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얘기 저런 얘기

간장선생

딸기21 2001. 11. 19. 17:17

비디오로 '간장선생'이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아지님이 빌려왔길래...당근(?) 중국영화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비디오 예고편 지나가고 나니까 화면에 '東映'이라는 자막이 뜨더군요. 어, 일본 영화잖어...올초에 비디오로 '춤추는 대수사선'을 보고나서 엄청나게 실망했으며 또한 봄에 영화관에서 '올빼미의 성'이라는 재미없고 엽기적인 영화를 본 뒤 일본 영화에 대한 꿈(?)을 잠시 접은 차였는데... 

이마무라 쇼헤이. 히히히...이름을 들어본 기억이...방금 전에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아보니까 꽤나(어느 정도인지는 잘 모르지만) 유명한 감독이군요. '나라야마 부시코', '우나기'. 모두 제목을 들어본 적이 있는 작품인 걸 보면요. 황금종려상...이것도 유명한 상이죠, 아마. 

전쟁, 공습, 폭격, 등화관제. 좋지 않은 단어들인데 여기에다 '천황'과 '원자폭탄'이라는 말까지 붙이면...그런데 무슨 영화가 이렇게 재미있는지^^ 
영화이건 소설이건,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재치'와 '페이소스'입니다. 아사다 지로의 '프리즌 호텔'을 아주 즐겁게 읽었던 이유도, 그 만화같은 작법에도 불구하고 재치와 페이소스가 넘쳐났기 때문이었죠.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도 마찬가지고요. 



1. 재치 

의사와 창녀. 신파조의 궁합이 아니라, 사랑과 우정으로 맺어진 부녀간 같은(가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하지만) 관계. 주인공 '간장선생'과 '동네 창녀' 소노코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어느 작은 바닷가마을에서 '창녀'의 존재는 대체 어떤 거였을까요. 
"아들놈이 창녀랑 결혼을 한다니, 스님이 좀 말려주세요"(어떤 엄마) 
"창녀가 어때서, 나도 창녀랑 살고 있잖아"(스님) 
"절대 공짜로는 해주면 안돼, 네가 좋아하는 딱 한 사람한테만 공짜로 해주는 거야'(창녀의 엄마) 
"엄마가 절대 공짜로는 해주지 말랬어요"(창녀) 
아, '창녀'라는 것이 저런 어감으로 쓰일 수도 있구나, 어쩌면 저것이 진실이었는지도 모르겠구나,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이 다 그렇고 그런 것일텐데, 저런 얼굴을 포착할 수도 있구나...여러번 '흔쾌히' 웃었습니다. 
미인대회에서 뽑혀 전격 발탁됐다는 '창녀'역의 아소 구미코라는 배우의 예쁜 얼굴과 천연덕스런 연기가 아주 맘에 들었습니다. 

2. 페이소스 

보통의 상식으로는 말도 안 되는 웃기는 인간들(모르핀 중독 의사, 알콜중독 스님, 공금횡령 공무원, 동네창녀 간호사)이 만들어내는 코믹 휴먼드라마라고나 할까요. 그 군상들의 스토리를 하나하나 따지고 들어가면 소설책 몇권 분량 씩의 사연들이 쏟아져나올법한 인생들인데, 무겁고 슬픈 인생들을 파스텔화같은 터치로 감독은 스윽스윽 스치고 지나갑니다. 

이 영화에서 손꼽을 주옥같은 장면..워낙 많지만...중의 하나는, 주인공 간장 선생이 아들의 전사 통지서를 받는 장면입니다. '아카기 이치로의 전사를 애도합니다' 짧은 문장이 쓰여진 하얀 종이를 반으로 찢고, 다시 반으로 찢고, 또 반으로 찢고...작은 종이조각들이 간장선생의 몸 위에 눈처럼 쌓입니다. 증권가 연말 풍경도 아니고 무슨 카퍼레이드도 아니고, 슬픔이 반짝반짝... 

맨 마지막 장면도 압권입니다. 미군 조종사들의 대화로 시작되는 '구름 속의 첫 장면'은 다소 만화같으면서도 생경하지만은 않은 희한한 느낌을 주는데요, 끝장면의 '바닷가 풍경'은 정말 별미입니다. 


이마무라 쇼헤이(퍼온 글) 

1926년 9월 15일 도쿄 출생. 아버지는 의사. 전쟁이 끝나고 와세다 대학에서 서양사 전공. 연극에 흥미를 보여 희곡을 직접 쓰기도 했다. 1951년 조감독으로 쇼치쿠 스튜디오에 입사. 오즈 야스지로 감독 밑에서 세 작품을 만든다. (<초 여름>(1951년), <차와 쌀>(1952년), <도쿄 이야기>(1953년)). 
<도쿄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오즈의 영화세계와 결별한 그는 1954년 니카츠 스튜디오로 자리를 옮겨 야조 가와시마의 조감독이 된다. 이때부터 그의 실존주의 적이며 인간 본위적인 작품 주제가 부각된다. 1958년 이마무라는 그의 첫 번째 작품 <도둑맞은 욕망>을 연출한다. 이 작품으로 그는 관객들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긴다. 그 후 3년간 영화를 만들지 않은 그는 각본을 쓰기 위한 준비작업으로 영화의 주제에 대해 심도 있는 연구를 했다. 
1963년 <곤충녀>라는 작품에서 그는 가장 애용하는 주제인 일본 사회에서 나타나는 여성 노동층의 성에 초점을 맞췄다. 이런 주제는 그 후의 작품에서도 계속 반복된다. 
1965년 이마무라는 과감히 자신의 프로덕션사를 설립함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한다. 그 후 활동영역을 넓히며 다큐멘타리 영화에도 전념한다. 그 시기에 만들어진 가장 두드러진 작품 <사람은 사라지다>는 다큐멘타리 영화사에서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975년 "요코하마 영화-텔레비전 연구소"를 설립해 젊은 감독들이 영화 제작 기법을 배울 수 있도록 했는데, 지금도 그는 이 분야의 활동을 늦추지 않고 있다. 1983년 <나라야마 부시코>로 칸느영화제 황금 종려상을 수상해 세계적 거장의 반열에 선 그는 1997년엔 <우나기>로 두 번째 황금 종려상을 수상해 드문 예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