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아메리카vs아메리카

‘따뜻한 사회’를 꿈꾼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 타계  

딸기21 2016. 6. 30. 17:31
728x90

‘미래학자’라는 직업은 그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나 다름없다.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통해 미래의 흐름을 읽고, 세계가 안고 있는 문제를 보며 미래 세대를 위한 답을 찾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지난 27일(현지시간) 세상을 떠난 앨빈 토플러는 반세기를 앞서간 석학이자 ‘인류의 따뜻한 미래’를 위해 치열하게 고민했던 인물이었다. 블룸버그통신 등 미국 언론들은 <퓨쳐 쇼크>, <제3의 물결> 등의 저작으로 세계에 영감을 던진 토플러가 로스앤젤레스의 자택에서 87세로 타계했다고 29일 보도했다.

 

토플러는 잘 알려진 대로 정보기술(IT) 혁명과 디지털 시대를 예고한 저술가이자 미래학자다. 한국과도 인연이 깊었다. 1985년부터 2008년까지 10번이나 방한했고, 1998년에는 김대중 대통령과 청와대에서 만나 외환위기를 극복할 방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2001년에는 한국 정부의 의뢰를 받아 ‘21세기 한국비전’ 보고서를 쓰면서 한국이 ‘굴뚝 경제’에 치우친 산업화 모델에서 벗어나 생명공학·통보통신 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조언했다.



1928년 뉴욕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뉴욕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면서 평생의 동반자이자 학문적 동지가 된 애들레이드 패럴을 만났다. 하이디 토플러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패럴은 그 자신 토플러와 함께 여러 저작을 쓴 미래학자이기도 하다. 


토플러의 통찰력은 유명하지만, 그 통찰력을 얻기 위해 대학 졸업 후 스스로 블루컬러 노동자가 돼 공장에서 일을 했다는 사실은 그만큼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앨빈과 하이디 토플러는 결혼 뒤 용접공과 기계수리공, 알루미늄 주조공장 직원으로 5년간 일하며 공부를 계속했다. 공장에서의 경험은 토플러의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출발점이었다. 하이디가 학교로 돌아가 경영학과 행동과학 연구를 하는 사이에, 노조 단체가 지원하는 신문사에 일자리를 얻은 토플러는 워싱턴 주재기자로 경력을 쌓았다. 그러다가 펜실베이니아 지역 일간지로 자리를 옮겨 백악관과 의회 출입기자로 일했다. 뉴욕으로 돌아간 토플러는 경제전문지 포춘의 노동분야 칼럼니스트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토플러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준 것은 IBM에서의 경험이었다. 그는 이 회사를 위해 컴퓨터가 사회와 조직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게 됐고, 아직 맹아에 불과했던 인공지능(AI)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었다. 그후 토플러는 제록스와 AT&T 등 굴지의 기업들로부터 초청받아 정보기술이 가져올 혁명적인 변화를 분석하고 자문하는 ‘구루(정신적 스승)’로 명성을 얻었다. 

 

“미래의 문맹은 글자를 읽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을 뜻하게 될 것이다.” 토플러는 21세기가 되면 군사력 같은 하드웨어가 아니라 새로운 기술이 확산, 새로운 종류의 자본주의가 지배할 것이라고 봤다. 아직은 세계화가 가져올 충격에 대해 세상이 눈뜨기 전, 그는 세계에서 벌어지는 파편적인 일들을 가지고 지구적인 흐름을 읽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줬다. 1980년 펴낸 <제3의 물결>에서 그는 농업혁명, 산업혁명에 이어 정보기술 혁명에 따른 ‘탈산업혁명’의 물결을 예고했다. 


그러나 토플러를 흔한 정보기술 전문가나 미래학 연구가들과 구분지은 것은 정보기술 자체보다는 그것이 가져올 사회적 변화와 사람들의 반응에 천착했다는 점이었다. 정보기술이 아무리 세상을 바꾼다 해도 동정심을 가지고 노인들을 돌보는 따뜻한 사람들은 언제나 필요하며, 사회가 요구하는 것은 사람들의 인지적 능력만이 아니라 감성적인 능력도 필요로 할 것이라고 했다. “통계와 컴퓨터만 가지고 사회를 운영할 수는 없다.” 

 

그의 관심은 기술을 넘어 사회 전반으로 향했고, 그의 책들은 대중적으로도 선풍을 일으켰다. ‘제3의 물결’이나 ‘테크노 혁명’같은 말들은 유행어가 됐다. 중국의 자오쯔양 전 총리,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등도 그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미래를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묘사한다는 비판도 많았다. 조직이론가 리처드 롱먼은 토플러가 온갖 잡동사니 정보들을 뒤섞어 큰 흐름인 양 주장한다고 비판했다. 여러 저서가 히트를 쳤지만, 정작 토플러의 문체는 산만하고 치밀하지 못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플러가 시대의 흐름을 먼저 읽은 인물이었다는 평에는 변함이 없다. 뉴욕타임스는 “그는 낙관적이었으며, 노동이나 원자재가 아닌 지식이 발전된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적 원천이 될 것임을 누구보다 먼저 내다본 인물 중 하나였다”고 평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