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세계사/동유럽 상상 여행

17. 발칸의 주자로 나선 세르비아

딸기21 2012. 11. 29.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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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3-14세기 세르비아의 흥기


11세기 중반, 오늘날의 몬테네그로에 해당되는 제타 Zeta 지역('동유럽의 독립국가들' 참고)의 세르비아인들이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미약하나마 독립을 쟁취해 냈습니다. 그리고 1077년 그들을 이끌던 지배자 미하일로 Mihailo (1051-81년 재위)가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서방과 동방 기독교의 싸움 속에 '밀당'에 성공한 제타, 훗날의 세르비아가 거둔 작은 승리였습니다. 당시 로마 교황청은 1054년 ‘대분열’ 이후 동방의 정교 세계에 발 디딜 곳을 찾으려 애쓰던 참이었습니다. 


하지만 제타의 세르비아 왕국은 산악지대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비잔틴 제국의 다른 발칸 영토들로부터는 격리돼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세르비아라는 나라가 영향력 있는 주자로 떠오른 것은 1180년 슈테판 네만야(Stefan Nemanja. 1113-1199 추정) 때에 이르러서였습니다. 네만야는 1190년 비잔틴의 통제를 떨쳐버리고, 제타와 그 북쪽의 알바니아 그리고 오늘날의 세르비아 영토로 알려진 대부분의 지역을 통합해 휘하에 넣었습니다.


성자 시메온(Saint Simeon)으로 시성된 슈테판 네만야의 프레스코화. /위키피디아


신실한 정교 교인이었던 네만야로 해서 세르비아는 정교 세계의 일원으로 굳어졌습니다. 네만야 왕조를 연 그는 아들 슈테판2세(1196-1227년 재위)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아토스 산의 수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가족, 꽤나 종교적인 왕가였나봅니다. 아버지 네만야는 성 시메온으로 정교회의 성인이 되었지요. 왕위를 물려받은 슈테판2세 외에 성 사바(Saint Sava)라 불린 둘째 아들이 있었습니다. 원래 이름은 라스트코(Rastko Nemanjić)인데 세르비아 정교회의 첫 대주교를 지냈지요. 네만야가 칩거한 아토스 산의 힐란다르(Hilandar) 수도원은 바로 이 아들이 세운 곳이었답니다. 이 곳은 세르비아의 종교성지로, 훗날까지 계속 종교적 중심지가 됐다고 합니다. 


오늘날의 그리스 아토스 산에 있는 힐란다르 수도원. /위키피디아


하지만 아버지와 둘째아들 외에, 큰아들과 작은아들은 종교적 심성과는 좀 거리가 있었던지... 


슈테판2세가 왕위에 오른 뒤(슈테판2세를 '첫번째 세르비아 국왕'이라 일컫기도 합니다. 네만야는 공식 직위가 '세르비아 대공'이었고 그 아들이 '세르비아의 국왕'이라는 공식 칭호를 처음으로 인정받은 사람이거든요) 동생 부칸 Vukan 과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제타 공국의 대공이었던 부칸은 남진하던 헝가리 세력의 지원을 받고 있었습니다.


불가리아로 도망친 슈테판2세는 불가리아 왕 칼로얀(이 사람 참 많이 나오네요. 당대의 빅맨이었던 모양입니다)의 도움을 받아 쿠만족 용병들을 데리고 베오그라드, 니슈 일대로 돌아왔습니다. 이 때 다시 나서주는 가운데 성자... 슈테판2세와 헝가리 세력과의 싸움은 성 사바의 중재 덕에 끝났고, 슈테판2세가 세르비아의 적법한 지도자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는 1217년 가톨릭 교황으로부터도 왕좌를 공인받았습니다. 하지만 세르비아는 정교 국가... 성 사바는 당시 니케아에 본부를 두고 있던 비잔틴 정교회의 그리스 총대주교로부터 세르비아 대주교구를 독립시킨 뒤 슈테판2세에게 '정교의 지배자' 타이틀을 씌워주었습니다. 1219년 슈테판2세는 니케아 총대주교로부터 인정받은 최초의 세르비아 국왕이 되었고, 세르비아에서 가톨릭의 영향력은 쇠락하게 됐습니다. 


슈테판 부자가 넓혀 놓은 세르비아 영토. 이렇게만 봐서는 지구상 어느 토막인지 잘 모르겠지요? ㅎㅎ


바로 저 부분입니다... 


잘난 왕 뒤에는 항상 줄줄이 못난 왕들이 따르기 마련. 13세기 거의 대부분의 기간 슈테판의 뒤를 이은 국왕들은 나약한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애써 넓힌 세르비아 영토를 탐욕스런 주변국들로부터 성공적으로 지키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동쪽에서는 불가리아가 영토를 잠식해왔습니다. 헝가리는 베오그라드 주변을 차지한 뒤 보스니아를 속국으로 만들었습니다.


당시 세르비아의 왕궁 관직은 강력한 관료 계급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왕실이 약해진 틈을 타 관료 계급이 세를 불렸습니다. 왕위 계승의 원칙이 모호하고 불분명했기 때문에 왕실은 불안정했고, 그 사이 지방에서는 가톨릭 세력과 정교 세력 간에 끊임없이 분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보스니아 지역을 중심으로 한 보고밀 이단까지 끼어들었습니다.


흔들리던 세르비아 왕실을 다시 세운 것은 슈테판 우로슈 밀루틴 Uroš II Milutin (우로슈2세·1282-1321년 재위)이었습니다. "그는 종교를 중시하면서도 방탕했고, 정치 문제에서나 종교 문제에서나 기회주의적이었다." 재미있죠? 이렇게 직설적인 평이라니. 폴그레이브 '지도로 보는 동유럽사'의 저자들을 인용해봤습니다.


