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식탁
마리 모니크 로뱅. 권지현 옮김. 판미동
농업 관련 산업이라는 작지만 매우 강력한 세계에서는 ‘농약’이라는 말을 피하고 식물 병충해 방제 제품’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 용어도 최근에는 ‘식물 약제’라는 새로운 말로 바뀌었다. ‘농약’을 ‘식물 병충해 방제 제품’이나 ‘식물 약제’로 바꾼 것은 단순히 의미상의 속임수가 아니다. ‘생명체를 죽이기 위해 개발된 제품’을 식물의 건강과 식품의 질을 보호하는 약으로 둔갑시킴으로써 실질적으로 농부와 소비자를 속이려는 목적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46쪽)
1915년 4월 22일, 독일군은 프리츠 하버의 명령을 받고 벨기에 이프르에 가스 146t을 살포한다. 프리츠 하버는 화학전을 감독하기 위해 현장에 나가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연합군이 방독면으로 염소가스를 무력화하자 그는 다시 포스겐을 개발했다. 포스겐은 둘 다 독성이 매우 강한 염소와 일산화탄소를 혼합한 가스다. 이것은 염소 가스를 단독으로 살포했을 때보다 눈이나 코, 목에 자극을 덜 주지만 독일 과학자들이 만들어 낸 화학무기 중 가장 치명적인 독가스로 꼽힌다. 흡입된 포스겐이 폐에서 염산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포스겐을 들이마시고 간신히 살아남는다 해도 수년 내에 후유증으로 사망하게 된다. 포스겐은 오늘날에도 농약 산업에 널리 사용되는 화합물임을 명심하자. 1984년 12월 보팔 가스 사고의 원인이었던 살충제 세빈의 원료도 바로 포스겐이다. (51쪽)
전쟁에서 처음 독가스를 사용한 것은 독일군이었지만 이후 참전한 모든 나라가 자국의 화학 산업을 동원해 독가스를 사용하게 된다. 큰 전쟁은 기업들에게 언제나 큰 기회를 제공했다. 그들은 전쟁을 통해 거대 기업으로 성장할 기반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농약이나 유전자 조작 종자를 생산하는 다국적기업들은 그들의 후손인 셈이다. 독일의 훼히스트 사(1999년 프랑스 론 풀랑 사와 합병해서 생명공학 분야의 거대 기업 아벤티스가 되었다)는 독일군에 폭약과 머스터드가스를 공급했고, 미국의 듀폰은 연합군에 화약과 폭약을 공급했다. 또 20세기 초 창립된 사카린 생산업체 몬산토는 폭약과 독가스에 사용 되는 화학물질인 황산과 페놀 등을 판매해서 수익을 100배나 신장시켰다. (52쪽)
프리츠 하버는 스위스로 망명해서 1919년 연합국의 요구가 공식 철회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1년 뒤 그는 스톡홀름에서 노벨화학상을 수상한다. 암모니아 합성 과정 연구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었다. 국제 과학계는 일제히 들고 일어났고,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던 프랑스, 영국, 미국의 과학자들은 시상식 참여를 거부했다.
