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정부가 에어프랑스-KLM 주식을 매입해 프랑스 정부와 비슷한 14%의 지분을 보유하게 됐다고 최근 발표했다. 프랑스-네덜란드 기업이 합쳐져 탄생한 이 거대 항공회사의 미래를 놓고, 양국 간 ‘항공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면에는 프랑스 기업의 경쟁력에 대한 네덜란드의 불신, 프랑스의 ‘오만함’에 대한 불만이 깔려 있다.
브뤼노 르메르 프랑스 재무장관(왼쪽)과 봅케 획스트라 네덜란드 재무장관(오른쪽)이 지난 1일(현지시간) 파리에서 만나 에어프랑스-KLM 문제에 대해 논의한 뒤 공동 기자회견장에 나와 악수를 하려 하고 있다. 지난달 말 네덜란드 정부는 양국 합작기업인 이 항공사의 지분을 매입해 프랑스와 비슷한 14%로 늘렸다고 발표했다. 파리 _ AP연합뉴스
기습당한 프랑스
네덜란드 정부는 지난달 26일 공식 성명을 내고 “에어프랑스-KLM 지분을 14% 갖게 됐으며 이는 시가 7억4400만유로 어치에 해당된다”고 밝혔다. 2004년 프랑스 항공회사 에어프랑스와 네덜란드의 KLM이 합병한 이후 15년이 됐지만 프랑스의 지분은 14.3%인데 반해, 그동안 네덜란드 지분은 한참 못 미쳤다. 네덜란드 정부가 보유해온 것은 KML 지분 5.92%에 불과했다. 그룹 전체로 치면 1% 대에 그쳤는데 12.68%를 더 사들여 프랑스에 근접하게 만든 것이다.
2017년 기준으로 에어프랑스-KLM 최대 주주는 프랑스 정부이고, 중국동방항공과 미국 델타항공이 각각 8.8%로 뒤를 잇고 있다. 하지만 이제 암스테르담이 2대 주주로 올라섰다. 네덜란드의 봅케 획스트라 재무장관은 “이번 지분매입을 통해, 우리 국민들의 이해에 맞는 방향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고 했다.
프랑스 정부는 뒤통수를 맞은 꼴이 됐다. 에마누엘 마크롱 대통령은 네덜란드의 발표가 나오자마자 기자회견을 열고 “(네덜란드의 결정을) 전혀 알지 못했고 사후에 설명을 듣지도 못했다”면서 “네덜란드 정부는 의도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비난했다. 프랑스 언론 르몽드는 주식시장에서 ‘전격전(blitzkrieg)’이 벌어졌다고 썼다. AFP통신은 프랑스 정부가 이번 일을 “적대적 지분 확대”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프랑스가 네덜란드를 기습공격한 1672년 전쟁의 설욕전에 비유했다.
프랑스 파리 근교 라데팡스의 에어프랑스-KLM 건물에 붙어 있는 회사 로고. 파리 _ 로이터연합뉴스
에어프랑스는 프랑스의 항공회사 에어오리앙, 에어위니옹 등이 합쳐져 1933년 출범했다. 네덜란드어로 ‘왕립항공회사’의 약자인 KLM은 1919년 설립돼 올해로 100년을 맞는다. 현존하는 세계 항공사들 중 역사가 가장 길다. 합병을 했어도 두 회사의 경영은 별개로 이뤄진다. 에어프랑스는 파리 샤를드골 공항을 근거지로 삼고 있고, 그룹 본사도 여기에 있다. KLM은 암스테르담 스키폴공항을 중심으로 항공노선들을 운영한다.
국왕이 조종한 비행기
네덜란드가 갑자기 치고나온 이유를 놓고 해석이 분분했다. 네덜란드 정부가 말한 ‘자국의 이익 보호’ 중에 가장 먼저 거론되는 것은 고용안정이다. 획스트라 장관은 의회에 보낸 서한에서 “지분을 늘리는 것이 고용안정과 스키폴공항 투자 유지를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에어프랑스-KLM의 미래에 스키폴 공항 직원 10만 명의 일자리가 걸려 있다고 했다. 스키폴은 영국 런던 히드로, 파리 샤를드골에 이어 유럽에서 3번째로 이용자가 많은 공항이다.
