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얘기 저런 얘기

첨밀밀, 눈물 나게 달콤한 사랑

딸기21 2001. 11. 28. 17:14

사랑의 기억은 모두 달콤할까. 


인연이라는 것은 어떤 종류의 것이든 간에, 모두 소중하다...고 하면 될까요. 어떤 인연인들 소중하지 않겠냐마는, 그 중에는 특히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대단한 인연도 있는가 하면 말 그대로 '옷깃만 스치고 지나는' 그런 인연도 있겠죠. 


'첨밀밀'은 중국과 홍콩에 대한 이야기이고,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이야기이고, 따라서 돈에 대한 이야기이고, 돈과 사람에 대한 이야기, 체제의 틀 속에서 어떻게 해서든 더 나은 삶을 살아보려는 사람들의 이야기, 사랑에 대한 이야기, 인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첨밀밀의 핵심은 첨밀밀이다'... 말장난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정말로 이 영화의 키워드는 타이틀인 '첨밀밀'이라는 말에 있습니다. 


첨밀밀은, 아주 달콤하다는 뜻이죠. 달콤한, 그대의 미소는 마치 봄바람처럼 달콤해요, 어디에선가, 그대를 만난 적 있는 것 같아요, 그대의 미소짓는 모습은 이렇게 익숙한데...소군(여명)과 이교(장만옥)의 '기찻간 인연'은 결코 달콤하지 않았는데, 등려군의 '너무나 달콤한' 노래가 흐릅니다. 

이 영화의 감독은 결코 달착지근하지 않은, 오히려 시큼하고 씁쓸한 맛까지 느껴지는 이들의 인연에 감미로운 가락을 붙여놨습니다. 이들의 '첨밀밀'은 일종의 역설인 셈이죠. 돈을 좇아 고향을 떠나온, 자본주의의 최첨단 홍콩으로 건너온 두 중국 남녀의 스쳐 지나가는 인연에 저런 달콤한 향내를 뿌려놓다니. (몇달전부터 등려군의 노래에 심취해 있는데, 등려군이 부르는 '첨밀밀'은 사실 알려진 것처럼 뽕짝풍의 단내 나는 노래는 아닙니다. 특유의 낭창낭창한 목소리가 귓가를 살살 간지럽히는 맛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두리안'인가 하는 애들이 드라마에서 부른 것처럼 경박한 노래는 더더욱 아니구요.) 

제법 그럴듯하게 생긴 젊은 남녀의 사랑을 쌉싸름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돈인데...이 악물고 악착같이 살아가면서 나름대로 돈도 모으고 희망이란 것을 이야기하던 장만옥의 배신을 때린 것은, 바로 증시였군요. 뉴욕발 '블랙 먼데이'의 충격이 그녀의 인생을 휘어잡은 겁니다. 자본주의에 배신당한 젊은 여인은 '너무나도 자본주의적인' 방법으로 새 삶을 찾습니다. 좋건 싫건간에 그녀는 자신의 '선택'을 통해서 조폭과의 동거를 시작합니다. 

궁금한 것 한 가지. 여명은 장만옥을 부두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조폭 '오빠'한테 작별인사만 하고 오면, 그녀는 부둣가에서 기다리는 연인과 새 출발을 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어째서, 끈 떨어져 도망가는 조폭 곁을 떠나지 못한 채 그 배를 타고 떠난 것일까요. 조폭 기둥서방조차 "새 애인 찾아 떠나라"고 했는데. 


그것도 인연이라는 것일까요? 무릇 모든 인연은 다 소중한 것이어서, 억척또순이처럼 '캐피탈리스트'가 되고자했던 장만옥조차 그 인연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해 정든 남자를 따라갔던 것일까요?

다시 등려군 이야기. 당대의 스타였다는 이 여자가수 또한 장만옥같은 인물이더군요. 원래 중국 본토에서 태어났는데 대만과 홍콩을 오가며 활동을 했고, 일본에서도 10여년간 가수 일을 했었답니다. 그래서 등려군의 노래에는 엔카가 섞여있기도 한데, 우리나라에서 들을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중국노래'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녀는 일본에서 심각한 슬럼프를 겪으면서 중국인들의 애를 태웠다가(!) 기사회생해 '아시아의 스타'로 떠올랐다는군요. 


중국인들은 정말로 그녀를 사랑했던 모양입니다. 작년에 홍콩 구경을 갔을 때 등려군의 소지품 경매광고를 봤는데, 죽은지 5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중국인들은 그녀를 잊지 않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등려군은 장만옥처럼 자본주의를 따라다녔지만 그녀의 노래들은 아주 오래된 정서를 담은 것들입니다. '첨밀밀'도 그렇고, 또 이 영화에 나오는 다른 노래들이나 베스트앨범에 담겨 있는 노래들도 그렇구요. 아주 전통적인 정서를 담고 있습니다. 다른 여자에게 눈길 주지 마세요, 사랑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달빛이 내 마음을 대신 전해줘요...그래서 중국인들은, 자본주의를 피해갈 수 없게된 지금도 그녀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몹시 서글픈 사랑이었지만, 어쨌든 두 사람은 서로를 끊임없이 그리워하고-엇갈리기만 하던 두 사람은 뉴욕의 길모퉁이에서 만나게 됩니다. 혹시 헨리 워즈워드 롱펠로우의 '에반젤린'을 아시는지. 운명의 장난도 이들을 영원히 갈라놓지는 못했다-라는. 


'에반젤린'에서는 두 연인이 만나는데 평생이 걸렸지만 다행히 현대의 두 남녀는 지구를 반바퀴 돌아서 몇년 만에 만나는군요. 홍콩은 중국에 귀속됐지만 중국은 자본주의의 길로 달려가고 있다는 역설처럼, 두 사람의 만남을 이어준 것은 등려군의 사망 소식이었습니다. 쇼윈도를 들여다보다 불현듯 눈길이 마주친 두 사람의 미소는 참 감미롭더군요(첨밀밀!). 


(참, 원래 '첨밀밀'은 인도네시아 민요인데 중국말로 가사를 붙인 거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