‘화학전의 아버지’가 했던 역할은 과학의 역사에서 잊혔지만 독성학자들이 지금까지도 적용하고 있는 ‘하버의 법칙’은 우리의 환경을 오염시키는 화학물질, 특히 농약의 독성을 평가하는 기준이다. 프리츠 하버는 가공할 화학무기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독가스의 독성을 비교해서 독가스의 ‘효율성’ 즉 치사력을 평가할 수 있는 법칙을 만들어 냈다. ‘하버의 법칙’은 생물체의 죽음을 유발하는 데 필요한 독가스의 농도와 노출 시간의 상관관계를 나타낸다. (53쪽)
심각한 질병과 화학물질 노출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하면 최대한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이유는, 인간이 어느 한 순간 밭과 공장, 집, 마시는 물, 숨 쉬는 공기 또는 음식을 독으로 물들여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리고 그런 결정은 실제로 지구촌 주민들을 실험 대상으로 만들었다. 반세기가 지난 뒤 우리는, 미국 전염병학자인 데이비드 마이클스의 표현을 빌리면 “환자와 시체의 수를 세는” 신세로 전락했다. (111쪽)
1970년대 이후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주인 캘리포니아 주가 ‘캘리포니아 농약 사용 보고서’라는 중앙컴퓨터시스템에 모든 농약 판매내역을 사용 장소와 일시까지 등록하도록 했다. 이 시스템 덕분에 어느 지역에, 언제, 어떤 농약이 뿌려졌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고, 세이디 코스텔로는 1975-1999년 연구 대상 지역 내 “거주 환경에서 이루어진 농약 노출의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었다. (152쪽)
‘해충’이 완전히 박멸되기는 한 것일까? 전혀 그렇지가 않다. 데이비드 피멘텔 교수가 1995년에 그 이유를 설명했다. “매년 전 세계 작물을 공격하는 해충은 약 6만 7000종입니다. 9000종은 곤충과 진드기이고 5만 종은 병을 일으키는 식물, 8000종은 잡초입니다. 일반적으로 그중 실질적인 위험이 되는 것은 5% 미만입니다. 해마다 250만 t이나 되는 농약을 쏟아 붓고 비화학적인 제어 방법을 써도 농업 생산량의 35%는 해충의 공격을 받아 사라집니다. 곤충이 13%, 병을 일으키는 식물이 12%, 잡초가 10%를 각각 차지합니다.” (154쪽)
유럽에서 2004년 금지된 아트라진은 미국을 비롯해 지금도 전 세계에서 널리 사용되는 제초제이다. 그런데 생쥐에게 아트라진을 경구투여하면 T림프구의 활동과 대식세포의 식세포 작용이 저하된다.
로버트 레페토와 산자이 발리가는 동물을 실험실에서 농약에 노출시켰을 때 나타나는 면역 체계의 이상이 야생 동물에게도 그대로 나타났었다고 강조한다. 캐나다 세인트로렌스 강 하구에서 죽은 채 발견된 고래들을 해부해 보니 유기염소계 농약과 PCB의 농도가 높게 나왔고 박테리아 감염과 암 유병률이 비정상적으로 높았다. 1990년대 초에도 지중해 돌고래들이 이상한 전염병에 걸려 에스파냐의 발렌시아 해변에 수십 마리의 고래 시체가 쌓이는 일이 벌어졌다. 역시 해부를 해 보니 바이러스 감염으로 죽은 것이었는데, 고래들이 원래 저항력이 있던 바이러스였다. 여러 연구의 공통적인 결과는 유기염소계 농약, PCB, 다양한 화학오염물질이 돌고래의 체내에 축적되어 면역 체계가 약화되었으며 그것이 떼죽음의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특히 눈길을 끄는 연구가 하나 있다. 그 시작은 1980년대였다. 동물학자들이 발트 해와 북해 연안에 서식하는 바다표범들이 모빌리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떼죽음을 당하는 것을 관찰했던 것이다. 네덜란드 과학자들은 비교적 오염이 덜한 스코틀랜드 북서쪽 해안에서 포획한 바다표범 새끼를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첫 번째 실험군에게는 오염이 심한 발트 해에서 잡은 청어를 먹이로 주었고, 두 번째 실험군에게는 아이슬란드 청정 연안에서 잡은 청어를 먹였다. 2년 뒤 첫 번째 그룹에서는 지방에 농축된 유기염소계 농약의 농도가 대조군의 농도보다 10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면역 기능은 대조군보다 3배나 저하되었다. (158쪽)
로버트 레페토와 산자이 발리가는 소련 과학자들이 수행한 여러 연구를 보고서에 소개했다. “공산주의 체제의 관료주의도 장점이 있더군요. 판매가 떨어질까봐 제조업체들이 자사 제품의 독성을 감추는 데 급급한 자본주의 국가와는 달리 공산주의 국가는 영리를 추구하지 않으니 소련 과학자들은 진정한 의미의 보건 감시 연구를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농부들에게 나타나는 증상을 하나도 빠짐없이 양심적으로 기록했습니다. 증상으로 인해 발생하는 의료비를 줄이려는 것이 목적이었지요."
