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8일 목요일, 그라나다로.
역시나 아침부터 바쁜 하루. 호스탈에서 나와 배낭 매고 짐 끌고(배낭을 캐리어로 만들어주는 휴대용 간이 바퀴손잡이 정말 유용했음) 터미널로. 커피 한 잔, 주스와 식빵으로 아침 때우고 고속버스 타고 그라나다로 이동. 하마터면 목적지 놓치고 버스에서 못 내릴 뻔 했으나, 버스에 올라온 어떤 아가씨가 자리 내놓으라 하는 통에 그라나다임을 깨닫고 후다닥 내림.
터미널에서 33번 버스를 타고 시내로. 이틀간 묵을 그라나다에서의 숙소는 호스탈 베네치아라는 쪼마난 여관이다. 하지만 앞길에 우리 호스탈 알려주는 표지판도 있음. 무슨 가이드북에도 소개됐다고 하네.
올라가 보니 주인 안 계심. 어딘가에 갔던 주인 할아버지가 잠시 뒤 오심. 우리에게 이것저것 주의사항을 얘기해주시고 다시 어디론가 사라지심. 1층의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시는 것으로 사료됨. 어찌 되었든 친절한 할아버지. 나는 영어로 묻고 주인장 할아버지는 스페인어로 대답하는데도 말이 통하네?
이때껏 묵은 곳 중 여기가 젤 좋았다. 소박하지만 어디 한곳 먼지 묻은 데나 지저분한 데 없이 다듬고 가꾸는 집. 이런 곳에 묵으니 기분이 참 좋구나. 그라나다 여행하려는 사람 있으면 적극 추천해주고파. 암튼 숙소는 좋은데 복도에 전기히터가 켜져 있었다. 춥냐 여쭈니 할아버지가 침대에 덮인 두터운 이불을 보여주신다. 그리고 옷장엔 담요가 수북. 그러니 걱정 말라신다...고 함은 춥다는 얘기... ㅠㅠ
낮밤 기온이 정말 다르다.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선 두터운 이불이 있었고 발렌시아와 알리칸테에선 낮 동안 따뜻하다가도 밤이면 얇은 이불 속에서 고생했다. 나는 긴팔 티셔츠에 얇은 트레이닝 점퍼까지 입고 자고, 요니는 긴팔에 이불 걷어차고 자다가 새벽이면 추워 떤다. 그라나다는 남쪽인데도 밤 되니 기온이 뚝 떨어진다. 전날 알리칸테에서 지중해에 풍덩했던 것이 한 계절 전의 일인 듯 싶다.
방 크고 세면대 있고, 트윈베드 붙여놓아 잠자리도 넓고. 샤워실과 화장실은 밖에 있지만 방 안 세면대에 핸드솝이 있어서 빨래도 완료! 그런데 참 특이한 것이, 스페인은 와이파이 암호가 무지 길어야 하나보다. 여기도 대문자로 열 네 글자네.
짐 정리해 두고 요니와 손잡고 길을 나섰다. 오후에 도착한지라 알함브라는 못 가고 대성당과 알바이신 언덕만 둘러봤다. 대성당 아기자기하고 괜찮음. 부근에서 기념품으로 예쁜 타일들을 샀는데, 이 동네는 사실상 북아프리카 이슬람권 분위기다.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지금도 '이슬람풍'을 보러 오는 관광객들에게 의존하는 지역이라 그런 듯.
그라나다의 협곡(?)을 사이에 두고 한쪽에는 알함브라 궁이, 반대쪽에는 알바이신 언덕이 있다. 알바이신 언덕에 올라가야 알함브라의 전모를 구경할 수가 있다. 오후에 알바이신 언덕을 누비며 돌아다녔다. 알함브라를 넘어 저 멀리 머나먼 산지까지 몽땅 바라볼 수 있는 미라르도 산 니콜라 Mirador San Nicolás in Granada. 가슴속까지 시원해지는 느낌. 전망 좋은 카페에 앉아 핫초코와 차를 시켜 요니와 마셨다. 기분 좋은 저녁.
사크로몬테라는 게 보여서 들어갔는데 유료... 그런데 별 볼일 없는 고대 주거지 모형들만 있었음. 어느새 날이 어두워져서 허위허위 내려왔다. 다시 호텔 앞길로 돌아올 무렵엔 완전 녹초. 요니가 고기를 공급해달라고 해서 식당에 들러 돼지고기와 양고기를 사줬다. 26.5유로. 요니 완전 폭풍 흡입. 수퍼마켓에서 감자칩과 우유를 사들고 숙소로.
여러 도시를 거쳐 오면서 스페인의 첫인상은 많이 바뀌었다. 마드리드에선 지저분하다는 느낌이 강했는데 바르셀로나는 그럭저럭 참을만한 수준, 발렌시아와 알리칸테는 깨끗하고 그라나다는 정말 깔끔했다. 여러분, 스페인은 지저분하지 않습니다!!!
다음날인 19일의 목적지는 당연하게도 알함브라.
아침 6시 20분에 일어나서 씻고 올라가 표를 샀다. 알함브라는 미리 인터넷으로 예약해 표를 사서 가든가, 아니면 우리처럼 새벽부터 올라가 줄 서서 사야 함. 8시 20분까지 2시간 동안 기다렸다가 마침내 표 구입. 이 때 들어가서 바로 구경을 했어야 하는데, 비가 오고 으슬으슬 정말 너무 추웠다. 뭐 잘 모르고 해서 내려와서 방에서 1시간 자고 10시 30분부터 알함브라 구경을 시작했다.
