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에너지산업의 한 축인 러시아의 에너지부문이 재편될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유럽의 경제제재에 맞서 중국으로의 에너지수출을 늘려온 러시아가 ‘아시아로의 축 이동’을 가속화하기 위해 자국 에너지산업의 변화를 추진하려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푸틴 "가스프롬 독점 체제 재검토하라"
파이낸셜타임스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국영 가스회사 가스프롬의 천연가스 ‘독점체제’를 재검토할 것을 당국에 지시했다고 23일 보도했습니다. 정부는 시베리아 천연가스전을 가스프롬이 독점개발하게 할 것인지, 자국 내 다른 에너지기업들에게도 접근권을 줄 것인지 검토에 착수했습니다.
9월 1일까지 검토해 결정한다고 했지만 크렘린의 지시가 내려온 이상 가스프롬 독점체제는 깨질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그렇게 되면 최대 승자는 국영석유회사 로스네프트가 된다고 합니다. 러시아의 에너지산업은 세계 최대 가스회사인 가스프롬과 역시 세계 최대 석유회사인 로스네프트가 주도하고 몇몇 기업이 뒤를 따르는 구조로 이뤄져 있습니다. 2000년 집권한 푸틴은 소련 붕괴 뒤 경제를 좌지우지한 올리가르흐(신흥재벌)들을 내쫓고 에너지부문을 재국유화했지요.
하지만 경제개발 속도가 늦어지자 다시 일부 자유화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가스프롬 독점을 깨는 것은 그런 재편의 일환으로 보입니다.
유럽이 싫다면, 우리는 중국으로~~
동시에 이는 유럽 대신 중국과 일본 등 아시아로의 에너지 수출을 늘리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유럽은 이미 포화상태의 시장이죠. 게다가 우크라이나 사태 뒤 유럽은 러시아 제재를 시작했으며 장기적으로는 ‘러시아로부터의 에너지 자립’을 꿈꾸고 있습니다.
반면 고속성장을 하고 있는 중국은 러시아산 에너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서방과 갈라선 푸틴은 요사이 중국과 밀착관계입니다. 지난 5월 푸틴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상하이에서 만나 30년간 중국에 매년 380억㎥의 천연가스를 공급한다는 계약을 맺었습니다. 금액으로 보면 4000억달러(약 410조원) 어치입니다.
60조원 들어갈 '시베리아의 힘' 프로젝트
그러려면 ‘시베리아의 힘’ 프로젝트가 완공돼야 합니다. 550억달러가 투입될 ‘시베리아의 힘’은 시베리아의 야쿠치아·코빅친스크 2개 가스전과 중-시베리아간 파이프라인을 포함하는 대규모 에너지 개발계획입니다.
가스프롬은 이 사업비용을 대는 대신 독점운영체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로스네프트를 비롯한 다른 에너지회사들은 가스프롬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사업이라며 자신들에게도 접근권을 달라고 요구해왔습니다.
로스네프트는 지난 1일 가스프롬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제소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이와 별로도 로스네프트는 15일에는 사할린2 가스전을 보유한 사할린에너지사를 지방법원에 제소했습니다. 사할린에너지는 가스프롬이 셸, 미쓰이 등 외국기업과 합작해 만든 회사로 가스프롬이 지분 절반을 갖고 있습니다.
두 공룡의 싸움에서 푸틴은 로스네프트의 손을 들어주기로 결심한 것처럼 보입니다. 푸틴은 시베리아 가스전 독점 재검토를 지시했을 뿐아니라 로스네프트와 사할린에너지의 분쟁 대상이었던 트란스사할린 파이프라인에 대해서도 로스네프트의 접근권을 인정해줬습니다.
이런 움직임이 ‘크렘린 이너서클(푸틴의 측근들)’ 주도로 이뤄진다는 점도 눈길을 끕니다.
이면에선 푸틴 측근들의 냄새가...
한때 망해가던 로스네프트를 세계 수위의 석유회사로 키운 인물은 이고르 세친 최고경영자입니다. 세친은 푸틴의 고향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에 KGB를 거쳤고, 푸틴 밑에서 부총리를 지낸 측근입니다.
수혜자가 될 또 다른 에너지 회사는 노바테크인데, 이 회사 대주주는 군보르그룹의 회장인 겐나디 팀첸코입니다. 역시 푸틴의 최측근이며 ‘푸틴의 금고관리인’이라고까지 불리는 사람입니다. 푸틴 자신이 군보르그룹의 주주이기도 하고요.
세친과 팀첸코는 모두 서방의 러시아 제재대상 개인들 명단에 올라 있습니다. 로스네프트와 노바테크는 서방 제재로 외국으로부터의 장기 대출이나 투자유치가 힘들어졌습니다. 시베리아 가스전을 이용해 이들의 숨통을 틔워주겠다는 의도도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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