴 컨센서스’를 차베스가 극도로 혐오한 데에는 근거가 있다. 1973년 쿠데타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정부가 집권한 뒤 칠레는 주요 산업을 민영화하고 고용안전망과 복지프로그램을 없애고 가격통제를 포기했다. 신자유주의의 정신적 지주인 미국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은 피노체트를 ‘절친’으로 여겼으며 프리드먼의 제자들인 ‘시카고 보이스’가 칠레 경제계를 장악했다. 볼리비아에서도, 아르헨티나에서도, 브라질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정변이나 재난으로 경제가 무너져 혼란에 빠진 나라에 워싱턴 기구들과 외국 자본이 들어가 민영화와 규제완화를 강요하고 이익을 빼내간다. 노동시장도 인플레도 금리도 통제하지 말고 내버려두라는 지침에 나라를 맡기는 순간 사람들의 삶은 무너진다. 이 모든 과정은 시민들이 의식하고 저항할 틈이 없도록 순식간에, ‘충격과 공포’처럼 이뤄져야 한다. 캐나다 저널리스트 나오미 클라인은 이를 ‘쇼크 독트린’이라 부른다. 정권을 잃은 쪽과 잡은 쪽이 좌파이든 우파이든 상관 없다.
 

피노체트의 칠레에서, 레흐 바웬사의 폴란드에서, 넬슨 만델라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허리케인 카트리나 이후 미국 플로리다에서 모두 이런 일이 벌어졌다. 군부의 쿠데타, 공산당 정권의 붕괴, 인종차별의 종식, 자연재난 등 이유는 다양했지만 결과는 비슷했다. 클라인의 분석대로라면 지금 베네수엘라는 쇼크 독트린이 작동할 조건을 충분히 갖췄다. 이런 상황에서 IMF와 세계은행이 들어간다면 다음 수순은 석유산업 민영화, 복지프로그램 해체, 물가·환율 통제의 포기 같은 것들이 될 가능성이 높다.

 

콜롬비아, 파라과이, 칠레를 순방 중인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가운데)이 14일(현지시간) 콜롬비아의 쿠쿠타에서 베네수엘라로 보낼 원조물품 앞에 서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AP

 

당장 아르헨티나에서 이런 일이 반복되고 있다. 중남미 ‘우파정권 시대’를 연 마우리시오 마크리 대통령 취임 뒤 아르헨티나는 IMF가 요구하는 경제정책을 충실히 이행했다. 오는 10월 대선을 앞둔 아르헨티나를 향해 IMF는 익숙한 압박 메시지를 보냈다. 부에노스아이레스타임스는 라가르드 총재가 지난 10일 대선 후보들을 향해 “경제가 바닥을 찍고 올라가려 하는데, 이 시점에서 개혁을 포기하는 건 바보같은 짓”이라 말했다고 보도했다. 

 

중국이라는 변수
 

베네수엘라에 다른 옵션이 있을까. 눈길이 가는 변수가 있다면 중국이다. 중국은 차베스 시절인 2007년부터 지금까지 베네수엘라에 500억달러 이상을 빌려준 것으로 추산된다. 두 나라는 1974년에야 국교를 맺었지만 차베스 시절 부쩍 가까워졌다. 1999년 이전까지는 상호 교역규모가 5억달러에도 못 미쳤지만 2009년에는 75억달러로 늘었다. 베네수엘라는 중국이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투자를 많이 한 나라이기도 하다. 
 

중국은 러시아와 함께 마두로 정부를 지지하고 있고, 경제적 지원도 계속하고 있다. IMF는 중국이 베네수엘라를 비롯해 국고가 바닥난 국가들에 계속 돈을 내주는 바람에 국제 금융시스템이 위기를 맞고 있다며 맹비난한다. 미주개발은행은 중국이 과이도 측 대표단 참석을 불허하자 지난달 중국에서 열릴 예정이던 48개 회원국 회의를 취소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12~14일 칠레, 파라과이, 페루를 순방했다. 미국 분석가 로버타 브라가는 “이번 순방의 우선순위는 과이도를 지지하는 연대를 강화하는 것”이라고 로이터에 말했다. 중남미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차단하려는 목적도 있다고 로이터는 분석했다. 

 

베네수엘라 국가수반을 자처하는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이 14일(현지시간) 카리브해에 면한 북부 푼토피호에서 열린 집회에 나와 지지자들의 손을 잡고 있다. 로이터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중국, 러시아, 이란을 향해 “베네수엘라 사회주의 정부를 옹호하는 걸 멈추고 떠나라”고 요구했다. 볼턴은 마두로 편에 선 세 나라를 겨냥해, 남북아메리카에서 유럽의 간섭을 거부한 1823년의 먼로 독트린까지 거론했다. 미군 남부사령관은 “중국이 베네수엘라에 교두보를 만들려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마자오쉬 유엔 주재 중국 대사는 “중국은 베네수엘라를 비롯해 세계 여러 나라들과 우호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일축했다.
 

베네수엘라와 차비스모(차베스주의)는 2000년대 이후 10여년 동안 중남미를 휩쓴 좌파 바람의 핵심이었다. 자원을 국가가 손에 쥐고 그 이익으로 복지를 강화하고자 했던 그들의 정책은 고삐 풀린 자본주의에 맞선 반격이었다. 하지만 반격의 동력 중 상당부분은 이라크 전쟁 이후 치솟은 기름값에서 나왔다. 유가가 떨어지고 차베스주의의 마법이 풀리자 미국과 글로벌 자본이 재반격에 나섰고, 베네수엘라는 그 전쟁터가 됐다. IMF와 중국 사이, ‘21세기 사회주의’의 실험장이었던 베네수엘라는 어떤 길을 걸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