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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바우만, '모두스 비벤디'

딸기21 2015. 6. 8.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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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스 비벤디-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

지그문트 바우만. 한상석 옮김. 후마니타스



로자 룩셈부르크는 어느 한 유형의 자본주의가 식량 고갈로 사멸하는 모습, 즉 자신이 뜯어먹던 '타자성'의 마지막 풀밭까지 먹어 치우고는 굶어 죽는 모습을 예견했다.그러나 1백 년이 지난 후 근대성이 지구를 정복하면서 나타난 치명적인, 어쩌면 가장 치명적인 결과는 '인간쓰레기'를 처리하는 산업이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된 상황인 것 같다. 자본주의 시장이 정복한 새로운 전진기지마다 땅과 일터, 공동체적 안전망 등을 이미 박탈당한 사람들의 무리에 수많은 사람이 새로 추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세계를 정복함으로써 불필요해진 사람들의 수는 끊임없이 늘어나 지금은 지구의 관리 능력을 넘어설 지경이다. (50-51쪽)


금융과 상품 및 노동시장, 자본에 의한 근대화, 그리고 근대적 생활양식의 전지구적 확산으로 이 지구가 새로운 포화상태를 맞게 되면서 두 가지 직접적인 결과가 나타났다. 첫번째 결과는, 이미 근대화되었거나 현재 근대화되고 있는 비교적 소수의 잉여인간 밀집지역들을 정기적으로 제때에 비우고 깨끗이 청소할 수 있게 해주던 과거의 배출구들이 차단된 것이다. 일단 근대적인 삶의 방식이 지구촌 전체로 확산되자 몇몇 국가가 인간쓰레기를 처리하던 주요 배출구들, 즉 '비어 있거나' '임자 없는' 땅들은 희박해져서 완전히 사라질 지경이 되었다. (53쪽)


인간쓰레기를 처리하기 위한 과거의 외부 배출구들이 차단된 결과 '과거에 이미 근대화를 이루어 놓은 국가들'이나 이제 새롭게 근대화되기 시작한 국가들 모두 배제적인 관행의 칼날을 점점 더 내부로 돌리고 있다. (54쪽)


지구화로 인해 나타난 가장 좋지 않은 결과 중 하나는 전쟁의 탈규제화이다. 현재 전쟁과 비슷한 양상을 띠고 나타나는 대부분의 전투와 그중 가장 잔혹하고 처참한 전투들은 국내법 혹은 그에 준하는 법이나 국제 협약의 규제를 받지 않는 비국가 단체들이 벌이는 것이다. 이런 전투들은 국가 주권이 계속해서 침식당한 결과이자, 국가 주권을 침식하는 부수적이지만 강력한 원인이며 동시에 초국가적인 전지구적 공간에 계속해서 변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64쪽)


싸움터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사람들은 변경이 전지구적으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어느 곳을 가더라도 유형만 바뀔 뿐 모두 똑같은 무법천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난민들에게는 국적이 없다. 그러나 여기서 국적이 없다는 말은 새로운 의미이다. 그들은 국적이 있을 때 의지할 수 있던 국가의 권위가 전혀 존재하지 않거나 단지 유령처럼 존재하게 됨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선다. 미셸 아지에르가 말한 것처럼, 그들은 법의 바깥에 있다. 이런저런 나라의 이런저런 법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법 자체'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법의 혜택을 박탈당하고 버림받은 새로운 유형의 추방자이고 지구화가 낳은 산물이며, 변경지역 사람들의 정신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전형이자 화신이다. 그들이 어떤 곳에 잠시 머문다 해도 그들은 결코 끝나지 않은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목적지가 영원히 불분명한 상태로 남아 있으며, 그들이 '종점'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장소는 영원히 접근불가능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65-66쪽)


한번 난민은 영원한 난민이다. 조국의 잃어버린 낙원으로 돌아갈 길은 이미 거의 차단되어 있다. 수용소라는 연옥에서 밖으로 나가는 모든 길은 지옥으로 이어진다. (67쪽)


이방인은 점점 더 낯설고 이해하기 힘든 외계의 존재가 되어 감에 따라 훨씬 더 위협적인 존재처럼 보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영역을 분리하는 것은 '이질 공포증(mixophobia)'의 생명줄을 마련해 주는 것이며 먹이를 공급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도시 생활에는 양면성이 있다. 도시는 이질 공포증의 씨앗을 뿌리고 육성하는 동시에 그만큼 '이질 애착증(mixophilia)'을 유발하기도 한다. 도시가 크고 이질적일수록 매력 역시 많아진다. 이방인이 많이 몰려 있다는 것은 혐오감을 주는 동시에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매우 강력한 자석 같은 역할을 한다. 이질 공포증과 마찬가지로 이질 애착증 역시 스스로 추진하고, 전파하며, 활성화한다. (142-144쪽)


이방인들은 앞으로 오랫동안 서로 함께 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미래가 도시의 역사를 어떻게 바꾸든,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면서 다양한 자극과 기회로부터 혜택을 얻어내는 기술은, 도시 주민이 배우거나 활용할 필요가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이 된다. 건축가와 도시 기획자들이 이질 애착증의 성장을 돕고, 도시 생활의 어려움에 대해 이질 공포증이 반응하는 경우를 최소화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많을 것 같다. (145쪽)


도시 주민의 공동 거주지에 출몰하는 이질 공포증은 그들이 안고 있는 불안의 원천이 아니라 그 원천에 대한 비뚤어지고 잘못된 해석의 산물이다. 이질 공포증과는 상반되는 것으로서 도시 생활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질 애착증은 희망의 씨앗을 품고 있다. 그 희망은 다양한 이방인과 공존하며 상호 교류하도록 요구하는 도시 생활을 덜 걱정스럽고 생활하기 쉽게 만들려는 희망이기도 하고, 유사한 원인으로부터 전지구적인 규모로 발생하는 긴장을 완화하려는 희망이기도 하다. (147쪽)


가다머의 '지평의 융합'은 당연히 도시라는 무대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 무대에서는 화해할 수 없는 갈등과 피할 수 없는 문명의 충돌이라는 헌팅턴의 묵시론적 전망이, 이질적이며 생경한 인종·국적··종교적 의식 같은 낯선 가면 뒤에 숨은 인류와의 상냥하며 흐뭇하고 즐거운 일상적 만남으로 바뀔 수 있다. (1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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