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시간의 목소리'

딸기21 2015. 7. 9.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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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면 아베우 지 알렝카르는 금지된 임무를 수행했다. 브라질리아의 한 사무실에 숨어서 매일 밤 안보 관련 군사 기밀 문서를 복사했다. 고문과 암살 기록이 담긴 보고서와 조서 카드, 서류 파일이었다. 

3년간 몰래 일한 끝에 아베우는 백만 쪽 분량을 복사했다. 문서는 당시에 브라질 전체의 삶과 기적 위에 군림하는 절대 권력의 마지막 시기를 보내고 있던 독재의 실체를 거의 완벽히 보여 주었다.

어느 날 밤 아베우는 군사 문서를 펼치다가 편지 한 통을 발견했다. 15년 전에 쓰인 편지였지만, 편지에 찍힌 여자의 입술 자국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이후로 그는 많은 편지를 발견했다. 각각의 편지는 주소지에 도착하지 않은 봉투와 함께 있었다. 그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미 오랜 세월이 흐른 뒤였다. 잊힌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이 이제는존재하지 않는 장소와 사람들 앞으로 보낸 그 메시지를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죽은 글자였다. 그러나 편지를 읽었을 때 아베우는 자신이 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느꼈다. 그는 그 말들을 문서보관소의 감옥으로 돌려보낼 수 없었고, 편지지를 찢어 그 말들을 살해할 수도 없었다.

매일 밤 작업이 끝나면, 아베우는 발견한 편지를 봉투에 담아 새 우표를 붙인 다음 우체통에 넣었다. 


(20쪽, 잃어버린 말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시간의 목소리>(김현균 옮김. 후마니타스)를 읽었다. 이런 책은 한번에 읽는 게 아니라, 조금씩 조금씩 아껴가며 책장을 넘겨야 제 맛이다. 뜸 들이고 숨 고르며, 인생을 돌고 돌아 온 작가가 건네는 삶과 세상의 단면들, 전설과 민담과 자연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몇몇 이야기에 따르면, 생명의 나무는 거꾸로 자란다. 몸통과 가지는 아래쪽을 향하고 뿌리는 위쪽으로 자란다. 우듬지는 땅으로 가라앉고 뿌리들은 하늘을 바라본다. 나무는 열매가 아니라 기원을 제공한다. 가장 내밀한 것과 가장 연약한 것을 땅속에 감추지 않으며 위험을 무릅쓰고 그것들을 악천후에 드러낸다. 맨살의 뿌리를 세상 풍파에 건네준다.

"그게 삶이다." 생명의 나무가 말한다.


(110쪽, 알몸을 드러낸 영혼)


책은 짧은 단편들로 이뤄져 있다. 한 페이지에 글자가 몇 줄 안 된다. 하지만 그 안에 삶의 노래가 있고, 무엇보다 '라틴아메리카의 소리'가 살아있다. 말 그대로 시간의 목소리다. 어떤 것은 고문과 살해와 핍박을 당하면서도 억겁을 살아온 민초의 소리이고 어떤 것은 '거꾸로된 세상'에 대한 신랄한 풍자다. 갈레아노답다. 축구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것도 그렇다. 마라도나의 탄생신화라니. 너무나도 갈레아노답지 않은가. 그 모든 결들이 모여 라틴아메리카를 만들어낸 것을 생각하면 말이다.


베라는 학교를 빠지고 온종일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해가 질 무렵 그녀는 아버지 앞으로 편지를 썼다. 베라의 아버지는 많이 편찮으셔서 병원에 계셨다. 그녀는 이렇게 썼다.

"아빠, 자신을 사랑하세요, 자신을 돌보세요, 자신을 지키세요, 응석을 부려요, 자신을 안쓰럽게 여기세요, 자신을 사랑하세요, 자신을 아끼세요, 즐기며 사세요, 아빠, 사랑해요, 아빠를 돌봐드릴게요, 아빠를 지켜드릴게요, 아빠의 응석을 받아드릴게요, 아빠를 안쓰럽게 여길게요, 아빠를 사랑할게요, 아빠를 즐겁게 해드릴게요."

엑토르 카르네발레는 며칠을 더 버텼다. 그러고는 베개 밑에 딸의 편지를 두고 잠을 자다 세상을 떠났다.


(39쪽, 아버지)


동틀 무렵, 도냐 토타는 라누스 지구의 한 병원에 도착했다. 그녀는 뱃속에 사내아이를 품고 있었다. 병원 입구에서 그녀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브로치 모양의 별 하나를 발견했다. 

한쪽은 반짝였고 다른 한쪽은 그렇지 않았다. 별이 땅에 떨어져 흙 속에 처박힐 때면 언제나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한쪽은 은이어서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며 눈부시게 반짝이지만, 다른 한쪽은 단지 양철일 뿐이다. 

분만을 하는 동안 도냐 토타는 은과 양철로 된 그 별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신생아의 이름은 디에고 아르만도 마라도나였다. 


