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제수알도 부팔리노, 그림자 박물관

딸기21 2014. 5. 30.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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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등을 켜는 사람은 수염이 텁수룩한 신이나 마법사의 행동을 똑같이 흉내 냈다. 땅거미가 내릴 즘, 가로등 기둥에 사다리를 기대놓은 채 성냥 하나로 간단히 등 안에 숭고한 빛의 기적을 지펴 놓았다. 새벽에는 좀 서글퍼 보였다. 공중에 매달린 작은 유리 집의 불꽃이 희미해져 갈 때면 그가 살며시 나타나, 자객이 칼을 휘두르듯 심지 끄는 기다란 막대를 가볍게 쳐서 불꽃을 하나씩 끄곤 했다. 


제수알도 부팔리노의 <기억의 박물관>(이승수 옮김. 이레)에 나오는 구절이다. 10대의 어느 시기엔가, 독일 소설이나 뭐 그런 것들을 읽으면서 '점등사'를 그린 그림을 보았던 기억이 난다. 하나하나 손으로 불을 켜야 하는 램프등이라니. 부팔리노의 책을 읽다가 '가로등 켜는 사람'에 대한 추억담을 보며 문득 묘하게 환상적이었던 오래된 책의 삽화가 다시 떠올랐다.



부팔리노는 시칠리아 사람이란다. 책은 이 섬에서 자라난 노작가가 고향이라는 공간과 과거라는 시간 속에서 끄집어낸 기억의 단편들이다. 거기에는 작가가 기억하는 장소들도 있고, 속담들도 있고, 지금은 사라진 직업들도 있고, 사람들도 있다.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누구나 지나온 추억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거릴 법한 어린 시절의 소소한 사건들도 적혀 있다.


시칠리아. 이탈리아는커녕 유럽이라는 큰 덩치의 역사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데, 시칠리아의 속살이라니. 책의 표지에는 '전에는 몰랐던 시칠리아의 심장소리'라는, 별로 도움 안 되는 홍보문구가 쓰여 있다. 책장을 아주 천천히 넘겼다. 하루하루 조금씩 읽었다.

극적인 사건도 없고 줄거리도 없는 이 작은 '기억의 박물관'이 전해주는 건 '시칠리아의 심장'이라 국한하기 힘든 것들이다. 난 그리 늙지도 않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어릴 때 우리집 밑에 있었던 '명재네 가게'와 울엄마가 지금도 가끔 얘기하는 '우물 옆 미옥이네' 같은 것들을 떠올렸다. '은아네 미장원'도 있었고(은아는 나와 초등학교, 고등학교 동창이기도 하다) '송옥의상실'도 있었다. 그 의상실 딸은 키가 작고 얼굴이 까맣고 이뻤는데 제 엄마가 만들어준 옷을 학교에 입고 왔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가 마시고 난 맥주병을 동생과 함께 엿바꿔먹었던 기억도 난다. 그 엿 들고 집에서 쪽쪽 빨아먹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들어오셔서 동생과 함께 책상 밑에 숨었던 일도. 


그러니까 이 책은, 그런 단편들을 기록한 책이다. 제목이 말해주듯 이 모든 기록은 '그림자 박물관'이기도 하고 '작은 역사의 박물관'이자 '환상과 노동의 역사책'이기도 하다. 기록된 거창한 역사들 사이에서 순식간에 잊혀버리는 우리 모두의 생생한 작은 역사, 도시화 속에서 사라지는 장소와 순간의 역사.


일전에 읽었던 라나지트 구하의 <역사 없는 사람들>에서 타고르의 글을 다시한번 인용해본다.


"어느 날 오후 네 시 반쯤에 나는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막 돌아왔는데, 그때 우리 집 삼층 높이에 걸쳐 있는 검푸른 뭉게구름을 보았다. 얼마나 놀라운 장면이었던가. 나는 지금도 그날을 기억한다. 그렇지만 그날의 역사 속에서 그 뭉게구름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안에서 라빈드라나트는 혼자이면서 모든 사람이 되었다. 또 한 번은 방과 후에 우리 집 서쪽 베란다에서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작은 당나귀 한 마리(영국 제국 정책에 의해 만들어진 그런 당나귀 말고 언제나 우리 사회 안에 들어와 있었고 태초 이래로 변함 없는 그 짐승)가 가정부가 사는 방 쪽에서 나와 풀을 뜯고 있었다. 그런데 암소 한 마리가 그 당나귀 등을 사랑스럽게 핥아 주고 있는 게 아닌가. 살아 있는 한 생명체가 다른 한 생명체를 위해 사는 모습을 본 아름다운 광경은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그날 역사를 통틀어 그 장면을 황홀한 눈으로 본 사람은 라빈드라나트 밖에 없었다. 나는 확신한다. 그날의 역사에서 그 장면이 갖는 심오한 의미를 갖게 된 사람은 라빈드라나트 말고는 아무도 없다. 그 자체로 창조인 터전 속에서 라빈드라나트는 오로지 혼자였고 역사를 통해 공적으로 어느 누구하고도 엮이지 않았다· 역사가 공적인 곳에서는 그저 한 사람의 영국 백성일 뿐 라빈드라나트 그 자신은 아니었다."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문학 속의 역사성>)


부팔리노의 '그림자 박물관'은 타고르가 말한 그 역사와 이어진다.


작은 역사는 모든 다른 역사의 스승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는 단지 피와 권력의 연대기 안에 보존되는 것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역사는 우리 각자가 교육받았던 인간의 물리적 환경과 장소와 연결되어 있다. 역사는 찬장에 빵을 넣거나 곡식을 베는 행위이다. 역사는 재치 있는 별명, 심술궂은 속담, 목소리의 굴절, 기와의 윤곽, 노래 후렴이다. 결국 인간의 환상과 노동을 만들어내는 모든 것이다. 어떤 다른 재료보다 빨리 사라지는, 누구도 그 기록을 보존하려 하지 않는 재료이다.


민속학자들은 속담을 기록하고 방언과 민담을 녹취하고 언어학자들은 사라져가는 소수 민족의 언어를 기록으로 남긴다. 하지만 그렇게 감춰진 역사들 외에, 이미 '역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 모두의 하루하루도 권력/국가 위주의 역사기록 속에선 사라지게 마련이다.


이 때문에 말의 현혹과 축복이 끼어들어야 한다. 말에 도움을 요청하여 정신을 표현하듯. 여기서 말은 무익하게 소리치는 저세상의 그림자에 삶과 실체의 빛을 주기 위한 소박한 주문이다. 속죄를 바라는 마음이 없지 않다. 제삿날 우리가 서랍장 위에 성상과 호롱불을 놓고 행복을 빌듯, 개인적으로 작은 제단을 만들려는 의도가 있다.


이 작가의 작은 제단이 전해주는 따스함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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