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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서로 다른 에너지 정치학

딸기21 2013. 10. 22.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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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개발하지 못했던 바다밑 거대 유전, 남극에 가까운 파타고니아 사막의 셰일가스전.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각기 막대한 잠재력이 있는 유전과 가스전의 개발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브라질이 여러 규정을 우겨넣어 국영기업에 최대한의 몫을 준 반면, 아르헨티나는 국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국 기업과 손을 잡았네요.

 

리브라 유전은 브라질 남동부 에스피리투산투주 해안에서 800km 떨어진 바다 속에 있는 심해 유전입니다. 바다밑 2000~3000m 깊이의 암염층 밑에 있어 ‘암염하층(pre-salt) 유전’이라 불리는데, 기존 채굴기술로는 원유를 캐내기 힘들고 막대한 투자비용이 들어가지만 잠재성은 크다고 합니다. 룰라 다 실바 대통령 시절 잇달아 발견됐는데, 그 중 가장 큰 유전인 투피 유전은 나중에 아예 '룰라 유전'이라고 명명되기까지 했지요.


브라질 해안의 암염하층 유전. 이미지 petrobras.com.br


브라질 정부는 암염하층 유전 중 가장 먼저 개발될 예정인 리브라의 운영권을 경매에 붙였습니다. 21일 실시된 ‘경매’에서 리브라 운영권을 따낸 것은 브라질 국영석유회사인 페트로브라스를 필두로 한 국제컨소시엄이었습니다. 페트로브라스는 컨소시엄 내에서 40%의 지분을 갖고, 영국-네덜란드계 셸과 프랑스의 토탈이 20%씩, 중국석유가스공사(CNPC)와 중국해양석유총공사(CNOOC)가 10%씩을 갖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세계 에너지 업계의 관심을 모았던 리브라 개발권 경매의 결과는 정해져있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입찰자가 하나뿐이었기 때문입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사실상 경매는 없었다”고 보도했습니다.


이유는 브라질 정부 규정에 있습니다. 2007년 이후 막대한 양의 원유가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바다밑 ‘메가필드(초거대유전)’들을 잇달아 찾아낸 브라질은 외국 기업의 투자를 받으면서도 수익이 덜 빠져나가게 하려고 새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유전 소유권을 투자기업에 이전해주지 않고 정부가 계속 갖되, 기업들은 운영이익을 챙겨간다는 것이었습니다(파이낸셜타임스의 설명을 빌면 concession based system에서 production sharing arrangement로 바뀐 것이라고 하는데 상세한 것은 저도 잘 몰라서;;). 그러면서 유전 운영권의 30% 이상을 페트로브라스가 가져야 한다는 단서를 붙였습니다. 그러니 페트로브라스가 끼어있는 컨소시엄이 아니고서는 사실상 입찰을 할 수 없다는 거지요. 



리브라 유전은 2019년부터 채굴을 시작, 35년에 걸쳐 하루 100만배럴 이상의 원유를 뽑아낼 것으로 추정됩니다. 전체 투자규모는 460억달러(약 49조원)에 이른다고 하고요. 컨소시엄 측은 채굴이 시작되면 이익의 41.6%를 브라질 정부에 넘겨야 합니다. 


하지만 이 정도만 해도 ‘국부 유출’이라며 국민들은 거세게 반발했습니다. 현지 일간 상파울루데폴랴는 ‘경매’가 진행된 리우데자네이루의 고급호텔 밖에서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고, 결국 연방 폭동진압경찰이 강제진압에 나섰다고 보도했습니다. 페트로브라스 노조도 “외국 기업들이 끼어들면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노동조건을 악화시킬 지 모른다”며 반대했습니다. 중국 기업들이 브라질 진출을 시작한다는 것에도 거부반응이 많았다고 합니다.


브라질 정부는 페트로브라스를 지키는 데에 사활을 겁니다. 트로브라스는 곧 브라질 에너지산업과 동의어이기 때문입니다. 이 회사의 지난해 매출은 1441억달러로 브라질은 물론이고 라틴아메리카 최대 기업입니다. 직원이 8만여명에 이르는 거대 고용자이기도 합니다. 정부는 이 회사 지분 64%를 갖고 있습니다.

