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세계사/동유럽 상상 여행

35. 19세기말~20세기, 마케도니아를 노린 동유럽 민족국가들의 분쟁

딸기21 2014. 2. 5.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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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마케도니아 문제'


1878년 회의와 1912-13년의 발칸 전쟁 사이에 발칸의 민족주의자들의 관심은 이른바 ‘마케도니아 문제 Macedonian Question’에 쏠려 있었습니다. 이는 베를린 회의에서 열강의 결정, 특히 마케도니아를 오스만 영토로 다시 내어준 데에 불만을 품은 불가리아, 그리스, 세르비아 세 나라 간 분쟁을 가리킵니다.


베를린에서 러시아는 산스테파노 조약에 따라 정해졌던 불가리아의 국경을 다시 그리도록 용인하고 마케도니아를 다시 오스만에 넘겼습니다. 불가리아는 자신들이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땅을 내어주고 영토가 크게 줄어드는 걸 봐야 했고, 세르비아인들은 1877-78년 러시아와 오스만의 전쟁 와중에 얻어낸 땅의 일부를 돌려주어야 했지요.



'마케도니아 문제'가 무엇인지 알려면 위의 지도를 보면 됩니다. 지도에 파랗게 표시된 곳이 역사적으로 '마케도니아'라 불렸던 지역이고요. 흰 선은 현재의 국경입니다. 현재의 마케도니아 공화국은 물론이고 불가리아 일부, 세르비아와 알바니아 일부, 그리고 그리스의 상당 지역이 마케도니아라 불렸던 지역인 거죠. 이 지역을 놓고 발칸 국가들이 쟁탈전을 벌인 겁니다. 불가리아는 저 파란 지역을 산스테파노 조약으로 차지했다가 곧이어 베를린 회의에서 '열강들' 때문에 다시 오스만에 내줘야 했고, 그래서 열받았다는 줄거리... 


더 중요한 것은 오래전부터 세르비아 민족의 땅이라고 주장해왔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제국에 내줘야 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투르크인들에 맞선 전쟁에 참전하고 싶었지만, 자신들의 땅이라고 생각했던 키프로스에 영국이 해군을 보내 점령하는 바람에 맹활약을 하지 못했다고 볼이 부어 있었습니다. 이들 모두가 베를린 회의에서 ‘잃은’ 영토에 대한 보상으로 마케도니아를 얻어내길 바랐던 것이죠.




세르비아의 불만이 무엇이었는지 보기 위해, 다시 오늘날의 지도를 좀 살펴 보지요. 세르비아인들의 불만은 결국 20세기 최악의 살상극 중 하나를 낳기도 했으니... 저 지도에서 흰 선은 역시 현재의 국경이고요. 초록색 부분이 오늘날의 독립국가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입니다. 세르비아는 대략 저 언저리가 모두 자기네 땅이라고 생각해왔던 겁니다. (저 지도에 있는 나라들 중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가 모두 옛 유고연방에 소속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고연방이 사라진 뒤 크로아티아가 떨어져나갔고, 보스니아-헤르체고비아가 갈라졌고, 이로써 역사적인 도시 사라예보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땅이 되었고, '세르비아-몬테네그로'에서 몬테네그로마저 갈라졌고, 그나마 남아있던;; 코소보마저도 분리독립을 선언한 상태라는 것.)


다시 100여년 전으로 돌아가 보면- 

누구보다 목소리를 키우고 나선 것은 불가리아인들이었습니다. 그들 입장에서 보면 마케도니아는 1차 불가리아 왕국(681-1018년)의 영토였고, 그 수도 격인 오흐리드는 불가리아 정교회가 설립된 뒤 대주교좌가 있던 곳으로 불가리아 슬라브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1차 불가리아 왕국 말기 차르 사무일 치하 10년 동안은 마케도니아가 국가의 중심이 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마케도니아인들이 쓰는 슬라브계 언어는 불가리아어와 매우 비슷해, 다른 언어라기보다는 사투리 정도의 차이밖에 나지 않았습니다. 19세기 불가리아 민족주의 운동의 핵심에 섰던 밀라디노프 Miladinov 형제를 비롯해 주요 정치인들 중에도 마케도니아 태생이 여러 명 있었습니다. 