‘관료주의적’ 과학 논문들은 농약 노출이 자가면역 반응을 일으키고 호중구나 T림프구 활동을 교란시켜 폐와 호흡기 감염을 일으키는 데 기여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 주었다. 1984~1995년에 우즈베키스탄 면화 재배 지역에서는 여러 연구가 수행되었다. 유기염소계와 유기인계 살충제가 다량 살포된 이 지역의 농업 노동자, 그리고 인근 지역 주민들에게서도 호흡기, 위장, 신장 감염률이 매우 높게 나타났다. (160쪽)
피터 인판테는 24년 동안 미국 산업안전보건청에서 근무했다. 산업안전보건청은 1970년에 미 국 환경보호국과 동시에 설립되었다. 그 당시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이 불러일으킨 환경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미국은 환경 문제 개선에 앞장섰다.
“그때만 해도 이 기관은 제대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이 임명한 독성학자 율라 빙엄 청장의 지휘 아래 우리는 직장에서의 납, 벤젠, 면진에 대한 노출 허용치를 크게 낮출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규제 완화에 열광했던 로널드 레이건이 백악관의 주인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러자 기업들이 산업안전보건청을 그야말로 쥐락펴락했습니다. (중략) 국제암연구소는 2006년 포름알데히드를 ‘인간에게 암을 유발하는’ 물질로 분류했습니다. 그러나 산업안전보건청의 암흑기는 그때 시작되었습니다. 레이건에 이어 부시 부자가 이끈 공화당 행정부 밑에서 우리는 손발이 묶였습니다. 우리가 규제를 가한 제품의 수는 황당한 수준이었습니다. 15년 동안 겨우 두 개였으니까요.” (168쪽)
암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주원인이 화학물질에 대한 노출이라는 것을 의사들이 ‘이미’ 이해했다면, 그리고 독성 물질로 인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어떤 방법을 써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면 왜 사람들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것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과학자들의 연구와 권고가 무시당한 것은 1930년대부터 제품의 독성 연구를 통제하고 조작하기 위해 산업이 조직화되었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공공 보건을 위해 독립성을 지키려는 과학자들을 보면 무자비한 전쟁을 벌였다. 계란으로 바위를 친 첫 희생자는 독일 출신의 미국 독성학자 빌헬름 후퍼였다. 그는 1936년 9월 브뤼셀 학회에 참석하고 몇 달 뒤 미국 화학 기업 듀폰에서 해고되었다. (184쪽)
공공 보건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을 우려한 보건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유연휘발유는 1923년 2월 2일 출시되었다. 생산업체는 제너럴 모터스, 스탠더드 오일(오늘날의 엑슨 모빌), 그리고 듀폰이 만든 합작 회사 에틸 사였다. 듀폰은 벤지딘과 베타나프틸아민을 생산하던 챔버스 워크스 공장에 생산을 맡겼다. 12년 전 빌헬름 후퍼가 기피 대상이 되었던 바로 그 공장은 ‘나비의 집’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데, 납 수증기에 중독된 노동자들이 환각 증세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납 수중기는 들이마시면 정신이 이상해진다 하여 영어로 ‘루니 가스(Loony Gas)’, 즉 ‘미친 가스’라고 불렸다. 이 공장에서 납 용액을 만들던 청년 노동자 조지프 레슬리의 가족은 어느 날 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가 아무도 모르게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는 사실은 나중에 밝혀졌다. 그는 그곳에서 1964년에 사망했다. 후손들이 진실을 알게 된 것은 2005년의 일이었다. (191쪽)
“일일섭취허용량을 적용하게 되자 농식품 분야의 규제를 만들어야 했던 기관들은 큰 도움을 받았고 국제 무역도 훨씬 용이해졌다.”고 르네 트뤼오는 결론 내렸다. 흥미로운 것은 국제생명과학연구소가 일일섭취허용량의 개념을 오랫동안 홍보해 왔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연구소’라는 곳이 중립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이 1978년에 농식품 분야의 대기업(코카콜라, 하인즈, 크래프트, 제너럴푸즈, 프록터앤갬블)이 주축이 되어 워싱턴에 설립한 기관이기 때문이다. 얼마 뒤에는 농식품 분야의 선두 기업(다논, 마즈, 맥도널드, 켈로그, 아스파르탐의 주요 제조업체인 아지노모토)뿐만 아니라 농약 시장의 유수 기업(몬산토, 다우 애그로사이언스, 듀폰, 바스프), 그리고 의약품 시장의 리더(화이자, 노바티스)까지 합세했다.
