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얘기 저런 얘기/딸기의 하루하루

우리 집

딸기21 2001. 11. 24. 19:49

"우와, 감이 많이 열렸네. 나 고등학교 때 저 나무에서 감 많이 땄었어." 
얼마전에 차를 타고 지나다가 홍제동 골목의 어느 집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열린 것을 보고 이렇게 말을 했더니, 남편은 "어떻게 네가 저 집 감을 땄느냐"면서 의아해했다. 나의 남편은 부인의 말을 늘 흘려듣기 때문에, 저런 질문을 하곤 한다. 언젠가 지나치면서 이미 말해준 적이 있었는데. 

아주 오래 전에 화장터가 있어서(이미 옛날에 국민학교로 변했지만) 지금도 '화장터길'이라고 불리는 샛길 가운데 있는 그 집, 감나무에 가지가 늘어지도록 감이 열려있는 그 집은 원래 우리집이었다. 지금도 우리집이라는 느낌 밖에 들지 않는 그 집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집이다. 
요 며칠 드물게 짙은 안개가 끼더니, 오늘은 하루종일 밖이 뿌옇고 흐리다. '안개 속을 헤매면 이상하여라' 나무도 돌멩이 하나도 모두가 혼자인 그런 안개낀 날, 더욱이 그 날이 토요일이고 보니 집에 혼자 앉아있으면서 갑자기 어린 시절과 '우리집'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됐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동네-라고 해봤자 아주 작은 규모의 가난한 동네였지만-에서는 우리 집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판자촌 수준의 무허가주택들로 가득찬 동네에서, 우리 집만 근사한(내가 생각하기에는) 2층 양옥집이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사람들이 우리 집을 '불란서집'이라고 불렀는데, 서양 집들처럼 보여서 그랬다고 한다. 
굳이 묘사를 하자면 초록색 지붕에 빨간 벽돌로 만들어진 2층 집인데, 영화에 나오는 집들을 흉내낸 것처럼 생기긴 했었다. 마루 한가운데에는 2층 지붕까지 뻗어올라간 굴뚝이 있었는데, 굴뚝에는 크고작은 돌이 박혀 있었다. 그 돌을 밟고 굴뚝을 타고올라가 천정을 만지고 내려오는 것이 중요한 놀이 중의 하나였다. 
제법 그럴듯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실은 말이 좋아 2층 양옥이었을 뿐 아래 층에 1개, 위층에 1개-방이 딱 2개밖에 없었다. 빨간 카페트를 깔아놓은 마루(이것도 내 친구들에게는 부러움과 경이의 대상이었는데)만 휑하니 넓었다. 나중에 커서 엄마에게 왜 방이 두 개 뿐이었느냐고 물었더니, "돈이 없어서" 그렇게 된 거였단다. 부모님이 결혼 뒤 집을 지으셨는데, 알고 지내던 어느 건축가에게 설계를 맡겼다고 했다. 이 건축가 아저씨가 제법 멋있는 설계를 해 주셨는데 그대로 지을 돈이 없어서 이거 빼고 저거 빼고 하다보니 희한한 집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어쨌든 마당도 있고, 마당에는 바위랑 나무랑 개랑 그네까지 있었다. 국민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그 집을 헐고 4층 짜리 건물을 짓는 바람에 어린 시절 추억의 '불란서집'은 없어졌다. (언젠가 얘기한 적이 있던가? 집을 헐던 날, 학교 가는 나에게 엄마가 집 헌다는 얘기를 안 해줘서...학교 갔다 와보니 집이 없어져버려 몹시 충격받고 어리둥절했던, 그런 황당한 일이 있었다) 

그 뒤로 중학교, 고등학교 다닐 동안 4층 건물의 1층에 살았다. 감나무는 새 집 지은 뒤에 들어왔는데, 내가 그 집에 살 때에는 감이 지금처럼 많이 열리지는 않았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에 사정이 생겨-굳이 말하자면 집이 망해서, 그 집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외가로 들어갔다. 그러니까 감나무가 있는 그 집은 나에게는 온전한 추억의 덩어리 그 자체이면서, 동시에 가장 마음 아픈, 그런 부분이기도 하다. 벽돌담만 쳐다봐도 눈물이 나는. 
엄마는, 그 집 밑에 수맥(水脈)이 있어서 일이 잘 안 풀리는 거라고 하셨었다. 집 밑에 물이 지나면 재수가 없단다. 그 집 밑에는 정말 수맥이 있었던 모양이다. 장마철만 되면 지하실에 물이 차서 양수기로 빼내는 것이 큰 일이었다. 

거리를 단축하기 위해 가끔 화장터길을 넘나드는데, 지나가다 그 집을 보면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한다. '이 동네에는 다신 안 와야지'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요새는, 그 집 벨을 누르고 "마당 한번만 보고 가도 될까요"라고 말하는 내 모습을 상상해보곤 한다. 집은 집대로 감정이 있어서 누구와 함께 살고있는지에 따라 표정이 바뀌고, 느낌이 달라지는 건데 어떻게 변했는지, 그 집 마당에 있던 라일락 나무와 후박나무, 단풍나무, 돌배가 열리던 배나무, 지하실, 담벼락에 동그랗게 뚫린 구멍, 그런 것들은 어떻게 됐는지 한번 보고 싶다. 

마당의 도마뱀을 그늘로 옮겨 구해준 일, 대문 앞에 사마귀가 있어서 겁이 나서 집 밖에 나가지 못했던 일, 커다란 콜리와 차우차우를 기르던 일, 대문 앞에 앉아 매일 저녁 엄마를 기다리던 일, 마당에 눈사람 세우던 일, 후박나무의 높은 가지에 올라가 놀던 것, 숨바꼭질 따위. 그런 내 기억들이 지금은 그 집에서 모두 사라져버렸는지, 아니면 어딘가에 숨어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 > 딸기의 하루하루' 카테고리의 다른 글

꼼꼼이는 이담에 지휘자가 될 것이다  (0) 2002.04.05
Fernando, 그리고 10년 전의 겨울  (0) 2001.12.11
우리 집  (0) 2001.11.24
지금, 왜, 여기에 있는 것일까  (0) 2001.06.26
피해다니기  (0) 2001.05.13
헬로 키티  (0) 2001.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