어쨌든 우로슈는 스러져가던 비잔틴 제국의 취약성을 최대한 비집고 들어가 헝가리에 빼앗겼던 베오그라드 일대를 되찾고 아드리아 해안의 마케도니아 북부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야금야금 땅을 넓혔습니다.


그런데 이런 왕을 왜 방탕한 기회주의자라 했냐고요. 그의 이중적인 성격은 비잔틴과의 관계나 가정생활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는 법적인 아내 외에 두 명의 공식적인 첩을 두었고, 테살리아의 공주와도 관계를 가졌습니다. 심지어 수녀 신분인 처제와도 바람을 피웠다고 하니 완전 막장드라마 가족이로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1297년 우로슈의 왕비가 죽자 비잔틴 황제 안드로니쿠스2세 Andronicus II Palaeologus (1282-1328년 재위)는 그에게 딸을 보내 정략결혼을 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신부는 황제의 다섯 살 난 어린 딸 시모니스였습니다. 그리하여 1299년 우로슈는 어린 소녀와 테살로니키에서 혼례를 올렸습니다. 어린 왕비는 호색한 우로슈와 제대로 결혼생활을 할 수 있기 전까지 왕실의 유모 손에서 자라났다는 스토리입니다.


우로슈를 계승한 것은 혼외정사에서 태어난 슈테판 우로슈 데찬스키 Stefan Uroš III Dečanski(우로슈3세·1321-31년 재위)였습니다. 그는 불가리아를 상대로 싸워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고, 큐스텐딜(Kyustendil 이건 현재의 불가리아식 이름이고요. 뒤에 세상에 알려진 터키식 지명으로는 벨바즈드 Velbazhd 입니다) 외곽에서 1330년 불가리아를 중심으로 한 비잔틴 군대를 격퇴했습니다. 


이 벨바즈드 전투는 명목상 세르비아 대 비잔틴의 싸움이었지만 실제로는 한창 커가던 세르비아와 이미 커있던 불가리아가 한판 붙은 싸움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비잔틴 제국은 내전으로 분열됐고 불가리아는 세르비아의 속령으로 전락했습니다.


세르비아 왕국의 초기 수도 중 한 곳이었던 슈타리 라스(Stari Ras)의 성채. /위키피디아


데찬스키의 아들 슈테판 우로슈 두샨 Stefan Uroš IV Dušan(우로슈4세·1331-55년 재위) 때에 세르비아는 번영의 정점을 이루었습니다. 그는 왕위를 빼앗고 아버지를 참살하는 것으로 제위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라슈카(Raski. 초기 세르비아의 중심을 이루던 지방을 가리킵니다. 오늘날에는 세르비아의 한 행정구역 이름이고요), 제타, 마케도니아, 알바니아, 에피루스, 그리고 코린트 만에 면한 테살리아까지 이르는 넓은 영토를 다스렸습니다.


우로슈4세는 헝가리인들을 다뉴브 북쪽으로 몰아내고 베오그라드를 병합, 세르비아를 발칸의 대국으로 키웠습니다. 보스니아까지 정복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불가리아인들과 화약을 맺어 발칸 동부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헝가리나 두브로브니크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비잔틴 제국의 혼란을 틈타 부를 쌓았습니다.


★두브로브니크(Dubrovnik)


이 글의 주제와는 상관없지만 말 나온 김에...
두브로브니크는 크로아티아 달마티아 남부의 아드리아 해에 면한 오래된 도시입니다. 울나라에서도 동유럽 여행가는 분들이 아마 1순위 가고픈 곳으로 꼽는 게 여기 아닐까 싶은데요.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살면서 여행했던 곳 중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이 도시를 꼽더군요.



이 도시는 오래전부터 교역과 문화의 중심지로서 ‘아드리아 해의 진주’라 불렸습니다. 아드리아 해에는 워낙 고풍스런 도시들이 많은지 툭하면 '아드리아의 진주'라 하긴 합디다만... 두브로브니크는 13세기 베네치아 공화국의 발칸 쪽 거점 도시로 발전했습니다. 때문에 베네치아인들이 쌓은 슈타리 그라드(성벽)를 비롯해 고딕·르네상스·바로크 양식의 사원과 궁전 등 역사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1990년대 옛 유고연방에서 내전이 벌어졌을 때에는 유럽의 수많은 학자와 인권운동가들이 ‘두브로브니크의 친구들’이라는 이름으로 인간방패를 결성, 내전의 포화에서 도시를 지켰습니다.


1346년 마케도니아의 수도인 스코피예에서 두샨은 스스로를 세르비아와 그리스(비잔틴), 불가리아, 알바니아의 황제라 선언했습니다. 독립 세르비아 교회를 이끄는 페치의 대주교가 그에게 왕관을 씌워주었습니다. 두샨은 세르비아 ‘제국’의 법령을 반포하고, 스코피예에 비잔틴 풍의 화려한 제국 재판소를 세웠습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플을 능가하는 황제의 영예를 채 누리기도 전에 그는 죽고 말았습니다.

해프닝으로 끝난 1355년 두샨의 죽음은 발칸의 정교 세력들에게는 재앙이었습니다. 남동부 유럽을 오스만 투르크의 이슬람 군대로부터 지켜줄 힘이 있는 마지막 수호자가 사라져버린 겁니다(오스만 투르크의 진격에 대해서는 뒤에 자세히 설명하지요). 두샨이 숨지고 얼마 되지 않아 세르비아는 혼란에 빠졌고, 각 지방이 취약한 왕실을 상대로 도발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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