국제생명과학연구소는 2006년까지 세계보건기구에서 특별한 지위를 누렸다. 연구소 대표들이 국제 보건 관련 기준을 정하는 실무 그룹에 직접 관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보건기구가 그 지위를 박탈한 것은 연구소의 로비 활동이 드러난 뒤였다. 세계보건기구와 식량농업 기구가 발표한 탄수화물(글루시드)에 관한 보고서를 국제생명과학연구소에서 재정 지원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당의 과잉 섭취와 비만 및 만성질환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 보고서였다. (317쪽)
다이앤 벤포드는 국제생명과학연구소를 위해 작성한 논문에서 ‘리스크 (Risk)’의 개념을 ‘위험(Danger)’과 비교해서 설명했다. “전문가들이 ‘위험’이라고 부르는 것은 건강에 해로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생물학적, 화학적, 물리적 요소이다. 그 위험이 인간에게 나타날 가능성 혹은 리스크는 몸으로 유입되는 화학물질의 양, 즉 노출량에 달려 있다. 위험은 화학물질 고유의 특성이며 노출되지만 않는다면 그 위험 때문에 피해를 입을 리스크도 없다. 따라서 리스크 평가는 특정 위험이 일정한 노출 수준과 기간 혹은 생애의 특정 순간에 나타나는가를 결정짓는 과정이다. 그럴 경우 리스크 범위가 측정된다. 리스크 관리는 노출을 줄여 리스크를 감소시키는 것이다.” (332쪽)
“일일섭취허용량은 과학적인 도구처럼 보입니다. mg/kg이라는 단위가 아주 근사해 보여서 정치인들을 안심시키죠.” 에릭 밀스톤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과학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우선 리스크의 범위를 나타내는 값이 아니라 허용 범위니까요. ‘허용 범위’란 사회적이고 규범적이며 정치적 혹은 상업적인 개념입니다. 누구를 위해 ‘허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허용 범위의 개념 뒤에는, 얻는 이익에 비해 리스크를 허용할 만한가 하는 질문이 늘 숨어 있습니다. 그런데 화학물질을 사용해서 이익을 보는 쪽은 항상 소비자가 아닌 기업입니다. 따라서 리스크를 감수하는 쪽은 소비자이고 이익을 가져가는 쪽은 기업인 것이죠.” 이익 대 리스크라는 중요한 개념은 르네 트뤼오가 고안한 시스템의 근간이기도 하다. (333쪽)
아스파르탐 혹은 E951은 단맛을 내는 성질이 사탕수수보다 200배나 강한 합성 감미료다. 6000개 이상의 식품에 사용되며 전 세계 약 2억 명의 인구가 섭취하고 있다. 아스파르탐은 미국 제약회사 GD설의 화학자 제임스 셰터가 우연히 발견했다.
