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데리. 영국령 북아일랜드에서 벨파스트 다음으로 큰 도시다. 이웃한 아일랜드까지 포함하면 아일랜드 섬에서 네번째로 주민이 많은 도시다. 예전 이름은 ‘도이레’이고, 흔히 사람들은 ‘데리’라 부른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숱한 지명들처럼 영국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앵글로화’한 이름이다.
영국에 속한 북아일랜드의 런던데리(데리)에서 지난달 25일 시민들이 영국의 억압통치와 분리주의 폭력투쟁으로 얼룩졌던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며 평화를 촉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앞서 1월 19일 데리에서는 분리주의자의 소행으로 보이는 차량 폭발이 일어났다. 런던데리 _ 로이터연합뉴스
아일랜드 말로 도이레는 ‘떡갈나무 숲’을 가리키는 것이었지만 데리로 바뀌었고 1613년 영국 왕 제임스1세 때 그 앞에 ‘런던’이 붙었다. 당시 데리를 점령하고 식민사업을 할 때 런던의 큰손들이 돈을 댔기 때문이라고 한다.
데리냐 런던데리냐
인구 8만5000명의 소도시 데리는 이름에서부터 곡절이 많았다. 시의 ‘헌장’에서 공식적으로 도시명을 런던데리라 적시했지만 400년이 지나도록 이곳 사람들은 해협 건너에서 온 접두어에 대한 불만을 간직하고 있다. 1984년 시의회가 이름을 ‘데리 시의회’로 바꿨다가 논란이 일었고, 오랜 법정 공방 끝에 2007년 영국 고등법원은 “런던데리가 공식 명칭”이라 판결했다. 하지만 이후의 여론조사에서도 주민의 75%를 차지하는 가톨릭 교도들은 ‘이름을 데리로 바꿔야 한다’고 응답했다. 시의회는 2015년에도 ‘데리’로 바꾸려고 다시 시도했지만 아직까지 딱히 원했던 결과를 얻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주민들은 자기네 도시를 데리라고 부르지만 영국 정부의 공식 문서에서는 언제나 런던데리다.
데리는 17세기에 지어진 성벽으로 유명하다. 당시 영국이 주민들을 이곳에 이주시키면서 ‘원주민’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지은 1.6km 길이의 성벽이 남아 있다.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지는 오래됐지만 영국의 식민지가 된 이후 계획도시가 만들어지면서 오늘날의 도시 틀이 형성됐다.
17세기 초반 이후 도시의 역사는 영국과의 갈등으로 점철돼 있다. 게일어를 쓰는 원주민들이 몇 차례나 반란을 일으켰으나 모두 실패했다. 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19년부터 2년 동안은 아일랜드 독립전쟁이 벌어졌다. 아일랜드공화국군(IRA)과 영국군의 격전은 1921년 협정으로 끝났다. 섬의 남쪽은 현재의 아일랜드공화국으로 독립했고 북쪽은 영국령 북아일랜드가 됐다. 섬이 나뉘면서 데리는 갑자기 북아일랜드의 변경도시가 돼버렸다.
북아일랜드의 런던데리에서는 1972년 1월 30일 반영국 시위를 벌이던 시민들이 영국군 공수부대에 학살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블러디 선데이’로 불리는 이 참사 뒤 건물들이 불타고 있는 모습이다. AP자료사진
2차 세계대전 때에는 영국과 캐나다, 미국 해군이 데리에 주둔했다. 도시가 다시 분쟁에 휩싸인 것은 1970년대부터다. 영국에서 벗어나 아일랜드에 속하길 바라는 가톨릭 분리주의 진영이 영국에 맞서 격렬한 무장투쟁을 벌였다. ‘IRA 테러’로 알려진 공격과 시위가 잇따랐다. 대표적인 사건이 ‘블러디 선데이(피의 일요일)’로 불리는 데리 학살이다.
영국판 광주학살 ‘블러디 선데이’
1972년 1월 30일, 민권운동가들과 시민들이 데리에서 영국에 반대하는 시위를 했다. 영국군 공수부대가 낙하산을 타고 내려와 시위대를 덮쳤다. 달아나던 시민들 몇 명은 등에 총을 맞고 쓰러졌고, 민권운동가들은 조준사격을 당한 듯 총탄세례를 받았다. 14명이 희생됐다. 북아일랜드인들은 거세게 항의했지만 군은 “정당한 진압작전이었다”고 했고, 영국 정부는 군인들에게 훈장까지 줬다. 군은 “당시 시위현장에 있던 분리운동 지도자 마틴 맥기네스가 반자동 소총을 들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두 달 뒤 영국 정부는 북아일랜드 자치의회를 없애고 직접 통치에 들어갔다. 이 사건은 분리운동 진영의 저항을 격화시킨 계기가 됐다.
35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북아일랜드와 영국의 분쟁은 1998년 ‘굿프라이데이 협정’으로 일단 종식됐다. IRA는 무기를 내려놨고 분리주의 정당 신페인은 온건노선으로 바꾼 뒤 의회로 들어갔다. 평화협정 뒤 북아일랜드 측의 요구에 따라 진상조사위원회가 꾸려졌다. 진상 규명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조사위는 2004년까지 관련자 증언 등을 검토했고, 2010년 조사위원장 마크 사빌의 이름이 붙은 ‘사빌 보고서’가 공개됐다. 영국군은 경고도 없이 총을 난사했으며 맥기네스가 무장을 하고 있었다는 주장은 거짓으로 판명됐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학살에 대해 사과했으나 책임자 처벌이나 피해자 보상 같은 것은 없었다.
