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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세계적인 안무가 피나 바우쉬(본명 조세핀 바우쉬·사진)가 지난 30일 68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습니다.
AFP통신 등은 바우쉬가 독일 서부 부퍼탈에서 지병인 암으로 사망했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는 ‘탄츠테아터 부퍼탈 피나 바우쉬’ 발레단을 이끌며 20세기의 독보적인 안무가로 군림했었던 인물이죠. 춤과 연극, 음악과 미술의 경계를 허문 탈(脫) 장르 양식의 탄츠테아터를 통해 현대무용의 흐름을 바꿨다는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서부 베스트팔렌 지역의 소도시 솔링겐에서 태어난 바우쉬는 15세 때부터 독일 최고의 안무가들 중 하나로 표현주의 무용의 선구자였던 쿠르트 유스에게 춤을 배웠습니다. 1960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줄리어드 예술학교에서 앤서니 튜더, 호세 리몬 등을 사사한 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발레단에서 잠시 활동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우쉬가 무용가로 꽃을 피운 것은 역시 독일에서였습니다. 62년 유스가 이끄는 에센의 포크방 발레단에 들어간 그는 솔로이스트로 활약하다 68년 안무가로 데뷔했습니다. 이듬해부터는 유스의 뒤를 이어 발레단의 예술감독이 됐고, 72년에는 탄츠테아터의 전신인 부퍼탈 오페라 발레단의 예술감독이 됐습니다.
‘20세기 무용의 혁명가’로 불렸던 바우쉬의 안무는 경계를 허물고 상반된 개념들을 하나로 융합시킨 것이 특징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사랑과 투쟁이라는 주제에 천착, 두 성(性) 사이의 끊임없는 갈등을 신체의 움직임으로 묘사했다...고 하네요. 그의 발레극들은 짧은 대사와 몸짓, 전자음악과 초현실적인 무대 디자인 등으로 꾸며졌으며 희비극적인 요소들이 계속 엇갈리면서 긴장감을 자아내곤 했다는 평입니다.
제가 무용에 대해 뭘 알겠습니까마는... 스페인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 <그녀에게>(아래 사진들)를 통해 스크린으로도 바우쉬의 무용세계가 세계에 알려졌고, 저 역시 이 영화를 통해 '피나 바우쉬'라는 존재를 처음(이자 마지막 -_-)으로 접했습니다.
그 때 그 영화를 보면서 기괴하고 불쾌하다는 느낌이 가장 먼저 들었고요. 하지만 두고 두고 그 영화가 떠올랐고, 곱씹어 볼수록 참 멋지고 잘 만든 영화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미국 뉴욕타임스는 “유스에게서 배운 독일 표현주의의 전통과 줄리어드에서 그를 가르친 영국인 튜더의 스타일, 뉴욕 발레단에서의 경험 등이 바우쉬의 폭넓은 예술세계에 영향을 미쳤다”고 평한 바 있습니다.
바우쉬는 지난 2005년에는 부퍼탈에서 ‘세계 도시 시리즈’의 하나로 ‘한국’을 소재로 한 작품을 선보였으며, 이를 계기로 한국의 ‘문화예술 명예홍보 대사’로 위촉되기도 했습니다. 네덜란드 출신의 의상 디자이너 롤프 보르지크와 결혼했으나 보르지크는 80년 사망했습니다.
바우쉬와는 직접 상관 없지만, <그녀에게>에 나왔던 음악, <쿠쿠루쿠쿠 팔로마> 올려놓습니다.
덧붙이자면, 영화에서 이 노래를 부른 사람은 브라질의 작곡가이자 기타리스트이자 가수이자 작가이자 정치운동가인 카에타누 벨로주(아래 사진)입니다. 60년대 브라질의 군사독재정권에 반대하는 음악 운동이었던 '트로피칼리스모'를 주도했던 사람이고요. 혹자들은 '브라질의 밥 딜런'이라고들 한다는데요, 우리는 '브라질의 김민기였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네요. 역시 가수였던 여동생 마리아 베타니아도 함께 음악 운동을 펼쳤다고 하고요.
벨로주는 69년 동료 음악가 히우베르투 히우와 함께 군사정권에 체포됐었고요. 풀려난 뒤에도 런던 등지로 두 차례 망명했다가 72년에야 자기 나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80년대 군부정권이 끝나면서 비로소 자유로운 음악활동을 펼칠 수 있었고, 유럽과 미국에서도 음반을 발매해 '거장'의 칭호를 얻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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