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얘기 저런 얘기

고양이를 부탁해

딸기21 2003. 2. 12.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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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 대해 사전지식이라고는, 스무살 여자애들
(난 얘들보다 나이가 10살 씩이나 많으니까 이렇게 말해도 되겠지^^)의 
이야기를 담은 것이라는 정도였다.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신문에 실리는 영화평이 꽤나 감동적이었던 것으로 봐서
(영화를 안 보는 나이지만, 정말 칭찬인지 아니면 '홍보용 문구'인지 정도는 
구분할 줄 안다) 제법 기대를 해도 될만한 영화같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간만에 보는 수작이었다 
(딸기가 보는 눈은 별로 없지만 워낙 영화 안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이렇게 칭찬하는 걸 보면 대단히 감동받았음에 틀림없다고...). 

영화 줄거리 소개할 생각은 없고, 
실상 또 '줄거리'라 할만한 것이 없기도 하다. 
스무살 여자애들 다섯명이 나오는데, 대한민국에서 스무살이란 어떤 나이냐. 
스무살의 티티엘에 나오는 그 모델은 정말 뽀시시하게 이쁘더라만, 
핸드폰 많이 쓴다고 스무살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대학 1학년'에 해당되는 나이다. 
모든 것이 대학 기준으로 측정되는 사회에서, 
'새내기'니 '신입생'이니 '몇몇 학번'이니 하는 말을 
봄철부터 듣고 사는 나이. 그럼 대학을 가지 않은 아이들에게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1년 후'. 
그것이 이 영화의 감독이 설정해놓은 스무살이라는 나이인데, 
방황도 많고 욕망도 많고 피부는 뽀얗고 꺄악꺄악 소리도 잘 지르고 
하루 온종일 핸드폰이 울리는 그런 나이다. 

스무살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은데-우리 나이로 스무살 때에는 대학 1학년이었고 
만 스무살일 때에는 대학 2학년이었으니까 
대학생활이 한창 재미있고 또 어마어마하게 '바쁠' 때였다. 
이 영화를 보면서 갑자기 궁금해졌다. 
대체, 대학에 가지 않은 그 많은 아이들, 나와 같은 고등학교에서 공부했던 
많은 아이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국민학교 때 늘 같이다녔던 삼총사 중의 2명(나를 제외한)은 
대학에 가지 않고 서울여상에 갔는데, 얼마전에 만나보니 
은행 취직한지 10년, 11년씩 된 고참 여행원들이 되어 있었다. 
이 애들 말고,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성적이 나빠 대학에 가지 못했던 애들은 대체 어떻게 됐느냐는 얘기다. 

얼마전, 여고시절 미모를 자랑하다가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갓 스무살에 결혼해서 이미 세 아이의 엄마가 된 
한 동창생의 이메일을 받았던 것 외에는, 
'그 때 그 아이들'에 대한 소식도 기억도 없다. 

세상 누구에게나 꿈이 있고 희망이 있다는 것을 잊고 산다. 
모처럼만에 찾아간 고등학교, 
선생님들과의 '추억담'에조차 등장하지 않는 아이들, 
'여고괴담'에 나오는 누군가처럼 잊혀져버리는 아이들. 
뿐만이 아니라 텔레비전이나 신문지상에 나오는 
먼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도 그렇고, 
또 내 주변의 '물건 같은 사람들'도 그렇다. 
뼛속 깊이 박힌 차별의 선들이 그물처럼 촘촘히 쳐 있어서 
나 아닌 다른 사람, 내 기준 아닌 다른 사람들의 꿈이나 희망이나 감정 따위가 
보이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주 좋아하고 또 무서워하는 작가인 박완서 할머니가 '흑과부'라는 단편에서 
소시민근성을 단칼에 베어버리는 것을 보면서
(한국일보의 장명수사장 별명이 '장칼'이라는데, 박완서선생의 칼에 대면 
어린애들 장난감이다. 이분이야말로 '박칼'이다) 가슴이 섬찟했는데 
오늘도 그랬다. '고양이를 부탁해', 신선한 감각과 깔끔한 영상, 
아주 훌륭한 시나리오를 자랑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또렷한 신세대 감각에 감탄했다기보다는 
가볍잖은 여운을 남기는 약간의 '칼질'에 놀라고 감동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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