마케도니아의 Galichnik 마을. 참 이쁘네요. 사진은 위키피디아에서 퍼왔어요.



1860-72년 불가리아 민족운동의 주요 이슈는 ‘불가리아 교회 문제’였습니다. 불가리아인들이 오스만 제국에 ‘불가리아 정교 밀레트’를 인정해줄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불가리아인들은 이스탄불의 그리스정교 총대주교가 지배하는 그리스 정교 밀레트에서 벗어나 자신들만의 종교적 자치단위인 밀레트를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포고령을 내, 지역별 투표에서 인구의 3분의2 이상이 새로운 자치 밀레트에 들어가기를 선택한 지역들은 새로 결성된 불가리아 정교회를 택해도 좋다고 허용해주었습니다. 그러자 마케도니아 슬라브인들은 그리스 교회의 지배에서 벗어나 불가리아 밀레트에 들어가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이는 그리스의 계산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는 필리포스2세 Philippos II(기원전 359-336년 재위)와 알렉산드로스 Alexandros (알렉산더 대왕·기원전 336-323년 재위) 때부터 마케도니아는 그리스에 속해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비잔틴 제국 시대는 물론이고 오스만 제국 치하에서도 그리스 정교 밀레트에 소속된 땅이었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터키인들로부터 독립을 얻어낸 그리스 민족주의자들은 투르크족을 몰아내고 그리스 민족국가로서 비잔틴 제국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메갈레 이다이아 Megale idaia(원대한 이상)’라는 정치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이 생각하는 새 그리스 민족국가의 영토는 오스만 치하 정교 밀레트 내에서 그리스어 사용자들이 다수 거주하는 모든 지역들을 포괄하는 것이었습니다.


오스만이 1767년 오흐리드의 불가리아 정교 대주교좌를 폐지한 이래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정교 총대주교의 관할을 받았고, 이로 인해 미약하게나마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리스 민족주의자들은 마케도니아가 그리스에 묶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불가리아인들이 마케도니아를 불가리아 총대주교 관구에 넣기 위한 운동을 벌이자 이에 맞서 그리스도 자신들의 관구에 집어넣는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불가리아와 그리스 세력이 폭력과 테러 공격을 일삼으면서 마케도니아의 내부 상황은 몹시 불안정해졌고, 양측 싸움의 직접적인 피해는 마케도니아인들에게 돌아갔습니다.


www.panoramic-macedonia.com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쪽으로 영토를 확장할 길이 막힌 세르비아인들도 어쩔 수 없이 마케도니아에 눈길을 돌렸습니다. 그들 역시 마케도니아에 대한 ‘역사적 소유권’을 주장했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마케도니아의 도시 스코피예는 차르 슈테판 두샨 시절 세르비아 제국의 수도였습니다. 당시 마케도니아는 세르비아 제국의 핵심이었으며, 19세기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두샨의 제국이 가졌던 영토들을 민족국가의 영토 모델로 삼고 있었습니다.


세르비아인들은 1885-86년 무력으로 불가리아인들에게서 마케도니아를 빼앗으려 했다가 실패하고 외교 작전에 들어갔습니다. 세르비아까지 마케도니아 내에서 벌어지던 불가리아, 그리스의 싸움에 끼어들자 유혈사태가 더욱 늘고 마케도니아인들의 고통은 가중됐습니다. 


