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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는 엄마, 노는 딸] 마법의 도시, 마라케시의 골목들

딸기21 2013. 8. 19.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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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2일 월요일, 둘째 날의 마라케시


아침은 어제 챙겨 넣은 빵과 슬그머니 훔쳐온 우유;;로 호텔 옥상에서 냠냠. 점심은 엊저녁부터 단골(우리 맘대로 ㅎㅎ)된 식당에서. 따진(tagine)이라는 음식. 고기와 올리브, 노랗게 사프란 물들인 감자, 토마토나 레몬, 가지와 콩 따위를 넣고 장독 뚜껑 같은 질그릇에 익혀 내온다. 정말 맛있다! 모로코가 스페인보다 열 배는 좋다며 즐거워한 요니.

골목골목 구경하다가 모로코 특산이라는 아르간 로션 하나 사고, 제마 엘 프나에 있는 카페 드 프랑스에서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려고 했으나... 유럽 관광객들 같은 '느긋한 포스'가 통 나지 않는다. 나는야 마음 급하고 엉덩이 가벼운 한국 여행자.



우편엽서를 붙이려고 우체국에 갔는데 줄이 길어서 포기. 여기도 온통 웨스턴 유니언. 바르셀로나에선 아마도 중남미 출신들이 송금하는 것이었을 테고, 여기서는 '수금'을 하겠지.

제마 엘 프나를 내려다보는 꾸트비아 광장(꾸트브 모스크가 있는 곳이라는 뜻)을 돌아다니고 꾸투브 미나레트를 잠시 구경. 산책하기엔 햇살이 좀 강하다는 느낌.

마라케시, 매연과 인파 속에서도 참으로 즐거운 도시다. 마라케시 구시가지(메디나는 원래 도시라는 뜻인데, 모로코에선 옛 시가지를 메디나라 부른다)의 제마 엘 프나 광장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그런데 광장 한 편의 알림판은 아주 소탈하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으리으리한 안내판을 화강석으로 세우고 시민들의 접근을 막았을 지도. 하지만 이 광장은 죽은 유산이 아니라 만나고 먹고 노래하고 사고파는 곳, 너무나도 생생한 현장이다. 소탈한 알림판도 그걸 강조하고 있다.




광장주변에는 수끄라 불리는 가게들이 꼬불꼬불 미로처럼 펼쳐져 있다. 어제오늘 이틀째 그 골목들을 누비고 있다. 오늘의 쇼핑, 50디르함짜리 머플러 두 장. 골목은 자전거와 오토바이와 당나귀 수레와 손수레로 혼 빠질 지경이다. 자동차가 없어서가 아니라 골목이 너무 좁아 차가 못 드나들기 때문.

그렇다고는 해도 모로코가 마그레브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못사는 나라인 건 사실이다. 관광으로 먹고사는 나라들이 다 그렇지만 거리엔 일자리 없이 여행자들 시중들어주고 푼돈 버는 젊은이들이 넘쳐난다.

제마 엘 프나에는 또 오렌지주스 트럭들이 널려있다. 값은 다 똑같이 4디함. 그 자리에서 갈아주니 맛있어도 너무 맛있다. 그 중 우리 단골집인 63호. 닷새 전 여기서 사마시면서 센스있는 아저씨 덕에 트럭 올라가 같이 찍었는데 카메라는 잃어버렸고…. 나중에 다시 와서 찾아가니 아저씨가 알아보네. 카메라 잃어버려서 다시 찍고 싶다니까 다시 요니 올려서 찍어줌.


우리 사막여행 기사님 유세프, 베르베르 가이드 유세프, 오렌지주스 아저씨 유세프, 쉬어갈 겸 두어번 들른 호텔 앞 바간지즈 카페 아저씨도 유세프. 유세프는 영어로는 조지프, 예수의 아버지인 요셉이다. 이슬람은 예수까지도 선지자로 인정하기 때문에 구약신약과 겹치는 이름이 많다. 일례로 솔로몬은 술레이만, 아브라함은 이브라힘, 예수는 이사, 모세는 무사 등등.

63호 가게에서 주스 마시고 돌아선 순간 눈에 띈 아기. 내 평생 이렇게 이쁜 애는 첨 봤다. 너무 귀여워서 엄마 허락받고 찰칵. 얘는 아기가 아니라 천사야...

그리고 요니를 뿅가게 만든 마술램프. 120디르함이나 주고 샀다. 요니는 이걸 들여다 보고 싶어서 가게들 구경하다 말고 호텔 돌아가자고 보챘다. 바가지 옴팡 썼다 생각해도, 암튼 이건 요니가 그냥 지나칠 수는 없던 물건이다. 우리 돈으로 1만8000원이니까 제법 비싼 편. 요니는 호텔 돌아와 비누로 열심히 닦고 쓰다듬고... "요술램프 안에는 지니 대신 제 눈을 즐겁게 하는 마법이 들어 있어요."


사실은 제마 엘 프나 주변의 모든 골목들이 눈을 즐겁게 해주는 마법의 지니였다. 어디서나 내가 사랑하는 모티프인 문. 크고 멋지거나 작고 멋진 문들을 보며 골목을 기웃거리자니 시간가는 줄 모르겠다. 특히나 여기는 번쩍이는 네온 간판이 없으니 가게 문만 닫으면 뭔 가게인지 모르겠다.

사막 가기 전에 이틀을 묵고, 다녀와서 다시 이틀 묵고 떠날 계획. 그런데 이 골목들, 질리지가 않는다. 호텔 부근 꺾어진 골목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니 골목마다 조금씩 다르면서도 정감 있는 분위기. 이것이야말로 와니 언니가 말한 '무서운 해운대 고층건물들'의 대척점에 있는 곳 아닐까. 허름해보여도 슬럼화하지 않는, 역사성과 일상이 아름답고 생생하게 엮여있는 곳.

론리플래닛에도 소개된 에덴 시네마도 그런 예다. 딱히 이유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극장이라 하기에는 정말 소박하지만 어쩐지 예뻐서 눈길 가는 곳. 마치 영화세트처럼 보이는 다채로운 벽. 이런 색감이 마라케시 메디나 골목엔 자연스레 걸쳐있다. 영화 '쉘부르의 우산'의 색감 같아. 과연 서울은 어떤 매력이 있고 어떤 골목이 있는지 자꾸 생각해보게 된다


마라케시에서 마음 한구석이 싸했던 적도 있기는 했다. 첫날 바히아 궁전에서 이라크 출신 여행자 아저씨를 만났다. 사진 찍어주셔서 "슈크란(감사합니다)" 했더니 아랍어를 아느냐며 반가워한다. 내가 아는 유일한 아랍어라고 했다.

이라크 분이라는 말에 어찌나 반갑던지. 이미 1986년에 영국으로 이주했고, 마지막으로 이라크에 다녀온 것은 2003년이란다. 지금은 카오스가 되어버린 이라크를 함께 슬퍼했다. 내겐 아픈 기억인 이라크. 중동, 아랍은 내게 무엇일까. 갑자기 9년 전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낮엔 취재하고 밤엔 방에서 울던 기억.


참, 상점 골목을 돌아다니다가 투아레그족 아저씨도 보았다. 세상에, 내가 투아레그족을 내 눈으로 보다니! '푸른 옷을 입은 사막의 사람들'이라 불리는 사하라 유목민인데, 그 푸른 천들 잔뜩 쌓아놓고 관광객에게 둘러준 뒤 사진 찍게 하고 돈 받는 장사를 하고 있었다. 웃픈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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