이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해하려면 아스파르탐이 아스파르탐산(40%), 페닐알라닌(50%), 메탄올(10%)로 구성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스파르탐산과 페닐알라닌은 일부 식품에 들어 있는 천연 아미노산이다. 그러나 아스파르탐의 형태로 섭취되면 다른 단백질과 결합하지 못하기 때문에 유리되어 체내에 돌아다니게 된다. 물에 닿거나 섭씨 30도 이상이 되면 아스파르탐산과 페닐알라닌은 디케토피페라진(DKP)로 분해된다. 일부 과학자들은 이 부산물을 암을 유발하는 독성 물질로 본다. 메탄올은 과일이나 채소에 들어 있는 천연 물질로, 아스파르탐과 달리 에탄올(에틸알코올)과 항상 결합되어 있다. 메탄올의 독성을 막아 주는 것도 바로 에탄올과의 결합이다. 메탄올이 중화되지 않으면 간에서 신진대사를 거쳐 포름알데히드로 변한다. 포름알데히드는 2006년에 ‘인간에게 암을 유발하는’ 물질로 분류되었다.
40년 동안 논란에 불을 지핀 것은 이 세 가지 성분의 잠재적 독성과 아스파르탐의 시장 독점을 위해 1970년대 초에 GD설이 세운 전략이다. 아스파르탐의 승인이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GD설이 알고 있었다는 매우 충격적인 ‘기밀 메모’가 존재한다. (379쪽)
존 올니는 놀라울 정도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당시 발표된 논문들을 보면 발병률이 0.6% 정도인데, GD설의 연구에서는 그렇게 부실하게 진행했는데도 3.57%가 나왔죠. 그런 걸 보니 식품의약국이 아스파르탐 승인을 거부할 수밖에 없겠구나 생각했던 게 기억납니다.” 올니 박사의 희망은 머지않아 꺾인다. 가공할 위력을 가진 인물이 무대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바로 일리노이 하원의원인 도널드 럼스펠드였다. 그가 1977년 3월 GD설의 CEO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GD설은 럼스펠드가 하원의원으로 있던 일리노이에 설립되었습니다.” 제임스 터너의 설명이다. “매우 영향력 있는 가문이었던 설 가(家)가 럼스펠드의 정치 활동을 내내 지원했죠. 그러던 중 지미 카터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럼스펠드에게는 힘든 시기가 닥쳤던 겁니다.”
미국 식품의약국 법률부의 리처드 메릴 부장이 1977년 1월 10일 ‘데이터 점유 및 허위 신고’로 GD설을 상대로 시작한 소송을 덮어 버리는 데 럼스펠드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식품의약국에서 제조업체를 상대로 형사소송을 벌인 것은 처음이었기에 사태는 심각했다. 1980년 9월 30일 공공조사위원회가 보고서를 제출했고, 존 올니와 제임스 터너의 싸움은 승리로 끝날 것 같았다.
“새로운 연구가 잠재적인 발암성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 한, 식품에 아스파르탐을 사용하는 것은 금지되어야 한다. 아스파르탐을 식품첨가물로 승인한 결정의 철회를 명령한다”고 보고서는 결론 내렸다. 그러나 5주 뒤 로널드 레이건이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85년까지 GD설의 CEO 자리를 지킬 도널드 럼스펠드는 1981년 1월 20일 취임식 이전에 인수 위원회에 참여했다. 그는 식품의약국이 속해 있는 보건부를 맡았다. 그리고 식품의약국의 수장으로 펜실베이니아 대학 의대 교수인 아서 헤이스를 추천했다. 1981년 7월 15일 아서 헤이스는 아스파르탐의 시장 출시를 허용하고 일일섭취허용량을 50mg/kg으로 정했다. (388쪽)
로버트 샤피로는 GD설에서 변호사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1983년에는 GD설의 자회사이자 아스파르탐 제조업체인 뉴트라스위트의 CEO로 임명되었다. 몬산토가 1985년에 GD설을 인수했을 때에도 그는 뉴트라스위트의 CEO 자리를 지켰고, 1995년에는 몬산토의 CEO가 되었다.
