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영화 <무간도> 시사회에 갔다. 11시까지,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늦도록(올뺌족들한테는 우스운 시간이겠지만) 영화를 봤다.
가기 전에, 우리(나와 아지님)를 데려가준 후배가 걱정을 했다. 야심한 시각에 영화보자구 끌고가는데 재미 없으면 그 원성을 어떻게 듣냐고, 그냥 스카라극장 오랜만에 가본다는 걸로 의미를 찾으라고(어떻게 그런 것이 '의미'가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했었다.
영화보는 동안 내내 숨 죽이고, 가슴 졸이고 있었다. 팜플렛에 신감각 느와르(느와르 누보?)라고 돼 있었는데, 사실 나는 '옛날 느와르'도 별로 보지 않았다. 얼마전 TV에서 <영웅본색> 해주는 거 얼핏 보긴 했지만, 역시나 그것이 유행했을 당시의 감성으로 전달되지는 않았다. 고교 시절에 그토록 유행했음에도 불구하고--영웅본색, 천녀유혼 둘 다 보지 않은 희한한 '고집'이랄까.
그런데 한 사람의 스타가 있었다면, 유덕화다. 고등학교 때 친구와 함께 극장에 가서 <지존무상>을 봤었는데 얼마나 재미있고 서글펐는지. 알란 탐(지금은 뭐하는지 모르겠군)과 유덕화, 진옥련, 관지림. 진옥련은 뒤에 보지 못했고, 관지림은 동방불패에 나타난 것을 보았다(동방불패 한 서너번 봤을걸). 압권은 유덕화였다. 독이 든 술잔을 골라 입에 털어놓고(고전적이고 낭만적인 살인의 방법) 적의 집을 걸어나오던 장면. 진옥련이 알란 탐의 방 앞에 반지를 놓고 엘리베이터 문 뒤로 사라지던 것도 기억난다.
사실 어제 영화를 보겠다는 큰 결심을 한 것은 유덕화가 나온다는 정보 때문이었다. 내 기억속의 유덕화는, <지존무상>에서 멈춰 있다. 이제 40대 중후반이 되어 있을 나의 스타가 어떻게 변해 있는지 보고 싶어서 극장을 찾은 것이다. 유덕화는 여전히 멋있었다. 너무 멋있었다. 대체 그 나이에 그 몸매가 나온다는 것이 말이나 되냐구...
양조위와 유덕화가 처한 긴박하고도 엿같은 상황, 두 인물의 고통과 희망, 아주아주 약간의 유머와 극도로 절제된 감정, '일상'이라고는 나타나지 않는 cool하고 세련된 화면 속에 삼합회(최첨단 깡패새끼들)를 우겨넣은 감각. 나는 영화의 기술적인 측면 따위는 전혀 모르고, 영화평같은 것 할줄도 모르고, 스포일러(반지제왕 덕분에 알게된 말^^)가 될 생각은 더더욱 없다. 다만 감동이 넘쳐나서 주체할줄 모르고 있다는 말만. 물론 이 감동은 어디까지나, 유덕화를 좋아했던 80년대의 소녀가 아줌마가 되어 느끼는 감동임을 밝혀둔다.
어쨌든 나는 이 영화를 나의 '명작' 리스트에 올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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