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유럽이라는 곳

푸틴의 다목적 포석 ‘에너지 정치학’

딸기21 2014. 8. 10.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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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가 세계 최대 에너지회사인 국영 천연가스회사 가스프롬의 러시아 내 ‘독점체제’를 깰 태세다. 세계 에너지산업의 한 축인 러시아의 에너지부문 재편 움직임을 두고 해석이 분분하다. 중국으로의 에너지수출을 늘려 ‘아시아로의 축 이동’을 가속화하려 하는 것인 동시에, 서방의 제재에 맞서기 위한 다목적 포석이기도 하다. 가스프롬과 로스네프트, 두 개의 거대 에너지 기업을 보유한 러시아가 노리는 새로운 ‘에너지 지정학’은 어떤 것일까. 


푸틴 “가스프롬 독점 체제 재검토하라”


파이낸셜타임스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국영 가스회사 가스프롬의 천연가스 독점체제를 재검토할 것을 당국에 지시했다고 23일 보도했다. 푸틴의 지시에 따라 정부는 향후 몇 년 간 러시아의 최대 에너지 프로젝트가 될 시베리아 천연가스전을 가스프롬이 독점개발하게 할 것인지, 자국 내 다른 에너지기업들에게도 접근권을 줄 것인지 검토하기 시작했다. 검토 시한은 오는 9월 1일까지다. 그 때까지 살펴보고 결정을 내린다지만, 크렘린의 지시가 내려온 이상 가스프롬 독점체제는 깨질 가능성이 높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7월 31일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열린 행사에서 내빈들을 맞이하고 있다. _ 이타르타스연합뉴스


그렇게 되면 최대 승자는 국영석유회사 로스네프트가 된다. 러시아의 에너지산업은 세계 최대 가스회사인 가스프롬과 역시 세계 최대 석유회사인 로스네프트가 주도하고 몇몇 기업이 뒤를 따르는 구조로 이뤄져 있다. 2000년 집권한 푸틴은 소련 붕괴 뒤 경제를 좌지우지한 올리가르흐(신흥재벌)들을 내쫓고 에너지부문을 재국유화했다. 하지만 경제개발 속도가 늦어지자 다시 일부 자유화를 추진하고 있다. 가스프롬 독점을 깨는 것은 그런 재편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동시에 이는 유럽 대신 중국과 일본 등 아시아로의 에너지 수출을 늘리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유럽은 이미 포화상태의 시장이다. 게다가 우크라이나 사태 뒤 유럽은 러시아 제재를 시작했으며 장기적으로는 ‘러시아로부터의 에너지 자립’을 꿈꾸고 있다. 반면 고속성장을 하고 있는 중국은 러시아산 에너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다. 서방과 갈라선 푸틴은 요사이 중국과 밀착관계다. 지난 5월 상하이협력기구(SCO) 참석차 상하이에 간 푸틴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만나 30년간 중국에 매년 380억㎥의 천연가스를 공급한다는 계약을 맺었다. 금액으로 보면 4000억 달러(약 410조원) 어치다.


60조원 들어갈 ‘시베리아의 힘’ 프로젝트


중국에 그만큼의 천연가스를 팔려면 ‘시베리아의 힘’ 프로젝트가 완공돼야 한다. 550억 달러가 투입될 ‘시베리아의 힘’은 시베리아의 야쿠치아·코빅친스크 2개 가스전과 중-시베리아 간 파이프라인을 포함하는 대규모 에너지 개발계획이다. 가스프롬은 이 사업 비용을 대는 대신 독점 운영체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반면 로스네프트와 그 밖의 민간 에너지회사들은 가스프롬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사업이라며 자신들에게도 접근권을 달라고 요구해왔다. 로스네프트는 지난달 1일 가스프롬이 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제소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와 별도로 로스네프트는 지난달 15일에는 사할린2 가스전을 보유한 사할린에너지사를 지방법원에 제소했다. 사할린에너지는 가스프롬이 셸, 미쓰이 등 외국기업과 합작해 만든 회사로 가스프롬이 지분 절반을 갖고 있다. 두 공룡의 싸움에서 푸틴은 로스네프트의 손을 들어주기로 결심한 듯하다. 푸틴은 시베리아 가스전 독점 재검토를 지시했을 뿐 아니라 로스네프트와 사할린에너지의 분쟁 대상이었던 트란스사할린 파이프라인에 대해서도 로스네프트의 접근권을 인정해줬다. 