1893년 마케도니아 슬라브계는 레스나에서 자신들만의 민족주의 혁명기구인 ‘마케도니아국내혁명기구 Vatreshna Makedonska Revolutsionna Organizatsiya (IMRO·마케도니아어 영어 약칭은 VMRO)’라는 것을 조직했습니다. 설립을 주도한 것은 다미얀 그루예프 Damjan Grujev, 고체 델체프 Gotse Deltchev, 페레 토체프 Pere Tochev 등이었습니다. VMRO오스만 제국의 계속된 통치에 저항하고 자신들의 땅을 노리는 외부세력에 맞서기 위한 기구였습니다. 조직원들은 대부분 마케도니아인들이었고, 불가리아인이 일부 끼어있었습니다. 이들의 운동은 ‘마케도니아인들을 위한 마케도니아’를 내세웠습니다. 


잠시 마케도니아의 새로운 민족주의 운동의 부상을 보여주는 이 조직에 대해 들여다볼까요. 비밀결사로 출발한 VMRO는 오스만 투르크의 통치를 벗어나 독립 국가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내세웠습니다. 친 불가리아계 인사들이 주도를 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고, 갈수록 불가리아계의 목소리가 커졌다고 합니다. 초기에는 마케도니아 내 슬라브계와 불가리아계 주민들의 지지를 얻었으나 무분별한 테러전술로 신망을 잃었습니다. 1897년과 1903년의 반 오스만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뒤 급속히 약화돼 무너졌습니다. 


마케도니아의 야쿠피사 Jakupica 산지. /위키피디아


발칸 전쟁(1912~13년)이 끝난 뒤 마케도니아는 투르크에서 벗어났지만 복잡한 다툼 끝에 세르비아와 그리스에 의해 분할되고 말았습니다. 마케도니아 내에서 민족주의 세력들 간의 충돌은 점점 심해졌고, 오스만 당국에 대한 공격도 늘어났습니다. 1903년 VMRO는 반 오스만 봉기를 일으켰지만 실패로 돌아갔고, 오히려 유혈사태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서방세력들의 개입을 늘리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폭력사태와 테러가 자주 일어나면서 마케도니아의 슬라브인 수만 명이 삶의 터전을 잃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남서쪽의 불가리아로 피신해서, 불가리아 내에 ‘국가 속의 작은 국가’를 형성했고 독자적인 군사력까지 보유했습니다. 1912년이 되자 마케도니아 내부의 민족주의 그룹들은 먼저 오스만 세력을 몰아내지 않고서는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됐습니다. 러시아의 부추김을 받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그리스계 그룹들은 유럽에서 오스만을 완전히 몰아내기로 합니다. 마케도니아 문제를 풀기 위해 그간의 적대를 일단 봉합한 뒤 반 오스만 연합을 형성한 것이죠. 그 결과는 발칸 전쟁의 발발이었습니다.


★그리스-마케도니아 국호 분쟁


먼 훗날의 이야기입니다만. 마케도니아는 1991년 옛 유고슬라비아에서 독립했습니다. 하지만 마케도니아가 나라 이름을 정하자 그리스가 “고대 마케도니아는 그리스의 한 나라였다”며 이의를 제기하고 나서 ‘국호 분쟁’이 시작됐습니다. 그리스는 필리포스2세와 알렉산드로스 대왕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마케도니아라는 국호의 ‘역사적 소유권’을 내세웠습니다. 실제 그리스 북부에도 마케도니아라는 지명이 있다고 합니다.


마케도니아에 있는, 알렉산드로스의 아버지 필리포스 대왕의 유적. /위키피디아


반면 마케도니아 정부는 “지난 몇 백 년 동안 써온 이름이며 옛 유고연방 시절에도 마케도니아 공화국이라는 명칭을 써왔다”며 맞섰습니다. 마케도니아는 1993년 ‘마케도니아 옛 유고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유엔에도 가입한 상태였거든요. 국호 싸움에 실익이 없다고 판단한 그리스가 한발 물러서면서 일단락됐고 두 나라는 1995년 국교를 정상화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감정싸움은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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