(사실 이번에 외국 기업들에게 리브라 유전을 개방한 것도, 페트로브라스에게 그만큼의 개발 자금이 없기 때문에 울며겨자먹기로 선택한 것이라는 분석이 있더군요. 페트로브라스가 투자할 수 있는 상한선이 40%였다는 것... 자금부담을 어떻게든 줄여주기 위해 유럽계와 중국계 기업 돈을 받는 고육책을 내놨다는 것... 그래놓고 브라질은 '성공적인 경매였다'고 자화자찬하고 있다는 것... 시장자유주의를 옹호하는 파이낸셜타임스의 해석입니다만 ㅎㅎ)


'석유업계의 철의 여인', 마리아 다스 그라사 시우바 포스터(60). 페트로브라스의 CEO입니다. 사진 offshoreenergytoday.com


앞서 미국 국가안보국(NSA)이 페트로브라스 경영관련 정보를 수집한 사실이 알려지자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은 격분하며 미국 방문과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까지 취소했습니다. 2010년 취임한 페트로브라스의 여성 최고경영자(CEO) 마리아 시우바 포스터는 '석유업계의 철의 여인'이라 불리는데,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습니다. 세계의 메이저 에너지기업 최초의 여성 CEO이기도 하지요.


잠시 아르헨티나로 옮겨가볼까요.


아르헨티나 남단 파타고니아 사막의 바카무에르타는 요즘 각광받는 셰일가스가 나오는 곳입니다. 셰일가스는 진흙퇴적층(혈암층)에서 빼내는 가스로, 고압의 물을 분사하고 화학물질을 사용해 추출한다고 하네요. 이 때문에 환경파괴가 많아 각국이 개발 문제를 놓고 고심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자신의 임기 내엔 프랑스 해안에서 셰일가스 개발을 하지 않을 것이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바카무에르타 개발을 놓고도 환경단체들과 원주민들의 반발이 거셌습니다. 아르헨티나의 인권·평화운동가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아돌포 페레스 에스키벨 등도 공개적으로 반대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최루탄과 고무총탄으로 시위대를 진압하게 한뒤 바카무에르타 개발권을 미국 셰브런에 내줬습니다. 


지난 3월 바카무에르타 개발 반대시위를 진압하는 경찰들. 사진 neuquenalinstante.com.ar


좌파, 포퓰리스트로 불리는 페르난데스의 결정은 이례적이었습니다. 페르난데스는 집권 기간 내내 서방기업들에 적대적이었거든요. 1990년대 우파 집권기간 미국과 국제통화기금(IMF)의 압력으로 대거 민영화한 에너지분야 일부를 다시 국유화했고, 이 때문에 외국기업의 투자는 크게 줄었습니다. 하지만 갈팡질팡하는 정책들 속에서 경제는 계속 나빠졌고 페르난데스의 인기도 떨어졌습니다.



페르난데스가 재국유화한 국영에너지회사(YPF)는 결국 지난 7월 셰브런에게서 150억달러의 투자를 받고, 향후 10년간 바카무에르타에 1500~2000개의 가스정을 뚫기로 했습니다. 남미 뉴스사이트 메르코프레스 등은 셰일가스가 아르헨티나 경제를 살릴 희망으로 여겨지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하지만 셰브런의 투자를 받는 것은, 미국에서조차 뜻밖의 일로 여겨지는 모양입니다. 뉴욕타임스는 21일 “파타고니아의 이상한 제휴”라는 기사에서 페르난데스의 결정이 이웃한 에콰도르까지 당황스럽게 만들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셰브런은 아마존 열대우림을 훼손해 에콰도르 정부에 190억달러를 물어줘야 할 판입니다. 페르난데스와 긴밀한 관계였던 에콰도르의 좌파 대통령 라파엘 코레아는 아르헨티나 내 셰브런 자산을 동결해달라고 요구했지만, 페르난데스는 이를 거절하면서까지 셰브런과 손을 잡았습니다.

 

아르헨티나의 행보는 브라질과는 사뭇 다르죠... 아르헨티나는 에너지부문의 75% 가량이 민영화돼 있고, 정책은 좌우의 극단 사이를 오가고 있습니다. 두 나라의 상반된 결정은 단순한 잣대로 판단하기 힘든 복잡한 에너지 정치학이 작용한 결과입니다. 수십년 뒤 두 나라의 상반된 선택이 어떤 성적표를 가져다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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