이런 움직임이 ‘크렘린 이너서클’(푸틴의 측근들) 주도로 이뤄진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한때 망해가던 로스네프트를 세계 수위의 석유회사로 키운 인물은 이고르 세친 최고경영자(CEO)다. 세친은 푸틴의 고향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에 KGB를 거쳤고, 푸틴 밑에서 부총리를 지낸 측근 중의 측근이다. 수혜자가 될 또 다른 에너지 회사는 노바테크인데, 이 회사 대주주는 군보르그룹의 회장인 겐나디 팀첸코다. 역시 푸틴의 최측근이며 ‘푸틴의 금고관리인’이라고까지 불리는 사람이다. 푸틴 자신이 군보르그룹의 주주이기도 하다.


세친과 팀첸코는 모두 미국의 러시아 제재 대상 개인들 명단에 올라 있다. 로스네프트와 노바테크는 서방 제재로 외국으로부터의 장기 대출이나 투자유치가 힘들어진 상태다. 가스프롬 독점을 풀겠다는 방침의 이면에는, 시베리아 가스전을 이용해 제재 대상에 오른 푸틴 측근 기업들의 숨통을 틔워주겠다는 의도도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서방도 가스프롬은 못 건드린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은 우크라이나 사태 뒤 수차례 수위를 높이며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발표했다. 하지만 서방 진영 내에서조차 보조가 잘 맞지 않아 늘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친러 반군의 소행으로 보이는 미사일 공격으로 말레이시아항공기가 추락한 뒤, EU 28개국 대사들은 지난달 말 다시 러시아 제재에 합의했다. 무려 7시간 논쟁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고심 끝에 발표된 제재안은 푸틴 측근 등 8명에 대한 자산동결과 여행금지조치를 담고 있다. 그 중 아르카디 로텐베르크는 유도 마니아인 푸틴의 유도 파트너로 알려져 있다. 역시 푸틴의 이너서클로 분류되는 방크로시야(러시아은행)의 유리 코발추크 회장도 제재 대상에 올랐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이미 미국의 제재 대상자 명단에 들어 있다. 이번 제재안도 그다지 새로운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미국의 제재 대상에 가스프롬 계열사인 가스프롬방크가 들어 있기는 하지만, 유럽을 옥죄는 푸틴의 최대 무기인 가스프롬에는 미국도 유럽도 쉽사리 칼날을 들이대지 못한다. 영국 가디언은 “오히려 가스프롬의 역할은 더욱 커질 것”이라고 31일 전망했다. 러시아가 가스프롬을 통해 유럽과 러시아의 경제적 그물망을 더욱 촘촘하게 만들고 있다는 뜻이다. 


일례로 영국의 의료보장시스템인 국립건강서비스(NHS)는 가스프롬으로부터 에너지를 공급받는다. 가스프롬은 옥스퍼드대학, 축구클럽 첼시 등을 후원하는 큰손이기도 하다. 런던 리젠트파크 부근에 있는 가스프롬 글로벌사업부문 본부에서는 600명 넘는 직원들이 일한다. 가스프롬 자회사인 가스프롬마케팅앤드트레이딩(GM&T)은 2012년 연 순익이 3억7400만 파운드(약 6500억원)에 이르렀고, 영국 정부에 2000만 파운드 가까운 세금을 냈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 러시아 제재를 주장하고 있으나 이미 가스프롬과 영국의 관계는 분리하기 힘들 정도로 얽혀 있다. 에너지산업을 재편하려는 러시아의 계산 속에는 ‘서방은 가스프롬에는 맞서지 못한다’는 전제도 깔려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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