알함브라에는 나스리드 궁전과 알 카사바(요새), 헤네랄리페 정원, 크게 이렇게 세 덩어리의 볼 곳이 있다. 비가 아주 조금씩이긴 하지만 끊임없이 내려와(그런데도 옷이 안 젖는 정말 신기한 비 @.@) 으슬으슬. 하지만 궁전의 테라스와 요새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은 정말 멋있었다.
황무지 속의 언덕, 수풀과 정원, 붉은 성채와 푸른 잎들이 조화를 이룬 곳. 그리고 물. 냇물, 인공 수로, 정원의 샘, 복도의 교차로에서 어김없이 기다리는 작은 인공 샘물들. 이란식 정원의 안달루스 버전인 셈이다. 파라다이스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란의 정원을 가리키는 말에서 따온 것이라고 했다. 지금도 이란의 집들은 네모난 안마당에 반드시 샘을 둔다고 한다. 페르샤의 낙원이 아랍을 거쳐 이베리아의 언덕에서 발현된 것이니 재미있다.
쉬엄쉬엄 걷다 보니 어느새 두 시가 넘어있었다. 티켓의 유효시간이 두 시까지여서 헤네랄리페는 정원만 보고 궁전을 보지 못한 채 그냥 내려왔다. 아쉬워라. 돌이켜 보면, 스페인에서 가장 기대했던, 가장 유명한 두 곳, 그러니까 바르셀로나의 가우디 건축물들과 그라나다의 알함브라는 오히려 만족도가 떨어지는 쪽에 속했다.
알함브라는 이베리아를 장악했던 이슬람 왕조의 건축물이다.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 일대를 다스린 알모라비드 왕조 시기 건축물 특유의 장식성은 정말 짱이다. 말하자면 1. 이슬람 건축물 중에서도 특히 장식성이 뛰어난데다 2. 보존 상태가 아주 좋고(이사벨과 페르난도가 레콩퀴스타에 성공한 뒤 마침내 그라나다에 입성한 것이 1492년, 콜롬부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닿은 바로 그 해다. 이사벨과 페르난도가 저지른 악행은 많지만 이슬람의 보석인 알함브라를 부수지 않고 그대로 둔 것만은 칭찬해주고 싶다) 3. 주변 자연경관과의 조화가 잘 이뤄져 있다. 이런 것들이 알함브라의 명성을 만든 요인이랄까.
알함브라가 즐겁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슬람 왕조의 찬란한 장식들보다는 이 유적 전체가 좋았다. 하지만 이 유적이 이토록 유명해진 것은, 솔까말 이슬람 건축물 중 최고봉이어서가 아니라 ‘유럽에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맞을 듯. 안 가봤지만 이스파한이나 뭐 그런 데 가면 더 찬란한 유적들도 많을 것 같은데...
구경 잘 해놓고 삐딱해진 이유- 첫째, 그날 날씨가 안 좋았음. 둘째, 시간제한에 경로 제한에... ‘제한’이 많은 유명 관광지의 특성으로 인해 여행객으로서 누려야 할 즐거움이 팍팍 줄었음. 내가 생각하는 이슬람 건축물의 묘미는, 더울 때 들어가서 대리석 바닥에 맨발로 돌아다니고, 양탄자 위에 잠시 편히 앉아 고즈넉한 분위기를 즐기며 쉬는 것, 그러다가 간혹 다른 여행자를 만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땀 식히고 나오는 것.
하지만 알함브라는 그런 모든 걸 누릴 수 없는 관광지일 뿐이었다. 그 유명한 ‘사자의 정원’은 대리석 안마당 주변에 통행금지 금줄 쳐놔서 주변 회랑에 멀찌감치 서서 구경하게 돼 있음. 이런 거 별로였음.
아침부터 비와 추위 속에 떨었더니 둘 다 감기몸살 일보직전. 엄청 춥다. 끄으응… 아픈 건 아니지만 다음날은 그라나다에서 알헤시라스로, 거기서 배 타고 탕헤르로, 잘하면 탕헤르에서 다시 야간열차로 마라케시까지 달릴 계획이라 컨디션 조절할 필요. 그래서 오후 네 시에 숙소 돌아와 나란히 이불 속에 콕 박혔다. 요니도 태블릿PC 끌어안고 두꺼운 이불에 나보다 먼저 파묻히는걸 보니 춥긴 추웠던 모양이다. 할아버지 몰래 방 안에 전기히터도 틀었다. 히히.
이 여행에서 사진 찍는 걸 맡아하고 있는 요니. "사진 '기사' 작위를 어린 나이에 얻었다"면서 좋아했다. 그래서 '찍작'이라는 작위 하나를 만들어 하사했다(아, 이 카메라 잃어버린 거 계속 아쉬워 흑흑). 덩치는 컸는데, 트윈베드 붙여놓고 자면서도 엄마랑 딴 이불 덮으니 잠 안온다고 꽁알거리는 애기. "(엄마랑) 닿은 부분이 한군데도 없어!" 하며 슬퍼하길래 손을 잡아주니 그제야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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