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 핵 기술을 전해준 것으로 알려진 파키스탄 ’핵의 아버지’ 압둘 카디르 칸(77) 박사가 “북한이 핵무기를 쓸 가능성은 낮다”며 핵 위협을 평가절하했다.
칸 박사는 9일 미국 폭스뉴스와 인터뷰하면서 “그들(북한)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다”며 핵무기 사용 가능성은 낮다고 전망했다. 북의 위협은 선전용일 뿐이라는 것이다.
칸은 “북한은 아주 작은 나라여서, 미국이 (핵폭탄을) 한 발만 떨어뜨려도 지도에서 사라질 것”이라며 “북한과 미국 모두 이를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칸은 1990년대 북한의 핵 기술, 미사일 기술 개발을 도왔음을 다시한번 시인했다. 그는 “그 때 우리(파키스탄)는 미사일 프로그램을 갖고 있었고, 두 차례 북한을 방문해 그들과 공식적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고 말했다.
파키스탄 ‘핵의 아버지’로 불리는 압둘 카디르 칸 박사. 경향신문 자료사진.
칸은 파키스탄-이란-북한으로 이어지는 ‘삼각 핵 커넥션’의 연결고리로 지목됐던 사람이다. 인도 보팔 태생으로 1952년 파키스탄으로 이주했으며 카라치대학을 졸업하고 독일과 벨기에에서 유학했다.
영국-독일-네덜란드 합작기업인 우렌코의 우라늄 농축시설에서 일하다가 76년 핵기술을 가지고 돌연 파키스탄으로 돌아왔다. 혈혈단신으로 귀국한 그는 당시 줄피카르 부토 정권을 설득, 핵무기 개발을 시작했다. 당시 인도가 먼저 핵무기 개발에 나선 상태였고, 파키스탄은 인도와 역내 패권을 놓고 경쟁하던 차였다.
1998년 가우리미사일 발사에 성공함으로써 칸은 국민적인 영웅이 됐다. 하지만 핵 개발을 주도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서방의 추적을 받기 시작했으며, 특히 북한·이란과의 커넥션 의혹 때문에 미국의 적으로 부상했다.
이라크전쟁으로 사담 후세인 정권이 무너진 걸 지켜본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전 국가원수가 2004년 미국에 백기를 들고 핵 관련된 정보를 내놓음으로써 칸은 궁지에 몰렸다. 칸과 관련된 핵 기술 암거래 사실들이 속속 드러난 것이다.
칸과 북한의 거래 의혹을 추적하던 미 중앙정보국(CIA)은 칸이 수차례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 등을 만났으며 우라늄 농축시설 설계도를 전달한 정황을 파악했다. 리비아가 핵무기 개발 전단계까지 갔던 것도 1990년대 말 칸 측을 통해 핵탄두 설계도와 우라늄 농축용 원심분리기 부품 등을 손에 넣었기 때문으로 분석됐다.
파키스탄이 자랑하는 중거리 탄도미사일인 하트프V(가우리) 미사일. 사진 defenceforumindia.com
미국은 파키스탄의 페르베즈 무샤라프 정권을 압박해 칸과 관련된 의혹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궁지에 몰린 칸은 결국 2004년 무샤라프에게 북한·이란·리비아에 핵 기술을 팔았음을 시인하고 사면을 요청했다.
칸은 핵기술자이기도 하지만 1990년대 말부터 파키스탄 문맹퇴치 캠페인 등을 이끌어 국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무샤라프는 ‘모든 것을 공개하고 사과하는’ 대가로 칸을 사면했다. 칸을 처벌하거나 미국에 인도했다가는 국민들의 대대적인 반발에 부딪칠 게 뻔했기 때문이다.
한때 의회에서 청문회를 하고 군이 칸을 조사한다고 소동을 벌였지만 파키스탄 내에서 칸은 한번도 정식 기소된 적이 없다. 미국 우익 방송인 폭스뉴스는 “이번 인터뷰도 이슬라마바드에 있는 칸의 ‘호화로운 저택’에서 이뤄졌다”고 보도했다.
칸은 최근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칸은 지난해 11월 ‘파키스탄 구하기 운동(Tehrik-i-Tahaffuz-i-Pakistan)’이라는 정당을 창설했다. 파키스탄 일간 ‘돈(DAWN)’은 지난달 “칸은 국민들 사이에 인기가 높지만 오는 5월에 실시되는 총선에는 출마하지 않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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