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6일
꿈같은 사하라의 구릉을 뒤에 남겨둔 채, 낙타를 타고 다시 2시간에 걸쳐 사하라를 나왔다. 사막 투어를 마치고 마라케시로 돌아오는 길은 멀고 멀었다. 2박3일에 걸쳐 쉬엄쉬엄 구경하며 들어갔던 곳을 다시 나오려니, 승합차량 안에서 하루 종일 보내야했다. 저녁 무렵 아틀라스를 다시 넘을 때에는 비가 오고 몹시 쌀쌀했다.
산꼭대기 휴게소에서 설탕 듬뿍 넣은 민트티를 마시는데 그 맛이란! 술을 즐기지 않는 이곳 사람들이 “베르베르에겐 이것이 술이나 마찬가지”라며 ‘베르베르 위스키’라 부르던 그 민트티. 박하 잎을 그대로 넣어 우린 차에 설탕을 넣으니, 시원한 박하향과 단맛이 어우러져.... 뭐랄까.... 후레쉬민트 껌의 향기랄까. ㅎㅎ 그런데 찬 바람 속에 이걸 마시니 몸이 사르르 녹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중동의 설탕 절반 물 절반 차이(홍차)와는 또 다른 맛.
페스의 밥 부 질루드, 메디나, 호텔 캐스케이드.
10월 27일
사흘간의 투어의 여독(?)을 푼다며 마라케시에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다. 늦잠을 자고 11시쯤 방에서 나와 N‘ZaHa 식당에서 아점을 먹고, 제마 엘프나의 63호 오렌지 가게에서 주스를 마시고, 청바지 하나를 샀다.
사막에서부터 시작된 가려움증이 심해지기 시작(무엇 때문에 생겼는지 모를 이 극심한 알러지는 그 후로도 몇달간 계속되어, 일본으로 돌아가고 한국으로 완전히 귀국한 뒤에야 없어졌다). 청바지 입고 다리를 긁으니 손톱이 새파래진다. 하루 종일 요니와 광장 주변 수크(가게)들을 돌아다니며 소소한 장신구들을 사고, 구경을 하며 놀았다.
10월 28일
이 날의 일정은 완전히 꼬였다. 라바트로 갈까, 카사블랑카로 갈까, 그냥 페스로 갈까 고민하다가... 미리 준비하지 못한 채, 결심이 늦어져 낮시간 페스행 기차를 타게 됐다. 8시간이나 걸리니 야간 침대열차를 탔더라면 숙박비 아끼고 시간 아끼고 좋았을텐데. 낮시간에 이동하려니 지겹기도 하거니와, 하루를 통채로 버린 느낌.
기차 안의 좌석 배치는 여러 모양이 있지만, 이날 우리가 탄 것은 4인용 좌석이 마주보고 있는 객실형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들, 또 우리 빼고 다 아는 사이들같아. 어쩜 이렇게 열심히들 수다를 떠는지, 초면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 가족적인 분위기. 여러 역을 지나며 승객이 바뀔 때마다 다시 즐겁고 가족적인 분위기로 대화가 오가는 곳. 모로코 사람들 참 이야기하기 좋아한다.
아기자기한 페스의 골목.
카사블랑카는 메디나(구시가지)가 없는 곳이고 영화 <카사블랑카>와도 전혀 상관이 없는 곳인데다(이 유명한 영화는 모로코에서는 한 장면도 찍지 않았다고. 그나마 나는 영화를 보지도 않았지만) 프랑스 식민지 시절 지어진 도시라고 해서, 한마디로 별 볼 것 없다고 해서 가지 않기로. 라바트 또한 이 나라의 수도라는 것 외에는 특이할 게 없다고 해서 그냥 통과. 그리하여 우리의 목적지는, 멕시코 여행자라면 들르지 않을 재간이 없는 페스! 오랜 기간 모로코의 수도였던 곳, 모로코인들의 역사와 '자존심'이 결집돼 있는 곳이 바로 페스다.
페스의 새 기차역에 내려서 메디나로 가려 하는데 택시가 잡히지 않는다. 라마단 끝난 지 하루 되었나, 전반적으로 명절 분위기가 지속되었던 듯. 북새통인 기차역 앞을 떠나 한참을 걷다가 택시를 잡아타고 10이르함에 메디나까지. 메디나의 입구는 밥 부 질루드 Bob Bou J‘loud, ‘질루드 문’이라는 커다란 문이 이곳 메디나의 랜드마크다.