에어프랑스와 KLM의 실적 차이도 중요한 요인으로 거론된다. 한 마디로 KLM이 훨씬 많이 번다. 지난해 1월 장-마르크 자네야크 당시 그룹 최고경영자(CEO)는 2017년 실적을 프랑스 상원에 보고하면서 “연간 영업이익이 1년 만에 6%나 뛰어올랐다”고 자찬했다. 에어프랑스의 이익은 4% 늘었는데, KLM 이익이 9% 증가한 덕이 컸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 영국항공은 10~12%, 독일 루프트한자는 9%의 성장률을 보이고 있었다.
지난해에는 격차가 더 커졌다. 에어프랑스 직원은 8만4000명인데, KLM 직원은 3만5000명으로 절반도 안 된다. 지난해 에어프랑스는 직원 파업으로 3억3500만유로의 손실을 봤고 연간 매출이 2억6600만유로에 그쳤다. KLM의 매출액은 10억700만유로였다. 네덜란드로선 경쟁력 떨어지는 프랑스 파트너 때문에 손해를 보고 있다고 생각할 만하다. 획스트라 장관이 “더 많이 벌고 더 경쟁력 있게 만들겠다”고 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에어프랑스는 프랑스인들이 보기에도 방만한 기업일 지 모르지만, 네덜란드인들에게 KLM은 자랑거리다. 2017년 5월, 항공기 조종사 면허를 가진 빌럼 알렉산데르 네덜란드 국왕이 “20년 넘게 KLM 여객기 조종사로 몰래 일해왔다”는 사실을 한 인터뷰에서 공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프랑스 항공사 에어프랑스와 네덜란드 항공사 KLM은 2004년 합병했으나 여전히 경영은 별개로 이뤄진다. 에어프랑스-KLM 웹사이트
그런 KLM이 그룹 내에서 대접을 못 받고 있다는 서운한 감정은 지난해 CEO 선임을 둘러싼 갈등으로 가시화됐다. 그룹 CEO는 프랑스인 자네야크가 맡았다가, 지난해 9월 캐나다 출신인 벤 스미스로 교체됐다. 암스테르담에서 보스를 내놓을 차례라고 봤던 KLM의 불만이 터져나왔다. 신임 CEO 스미스가 KLM 경영에까지 관여하려 하자, 당초 그룹 수장 자리를 노렸던 피어터 엘베르스 KLM 경영자는 거세게 반발했다. 지난달 엘베르스가 아예 쫓겨날 지도 모른다는 보도가 나오자 KLM 직원 2만5000명이 연임을 요구하며 서명운동을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르노-닛산의 교훈?
스미스 CEO는 한술 더떠 “에어프랑스가 그룹의 프리미엄 항공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KLM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네덜란드 정부로 확산됐다. 획스트라 장관은 지난달 19일 암스테르담을 찾아온 스미스에게 ‘우려’를 전달했다. 뒤이어 나온 네덜란드의 행동이 지분 확대였다. 획스트라 장관은 “우리가 테이블에 앉을 수 있게 보장해줄 조치”라고 했다.
‘르노-닛산의 교훈’을 거론하는 이들도 있다. 프랑스 자동차회사 르노와 일본 닛산은 1999년 ‘전략적 제휴’를 했다. 제휴 이래 닛산의 이익이 더 많았고 시가총액도 르노의 두 배였지만 주도권은 늘 르노가 쥐었다. 닛산 이사회에는 르노 측 이사가 참석하지만 르노 이사회에는 닛산 쪽 이사가 없다. 르노는 닛산 지분 43.4%를 갖고 표결권을 행사하지만 닛산이 가진 르노 지분 15%에는 표결권이 없다. 르노 지분을 똑같이 15% 가진 프랑스 정부는 르노와 닛산 양쪽에 입김을 행사한다.