기구한 역사를 지닌 데리는 이제 다시 기로에 섰다. 영국이 브렉시트를 하게 되면 이제는 ‘유럽 너머의 변경’이 될 판이다. 유럽연합(EU)의 동쪽에는 회원국들과 비회원국을 가르는 경계가 있지만 대서양과 만나는 서쪽에는 육상의 국경이 없다. 영국이 EU에서 탈퇴하면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의 경계선은 EU의 유일한 서쪽 국경이 된다. 데리 외곽의 도네걸 카운티가 그 경계선이다.
‘유럽 너머 변경’이 될 소도시
EU 주민들이 자유로이 오갈수 있게 한 1985년의 솅겐 협정 덕에 EU 내의 국경들은 의미가 없어졌다. 회원국 국민들은 비자도 검문검색도 없이 각국을 드나든다. 하지만 역내와 역외를 가르는 경계는 엄존한다. 솅겐 협정이 적용되는 사람들과 아닌 사람들을 구분하는 국경시스템을 흔히 유럽에선 ‘솅겐 보더’라 부른다. 프론텍스(FRONTEX)라는 공동 국경관리기구가 EU 출입국을 관리한다. 지중해에서 이탈리아로 들어오는 난민선을 막고, 옛소련과 아시아 쪽으로부터 유입되는 이주민을 규제한다. 프론텍스의 ‘유럽국경경비팀’이 솅겐 보더에 파견돼 회원국 정부와 함께 출입국자의 신원을 확인하고 사람과 물품의 이동을 통제한다.
지난달 20일 북아일랜드 런던데리의 경찰들이 전날 폭발한 차량을 감식하고 있다. 런던데리 _ AFP연합뉴스
영국 가디언에는 지난 12일 데리를 비롯한 북아일랜드 사람들의 브렉시트 불안감을 전하는 기사가 실렸다. 나라가 다르다 해도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사이에 장벽이나 철조망이나 검문소 같은 물리적이고 가시적인 국경은 없다. “차를 몰고 가다 보면 내비게이션에 국가 이름이 바뀌어 나올 뿐”이다.
영국인들에게는 브렉시트가 시끄럽고 지겨운 뉴스거리이지만 데리 사람들에겐 과거의 분쟁과 상처를 상기시키는 사건이다. 브렉시트가 가시화되자 데리 시내에는 ‘통합된 아일랜드’라는 글귀가 적힌 포스터가 나붙고, 여전히 아일랜드에 동질감을 느끼는 주민들의 걱정 섞인 소리들이 나온다고 한다. 100년 전의 독립전쟁 때 북아일랜드에 귀속된 6개 주를 “아일랜드로 돌려달라”는 구호도 들린다고 가디언은 적었다.
지난해 11월 EU와 영국은 일단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사이에 물리적 방벽을 세우는 ‘하드 보더’는 피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영국은 EU와의 결별을 어떻게 진행할 지 아직도 구체적인 절차를 정하지 못했다. 브렉시트 국민투표 뒤 2년 가까이 돼가지만 데리를 에워싼 불확실성은 줄어들기는커녕 커져만 간다. BBC방송은 두 지역 간의 국경관리는 첨단전자시스템 등을 활용한 ‘기술적 해법’을 통해 이뤄질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든 일상 생활에서든 아일랜드와 밀접히 엮인 북아일랜드 사람들은 브렉시트가 던져줄 과세 충격을 비롯한 온갖 타격을 몸으로 받아야 하는 처지다.
“역사가 반복되고 있다”
데리 경제는 오랫동안 저임금 노동을 바탕으로 한 섬유산업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아시아 등지로 섬유산업이 이전해가고 1990년대 이후 새로운 경제활력을 모색하면서 도시 한 구역인 스프링타운에 작은 산업단지가 지어졌다. 미국 무기회사 레이시온, 역시 미국 기업인 인비스타, 인도의 퍼스트 소스와 독일의 아른츠벨팅, 영국의 홈론 같은 기업들이 들어와 있다.
브렉시트의 향방에 따라 데리의 ‘작지만 글로벌화한’ 경제도 휘청일 가능성이 높다. 데리 상공회의소장 브라이언 맥그라스는 BBC방송에서 “브렉시트라는 암적인 존재를 빼놓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했다. 올해 창립 90주년을 맞는 축구클럽 데리시티FC는 영국 축구리그에 계속 남겠다고 최근 밝혔지만, 관세와 국경이 축구 리그처럼 유지될 리는 없다.
지난 1월 19일 데리 도심에서 차량이 폭발했다. 다치거나 숨진 사람은 없었지만 분리주의 폭력과 영국의 억압이라는 악순환이 다시 시작되는 것 아니냐는 공포가 휩쓸었다. 2010년 타계한 영국 역사학자 토니 주트는 EU가 확장되는 것을 보면서 “지리가 역사를 이겼다”고 썼다. ‘하나의 유럽’이라는 꿈과 공동시장의 경제적 매력이 유럽 곳곳에서 역사의 상처를 압도하는 구심력을 발휘했다는 것이었다.
북아일랜드의 격렬했던 분리독립 투쟁을 영국인들은 ‘골칫거리(Troubles)’라고 불렀다. 하지만 영국이야말로 북아일랜드인들의 골칫거리다. 가디언이 최근 인터뷰한 데리의 19살 청년 제이슨 피넌은 1998년의 평화협정을 거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잉글랜드가 내린 결정에 우리는 질질 끌려갔다. 이번에도 아일랜드의 역사가 반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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