(43쪽, 분만)


짧은 글들은 남미 역사의 어두운 과거를 들춰낸다. 사실 남미 대부분의 나라가 '더러운 전쟁' 류의 과거를 안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그의 스승은 예루살렘의 한 십자가에서 죽었다. 치욕적인 죽음이었다. 이천년 뒤에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거리에서 총탄이 카를로스 무히카(아르헨티나의 신부)의 가슴을 벌집으로 만들었다.

카를로스의 의형제인 오를란도 요리오는 거리에 남은 그의 피를 깨끗이 씻어 주고 싶어 물통과 빗자루를 들고 갔다. 그러나 경찰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를란도는 손에 빗자루를 든 채 집 앞에 멈춰 서서 여러 사람이 흘린 것처럼 많은 피가 괴어 있는 커다란 웅덩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때 예고도 없이 격렬한 빗줄기가 쏟아졌고 어느 바나나 나무 아래까지 피를 쓸어 갔다. 바나나 나무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피를 마셨다.


(117쪽, 바나나 나무)


카를로스 파사노(우루과이 저널리스트)는 쥐 한 마리, 그리고 282호실 감방 문과 대화하면서 6년을 보냈다. 쥐는 충실하지 못해서 살그머니 빠져나갔다가 제멋대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나 문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훗날 감옥은 몬테비데오의 쇼핑센터로 탈바꿈했다. 감금 시설은 소비 시설로 바뀌었으며 형무소는 이제 사람들을 가두는 대신 아르마니 의상과 디오르 향수 그리고 파나소닉 VCR를 가두고 있다. 

감방의 문들은 결국 고물상으로 팔려 갔다. 그곳에서 카를로스가 자신의 문을 찾아냈다. 방 번호는 없었지만 그는 한눈에 알아봤다. 그가 숟가락으로 판 구멍들이 있었다. 목재의 오래된 얼룩, 수감되어 있는 동안 그가 매일 여행했던 신비한 나라들의 지도가 있었다. 

지금 그 문은 아무것도 가둘 수 없는 언덕 꼭대기에 우뚝 서 있다.


(332쪽, 문)


과거는 처절하지만 현재 또한 그리 다르지는 않다. 이 전쟁 대신 다른 전쟁이, 총탄 대신 돈이 할퀴고 밟는다.


브라질에서 농부들이 물었다. "사람 없는 땅이 널렸는데 왜 땅 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습니까?" 대답은 총탄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유일한 유산인 두려움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계속 질문하고 계속 땅을 정복했으며 일하고 싶어 하는 죄를 계속 저질렀다. 이제 수백만으로 불어난 농부들이 계속 물었다. "왜 화학물질로 땅을 괴롭히게 놔두는 거죠?" 또한 이렇게 묻기도 했다. "씨앗이 더 이상 씨앗이 아니라면 우린 어떻게 될까요?"

2001년 초, 땅 없는 농민들이 리우그란데두술 주에 위치한 몬산토 사의 유전자변형 종자 실험 농장을 습격했다. 그들은 인공 대두를 단 한 그루도 남기지 않고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농장은 '낭 미 토키(날 만지지마)'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123쪽, 씨앗)


집도 정처도 없이, 거처할 곳도 없이, 호세 안토니오 구티에레스는 과테말라시티의 거리에서 살고 자랐다. 배고픔을 피하려고 남의 물건을 훔쳤다. 외로움을 피하려고 본드를 흡입했고 그때 자신이 할리우드의 스타가 되는 상상을 했다.

어느 날 그는 떠났다. 낙원을 향해 멀리 북쪽으로 떠났다. 경찰의 눈을 피해 몰래 열네 번이나 기차를 훔쳐 타고 무수한 밤을 걸어 마침내 캘리포니아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에 머물렀다.

6년 후, 과테말라시티의 가장 궁핍한 구역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엔그라시아 구티에레스를 깨웠다. 제복 차림의 남자들 몇이 미 해병대에 입대한 그녀의 남동생 호세 안토니오가 이라크에서 사망했음을 통보하러 왔다. 그 거리의 소년은 2003년 전쟁에서 침략군의 첫 전사자가 되었다. 당국은 그의 관에 성조기를 둘렀고 그에게 군장(軍葬)의 예를 베풀었다. 그리고 그를 미국 시민으로 만들었다. 그에게 약속했던 대가였다.

장례식을 생중계한 텔레비전은 이라크 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용맹한 군인의 영웅적 행위를 찬양했다. 나중에 그가 '아군의 포격'으로 사망했음이 밝혀졌다.


(71쪽, 보상)


풍자라고 보기엔 현실 그 자체인 씁쓸한 것들도 갈레아노의 시선을 피할 수 없다.


시카고에는 흑인이 아닌 사람이 아무도 없다. 한겨울에 뉴욕에서는 태양이 돌을 흐물거릴 때까지 녹인다. 브루클린에서는 서른이 되도록 살아 있으면 동상을 세워 기릴 만하다. 마이애미에서 가장 좋은 집들은 쓰레기로 지어졌다. 미키는 쥐들에 쫓겨 할리우드에서 달아난다. 시카고, 뉴욕, 브루클린, 마이애미 그리고 할리우드는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에서 가장 처참한 변두리 빈민가인 시테솔리이에 있는 몇몇 지구의 이름이다.


