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유럽이라는 곳

러시아 타협할수도, 더 고립될 수도 없는 푸틴의 딜레마

딸기21 2014. 7. 20.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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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항공 MH17 여객기가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격추된 다음날인 18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최악의 피해를 입은 네덜란드의 마르크 뤼터 총리와 말레이시아의 나집 라작 총리에게 애도 메시지를 보냈다. 푸틴은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조사”를 지지한다고 했고, 우크라이나 위기의 평화로운 해결을 촉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푸틴은 우크라이나 정부가 비극의 책임을 져야한다고 강조했다. 


이튿날 러시아 외교부는 “일부 국가들이 이 사건의 원인과 관련해서 아직 조사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러시아를 비난하는 것은 당혹스럽다”는 성명을 냈다. 외교부는 “러시아는 가장 먼저 독립적이고 투명한 조사를 촉구한 나라”라고 강조했다. 이어 드미트리 로고진 부총리는 트위터에 “미국이 이 사건을 놓고 음모론을 퍼뜨리고 있다”며 10여년전 이라크 대량살상무기(WMD) 의혹을 퍼뜨린 뒤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와 같은 방식이라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 


러시아의 이런 반응이 정말로 ‘억울해서’인지, 빗발치는 비난을 일단 피하고 보려는 것인지는 알수 없다. 현재로선 두 측면이 모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확실한 것은 ‘반(反) 서방’ 강경행보로 일관해온 푸틴이 딜레마에 봉착했다는 사실이다. 


우크라이나는 민항기를 격추시킨 무기가 러시아제 미사일이고 그 운영체제를 러시아가 들여보내줬다는 등의 ‘정황증거’를 들며 러시아 책임론을 주장한다. 하지만 이미 현장이 심하게 훼손된 상황에서 러시아 책임론을 입증할 ‘스모킹건(결정적 증거)’를 찾기는 힘들 것으로 외신들은 보고 있다. 미국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사건 뒤에도 신중한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증거가 있든 없든 푸틴의 이미지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최근 몇년 간 푸틴은 인권탄압으로 악명 높은 시리아 정부를 지원하고, 크림반도를 병합하며 국제사회의 무법자처럼 행동했다. 영국 국제안보전문가 조너선 이얄은 시사주간지 옵저버 기고에서 “푸틴은 지금 코너에 몰려 당혹스러워하는 것 같다”며 이번 사건이 푸틴 통제를 벗어난 반군들의 소행일 가능성에 무게를 실었다. 하지만 그는 “푸틴에게는 그동안 이런 재앙을 막을 기회가 많이 있었다”며 최종책임은 결국 푸틴에게 있다고 지적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반군이 사고조사에 협력하도록 푸틴이 압박을 하지 못한다면 그 자신에게 돌이킬수 없는 일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9개월째에 접어드는 우크라이나 위기 내내 서방은 단합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러시아 경제제재는 무력했다. 하지만 민항기 피격 이후 서방의 분위기는 확연히 달라졌다.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은 PBS 인터뷰에서 “푸틴이 너무 막 나갔다는 것을, 우리는 더이상 지켜보지만은 않을 것임을 알려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외무장관은 “모스크바가 해법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음을 보여줄 마지막 기회”라고 경고했다. 영국은 자국민 10명이 숨진 것으로 드러나자 독자제재를 검토 중이다.


지금이라도 푸틴이 러-우크라이나 접경지대에 분쟁을 막을 국제감시단 배치를 허용하고, 러시아산 무기가 우크라이나 반군에 공급되는 것을 막고, 사고조사가 제대로 이뤄지도록 반군에 압력을 행사한다면 러시아가 더 고립되는 일을 막을 수도 있다. 하지만 크림병합이나 서방과의 대치를 ‘강한 러시아의 부활’처럼 선전해온 크렘린에게 이런 양보가 쉽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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