사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아스파르탐은 금지되지 않았고, 의무표시제도 시행되지 않았다. 미 국방부가 화학무기 개발에 사용할 후보 물질 목록에 아스파르탐을 올려놓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청문회 자료를 통해서였다. 1981~1983년 식품의약국을 지휘했던 아서 헤이스 밑에서 건조식품(1981년)과 탄산음료(1983년)에 아스파르탐 사용승인을 마무리하기 위해 일한 열여덟 명의 고위 공무원이 이후 GD설과 몬산토에 고용되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중 한 사람이 마이클 테일러다. 회전문 인사의 전형이었던 그는 1980년대 초부터 민간 부문과 공공 부문을 오가기 시작했다. 아스파르탐에 관한 공공조사위원회에서 식품의약국의 입장을 대변했기 때문이다. 아서 헤이스는 1983년 11월에 식품의약국을 떠나 곧바로 뉴트라스위트와 몬산토가 가장 선호하는 PR 대행사인 버슨마스텔러에 컨설턴트로 들어갔다. (396쪽)
‘펀딩 효과’를 발견한 사람은 노인병 전문의인 폴라 로숀이다. 보스턴에서 활동하는 그녀는 아스피린, 나프록센, 이부프로펜(애드빌) 등 비스테로이드성 항염증제를 관절염 치료에 사용했을 때의 임상 실험 결과를 비교하다가 펀딩 효과를 발견했다. 기업이 돈을 댄 테스트는 ‘항상’ 호의적인 결론을 내렸다. (411쪽)
과학 논문이 그 누구도 기원을 알아낼 수 없는 기정사실이 되려면 다른 논문에 되도록 많이 인용되어야 한다. 과학 논문이 사실인가 픽션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그 논문 자체가 아니라 다른 논문들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혹은 사실로서의 지위를 얻기 위해서, 논문은 다음 세대의 논문을 필요로 한다. GD설과 다른 기업들이 수십 건의 ‘연구’를 ‘발표하게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 연구의 목적은 ‘과학 저널에 발표되는 것’뿐이다. (412쪽)
30년 전에 금지되었지만 지금도 피해를 입히고 있는 DES는 “에스트로겐 유사 효과를 가지고 있는 환경 물질의 모델”로 손꼽힌다. DES는 영국인 찰스 도즈가 최초로 합성한 물질이다. 스위스에서 폴 뮐러가 DDT를 발견한 것도 그때였다. 기적의 약과 기적의 살충제를 발명한 두 사람은 1948년에 공동으로 노벨상을 수상했다. 이 두 물질은 두 가지 공통점을 지녔다. 현재는 금지된 ‘독극물’이라는 점, 그리고 비슷한 화학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을 모방하는 성질이 있다는 점이다.
DES의 ‘여성화’ 능력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 공장에서 이미 알려졌다. 특허를 받지는 못했지만 공적 자금으로 운영되는 연구소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나치 정권 하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농업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닭과 암소, 돼지의 사료와 섞으면 가축의 성장이 15~25% 정도 빨라졌다. 전쟁 중이던 독일에 시간과 돈을 절약할 방법을 주었으니 로버트 케호는 DES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는 유연휘발유를 열렬히 옹호했던 인물이다. “DES는 산업보건 분야에서 매우 흥미로운 약이다. DES를 생산하는 공장에는 여자 노동자들만 일할 순 있다. 남자가 흡입하면 부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가슴이 부어오르고 통증이 격심해서 작업복에 느껴지는 압박을 견딜 수 없을 정도이다. 노인 남성은 고환의 크기가 줄어들고 일시적으로 성불구가 된다.” (461쪽)
1941년에 미국 식품의약국은 DES의 판매를 허용했고, 많은 유럽 국가들이 그 뒤를 따랐다. 엘리 릴리, 애벗, 업존, 머크 등 제약업체들도 제조하기 쉽고 비용도 싼(특허가 없었으므로) DES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기적의 약’은 알약 형태로 많은 여성에게 처방되었다. 폐경기 여성의 안면 홍조와 질염 치료, 젖 분비를 끊으려는 산모, 사춘기 소녀의 여드름 치료, 성장 조절, 심지어 응급 피임약으로도 쓰였다. 1947년에 DES는 식품 보조제 혹은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가축의 귀나 닭의 목에 이식하는 삽입물로 승인을 받았다. (462쪽)
1974년 DES의 최대 생산업체인 엘리 릴리를 재판정으로 끌어낸 사람은 조이스 비클러였다. 그녀는 17세에 투명세포암 진단을 받았다. 엘리 릴리는 항소했지만 패소했다. 결국 대법원이 원심을 확정했다. 조이스 비클러의 승리는 가능성을 열어 주었지만 다른 피해자들에게 승소는 요원했다. 어머니가 먹었던 제품의 제조업체가 어디인지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를 반드시 제출해야 했던 것이다. DES를 다양한 브랜드로 판매하던 기업이 200여 개나 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무척 힘든 일이었다.