(212쪽, 지리)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아메리카를 발견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비자가 없었고 심지어 여권조차 소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브라질을 발견한 포르투갈 항해가)은 브라질에 배를 정박할 수 없었는데, 그가 천연두와 홍역, 독감 등 그 나라에 알려지지 않은 전염병을 감염시킬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에르난 코르테스와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마음은 있었지만 멕시코와 페루를 정복할 수 없었는데, 그들은 취업 허가증이 없었기 때문이다.

페드로 데 알바라도(중미를 침략한 스페인 정복자)는 과테말라에서 발길을 돌렸고 페드로 데 발디비아(스페인의 정복자, 칠레 총독)는 칠레에 들어갈 수 없었는데, 전과 기록 증명서를 소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메이플라워호의 필그림 파더스는 매사추세츠 해안에서 바다로 되돌려 보내졌는데, 이민 쿼터가 이미 다 찼기 때문이다.


(220쪽, 있었을지도 모를 역사)


짓밟히고 쓰러지고 피를 흘리지만 사람들의 영혼은 얼마나 강한가. 자연은 또 얼마나 힘이 센가. 고달프고 괴롭지만 삶은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가. 


1972년 여름, 카를로스 랜케르스도르프(멕시코의 철학자)는 처음으로 이 단어를 들었다. 그는 바차혼(치아파스 주의 마을)에서 있었던 첼탈족 원주민들의 집회에 초대받았는데,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는 그들의 언어를 알지 못했고 그들의 열띤 토론은 미친 듯이 쏟아지는 빗줄기처럼 들렸다.

'틱'이라는 단어는 그 비를 뚫고 지나왔다. 모두들 그 단어를 말했고 '틱, 틱, 틱'하고 그 단어를 반복했다. 타닥타닥 소리가 빗발치는 목소리들 위로 솟아올랐다. '틱'이 핵심인 집회였다.

카를로스는 온 세상을 돌아다녔고 모든 언어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이 '나'라는 단어임을 알고 있었다. 이 마야 공동체들의 말과 행동의 중심에서 반짝이는 단어인 '틱'은 '우리'를 뜻한다.


(324쪽, 틱)


살토의 들판에서, 이미 나이 지긋한 그 십장은 어느 누구도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것으로 유명했다. 카를로스 산타야가, 마음이 커서 보이지 않는 것도 본다고들 하는데 그게 사실인지 그에게 아주 공손하게 물었다. 사람들 말로는, 마음이 바다처럼 넓은 나머지 두개골에 들어가지 않아 그가 두통을 앓는다고 했다.

가우초 노인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너한테 해줄 수 있는 말은 내가 호기심이 많고 운이 좋다는 거란다. 시력이 떨어질수록 더 많은 게 보이거든."

이 말을 들었을 때 카를로스는 아홉 살이었다. 이미 백 세의 언저리에 있었을 때도 그는 아직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세월은 그의 시력 역시 떨어뜨렸다. 그가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도록.


(158쪽, 보기)


책을 읽을 때 나는 먼 곳을 여행하고 있었다. 시간이 많았다. 어느 순간에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 듯 싶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그리 긴 시간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오래 전 어떤 낯선 곳을 헤맬 때 나는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을 읽고 있었다. 그 책 또한 한 문장 한 문장이 너무나도 소중해서 아주 오래도록 끼고 있었다. <시간의 목소리>는 새로운 여행의 동반자였고, 제목 그대로 오래된 시간의 목소리를 전해줬다. 제수알도 부팔리노의 <그림자 박물관>도 떠올랐다. 사라지고 감춰지는 것들을 들춰내 보여주는 작가들의 목소리는 놀랍다. 


그는 정말로 좋은 아이처럼 보였다. 카에타누는 그를 알지 못했다. 해변을 돌며 게를 팔던 소년은 자기 배로 한 바퀴 돌아보자며 카에타누를 초대했다. 

"그러고 싶어." 카에타누가 말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어. 할 일이 태산이야. 장도 봐야 하고 처리해야 할 일도 있고." 

그러나 결국 그들은 갔다. 배를 타고 시장과 은행, 우체국 그리고 그 밖의 다른 곳에 갔다. 그들은 해안가를 따라 바다에서 도시로 들어갔다. 순전히 도시를 바라보는 게 즐거워 잔잔한 바다에 떠서 꾸물거렸다.

그렇게 사우바도르 지 바이아(브라질 북동부의 항만 도시)가 새롭게 발견되었다. 걸어 다니면서 보는 도시는 완전히 달랐다. 카에타누 벨로주는 그렇게 호젓하고 축축하게 젖은 물 위에서 도시를 바라본 적이 전혀 없었다.

날이 저물었을 때, 배는 그를 태웠던 해변에 카에타누를 다시 내려놓았다. 그때 그는 자신에게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도시를 알게 해준 그 소년의 이름이 궁금했다. 소년이 마지막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검은 몸통을 드러낸 채 배 위에 서서 이름을 말했다. "내 이름은 마르코 폴로야. 마르코 폴로 멘데스 페레이라."


(75쪽, 물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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