심지어 프랑스 정부는 2014년 ‘플로랑주법’이라는 걸 만들어서 표결권을 2배로 끌어올렸다. 시장의 룰을 멋대로 바꾼 것이다. 이듬해 주주들이 표결로 이 법의 적용을 막았다. 2017년 마크롱 대통령이 취임한 뒤 프랑스 정부는 르노 주식 12억유로 어치를 사들여 지분을 늘렸고 플로랑주법을 다시 강요했다. 마크롱 정부는 네덜란드를 비난하지만 프랑스가 르노-닛산에서 한 행동은 “기업에 대한 정부의 공습”이라 불릴 정도였다.
닛산이 거세게 반발하자 마크롱 정부는 카를로스 곤 당시 회장에게 ‘연임’이라는 당근을 줘서 뒷거래를 하려 했다. 곤 전 회장은 르노와 닛산을 아예 합병하려다 실패한 뒤 결국 그룹을 떠났다. 또 다른 일본 기업 미쓰비시가 전략적 제휴에 합세하면서 상황은 봉합되는 듯했다. 하지만 마크롱 정부는 합병을 계속 추진하면서, 닛산 경영자 선임에까지 참견하려 했다. 지난해말 곤 전 회장이 일본에서 세금 문제로 체포된 배경에는 이런 갈등이 있었다.
“마크롱 스타일의 역습”
네덜란드의 움직임을 ‘프랑스의 오만에 대한 반격’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마크롱 정부가 들어선 뒤 프랑스는 르노-닛산 문제에서처럼 기업 경영에까지 끼어들며 부당한 방식으로 이익을 챙겨왔다는 것이다.
1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브뤼노 르메르 프랑스 재무장관(맨 왼쪽)과 봅케 획스트라 네덜란드 재무장관(맨 오른쪽) 등 양국 각료들이 만나 에어프랑스-KLM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양국은 이 만남에서 항공사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4개월 간의 연구’를 진행한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파리 _ AP연합뉴스
블룸버그통신에는 지난달 28일 “마크롱 스타일의 자본주의가 유럽을 휩쓸고 있다”는 칼럼이 실렸다. 경제분석가 리오넬 로랑은 이 칼럼에서 “프랑스의 행보는 실용적이고 리버럴하고 재정 문제에서 보수적인 네덜란드마저 ‘프랑스식 개입’으로 선회하게끔 만들었다”고 썼다. “르노-닛산 사태에서 일본이 그랬듯 에어프랑스-KLM 문제에서 네덜란드의 분노가 커질 수밖에 없었으니 네덜란드가 직접 팔 걷고 나선 것은 전혀 이상할 게 없다”고 했다. 다국적 기업 안에서 유리한 위치를 발판 삼아 이익을 다 가져가려 하는 프랑스의 ‘승자독식’ 논리라고도 꼬집었다. 네덜란드는 그저 이를 본떴을 뿐이라는 얘기다.
파문이 커지자 네덜란드와 프랑스의 재무장관이 1일 파리에서 만났다. 회담 뒤 프랑스의 브뤼노 르메르 장관은 “솔직하고 투명한 대화를 했다”면서 에어프랑스-KLM의 경쟁력을 높이기로 했다고 말했다. 두 정부는 앞으로 4개월 간 이 회사의 소유구조와 관리시스템을 개선할 방안을 논의하기로 했다. 네덜란드는 특히 에어프랑스의 비용 절감과 스키폴 공항의 경영 안정을 강조한 것으로 전해졌다.
일단 두 나라가 화해 제스처를 취했지만, 자국 내 노동자들의 저항에 부딪치고 있는 마크롱 정부가 네덜란드의 요구에 맞춰 에어프랑스의 구조조정에 나서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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