DES액션은 피해자의 어머니가 구입한 DES의 브랜드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DES를 제조하는 모든 업체를 상대로 소송을 걸기 위해 전력을 다해 싸웠다. 그리고 그들은 승리했다. 1980년 3월, 캘리포니아 대법원은 주디스 신델의 소송을 허가했다. 그녀의 어머니가 먹은 DES의 제조업체를 몰라도 상관없었다.
“매우 복잡해진 우리의 산업화된 사회에서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소비자의 건강을 해칠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그 제품을 생산한 제조업체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법원의 답변은 기존의 독트린을 엄격하게 따르거나 새로운 요구를 충족할 수 있는 수단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피해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하는 법을 현실에 적응시키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한다.” (474쪽)
“현재의 규제는 1970년대에 만들어진 개념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내분비계 교란물질에는 절대 적용될 수 없는 개념들이지요. 소프트웨어를 바꾸거나 해석의 틀을 바뀌어야 합니다. ‘양이 곧 독이다’라는 원칙을 배우고 자란 독성학자 세대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기간-그것이 단 24시간일 때도 있습니다-이 곧 독이 되는 물질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현재 시스템은 부조리를 안고 있습니다. 우리가 수백 가지 화학물질에 동시다발적으로 노출된다는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질적으로는 화학 폭탄이라고 해도 좋을 수많은 화학물질의 혼합물에 노출되는데도 평가는 화학물질 하나하나에 대해 개별적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522쪽)
‘화학 수프’는 리처드 잭슨 박사의 끈질긴 노력 덕분에 밝혀졌다. 그는 1994년에서 2003년까지 질병통제국 산하 국립환경보건센터 소장을 역임했다. “화학 기업들이 비난했던 것은 보고서가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대로 된 정보는 사람을 두려움에 떨게 하지 않습니다. 정보가 없거나 나쁜 정보일 때 사람들은 공포에 떠는 것입니다.” (533쪽)
프랑스의 미래세대(MRDGF의 전신)가 2010년 12월에 발표한 연구는 10대 아이의 일상적인 식사 내용을 분석하는 것이었다. 하루 식사는 공식 기관의 권고 사항-과일 5종, 신선한 채소, 유제품 3종, 물 1.5L-을 따르는 세 끼와 간식으로 구성되었다. 르몽드 인터넷판에서 지적했듯이 결과는 참담했다.
“128종의 잔여물과 81종의 화학물질이 검출되었다. 그중 42종은 암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거나 큰 물질이고, 5종은 확실한 발암물질이었다. 37종은 내분비계 교란물질로 분류될 수 있다. 아침 식사로 먹은 버터와 우유를 넣은 차에만 암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잔여물 10종과 확실한 발암물질로 규명된 잔여물 3종, 호르몬을 교란시킬 수 있는 잔여물 20종이 들어 있었다. 햄버거 스테이크, 통조림 참치, 바게트, 껌에도 농약과 화학물질이 잔뜩 들어 있었다. 수돗물을 분석해 보니 질산염과 클로로포름이 검출되었다. 오염물질이 가장 ‘풍부하게’ 들어 있는 음식은 저녁에 먹은 연어 스테이크였다. 34종의 화학 잔여물이 검출되었다.” (537쪽)
(책은 재미있는데 번역이 좀... '신젠타'를 맨 앞에선'산젠타'라 쓰고, 뒤에서는 계속해서 '시젠타'로... 용어나 문장이 불분명한 게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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