페스의 메디나는 마라케시와 비교해 좁고, 더 지저분하고, 더 자존심 강하고, 더 복잡하고, 그리고 더 비싸다. 골목길 여관들을 들여다보니 어쩐지 으스스한 것이(정말로 위험하다는 게 아니라, 이날 비가 오고 기분도 그렇고 암튼 우리 상태가 거시기했다는 얘기다) 좀 꺼려졌다.
페스의 이나니아 메데르사.
론리플래닛이 시키는대로 밥 부 질루드 바로 옆에 있는 호텔 캐스케이드 Hotel Cascade에 짐을 풀었다. 이틀 묵는데 300디르함, 그나마 20디르함 깎은 것. 화장실도 샤워실도 ‘공용’에 방안은 눅눅하고, 심지어 방 안에 침대가 두 개인데 한 개에는 베개 위에 담뱃재까지.
론리플래닛의 설명이 기가 막히다. “One of the grand-daddies of the Morocco shoestring hotels.” 네, 알겠습니다... 여기는 호텔이라기보다는 저렴한 게스트하우스의 원조 격이라는 얘기. 그렇다고 딱히 불편할 것도 없는 게, 돌아보면 필요한 건 다 있다.
요니랑 둘이 “뭘 바래, 이 가격에” 하다가 여행서를 펼쳐보니 정말 그렇게 써 있다. “Don‘t expect much at the price.” 요니에게 이 구절을 보여주며 둘이 웃고, 그 뒤로 이 호텔에 나름 정이 들었다. 한 가지 좋은 점, 찾기 정말 쉽다는 점. 또 한 가지 좋은 점, 호텔 옥상에서 밥 부 질루드가 바로 내려다보인다는 점. 공동 사워실이긴 하지만 절절 끓는 물에 샤워하니 기분이 넘 좋아졌다.
10월 29일
호텔 옥상에서 메디나를 한 바퀴 둘러보고 내려와 1층 식당에서 아침 식사. 확실히 마라케시보다는 비싸다. 두드러기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고. ㅠㅠ
여기도, 페스의 이나니아 메데르사.
압 부 질루드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탈라아 케비라 Talaa Kebira 골목이 나온다. 과일 노점상들과 치즈 가게, 공예품 가게들이 참 이쁘다. 비 오고 을씨년스런 날씨이긴 했지만 그래도 페스의 이 골목을 좋아하지 않을 여행자는 아마 없지 않을까. 어쩌면 ‘여행’이란, 낯선 거리의 낯선 골목에서 낯익은 정겨움을 만나기 위한 것일 터이니 말이다. 페스의 메디나는 그야말로 ‘골목의 진수’를 보여준다. 어느 골목으로 들어가든 구경거리 천지다.
페스의 메디나는 겉에서 보나 안에서 보나 꼬질꼬질한데 여행 안내판 하나는 잘 돼 있다. 1999년 모하마드6세가 즉위한 뒤로 관광산업에서 드라이브를 세게 걸고 있고, 페스의 메디나도 그 일환으로 표지판들을 쫙 정비했단다. 내리막길을 걷다 보면 양 옆에 이쁜 가게들. 어디를 둘러봐도 이쁘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돌아다니게 된다.
탈라아 케비라에서 그리 많이 들어가지 않은 곳에 이나니아 메데르사 Medersa Bou Inania (이나니아 이슬람 학교)가 있다. 알함브라와 비슷한 14세기의 화려한 스타일. 마라케시의 이슬람학교보다 더 섬세하고 고풍스럽다. 입장료 10디르함.
이나니아를 나와 두리번두리번 걷던 여행자들의 발길을 잡는 곳은 페스 메디나 골목의 핵심인 아타린 메데르사 Medersa el-Attarine. 규모는 크지 않지만 정말 아름답다! 알흠다움으로는 이제껏 본 건물들 중 최고봉이다. 제법 여러 곳의 이슬람 시설을 다녀본 딸기의 말이니 믿어도 좋습니다. ^^
이런 곳에 드나들다보면 “알함브라는 솔직히 ‘유럽빨’이야”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눈 것이다. 규모와 유명세야 아타린이 훨씬 밀리지만 이 곳의 섬세한 아름다움은 세상 어느 건축물과 비교해도 손색 없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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