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세계사/동유럽 상상 여행

37. 1908-1914년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딸기21 2014. 4. 10. 15:00
728x90

37. 1908-1914년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으흐흐... 기필코 올해 안에는 이 시리즈를 끝내겠다는 일념으로... 또다시 '간만에' 올립니다. 드뎌 1차 세계대전 전야로 넘어왔네요. 올해는 1차 대전 발발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1차 대전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 '사라예보에서 어느 나라 왕자가 총맞아 죽고 전쟁이 났는데 유럽이 다 끼어들어 아수라장이 됐다' 이 정도밖에 모르는 게 우리같은 보통 사람들... 학교 다닐 때 세계사 시간에 그 정도밖에 못 배웠다, 라고 일단 선생님께 책임을 넘기고~~ (그나마 그 시절엔 세계사 수업이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학생들이 '십자군 전쟁도 못 들어보고' 대학에 들어간다죠 ㅠㅠ)


187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야금야금 오스만투르크의 땅을 잡아먹고,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으로 서유럽의 민족주의 바람 속에 국가세우기에 한창이던 동유럽 사정이 나날이 복잡해지던 시절. 그 당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주민들은 크게 세 덩어리로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가장 큰 그룹은 동유럽계 정교 집단으로, 인구의 43%를 차지했습니다. 뒤를 이어 39%에 해당하는 무슬림, 마지막으로 서유럽계 가톨릭 인구가 18% 정도였습니다(이 수치는 폴그레이브 '지도로 보는 동유럽사'에 나온 겁니다).


현재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정교와 가톨릭의 두 기독교 집단이 민족적 정체성을 발전시키는 데에는 이웃 나라들의 힘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정교도들은 세르비아의 영향을 받았고, 가톨릭은 크로아티아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죠. 무슬림의 경우는 다소 복잡합니다. 민족으로 보면 슬라브계이고 언어적으로도 기독교도들과 차이가 없었지만 전통적으로 고유의 이슬람 신학과 문화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 종교적-민족적 구도는 근 100년이 지나서 참혹한 내전으로 터져나오지요. 유고연방이 갈라졌을 때 무슬림인 보스니아계가 정교계 슬라브족에게 학살을 당하고 유고의 후신인 세르비아와 갈라져 나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됐고, 세르비아 내에서도 무슬림 알바니아계가 많이 사는 코소보가 서방 지원으로 독립을 선언했으니까요)


The Ferhad-begova-Mosque in Sarajevo. /위키피디아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크로아티아계, 세르비아계 민족주의자들은 1908년의 합병을 서로 다른 시각에서 바라봤습니다. 크로아티아의 일부 민족주의자들은 이 합병을 낙관적으로 바라봤습니다. 합스부르크 제국이 보-헤 지역을 병합해버렸으니, 그 안에서 유고슬라비아인들의 자치국가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봤던 겁니다. 물론 이들이 생각한 유고슬라비아 자치국가는 '크로아티아계가 주도하는 국가' 즉 '대(大)크로아티아'였습니다.


이 시점에서, 이 인물이 등장합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합스부르크 왕가의 후계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Archduke Franz Ferdinand 은 자신이 권력을 계승하면 제국을 재편할 것이라고 공공연히 밝히고 있었습니다. 그는 체코 지역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할 것이고, 크로아티아인들에게도 헝가리인들이 누리는 것과 같은 자치 권한을 주는 방안을 긍정적으로 고려하고 있다는 듯이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은 제국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하자 ‘대 크로아티아’로 가는 길에 한층 다가선 것으로 보았습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위키피디아
이 시기 사람들은 다 똑같아 보여요 @.@


하지만 바로 그 이유에서, 그 직전 성립된 세르비아-크로아티아 연합세력은 합병을 재앙으로 여겼습니다. 페르디난트의 ‘제국 3분할(오스트리아-헝가리-크로아티아) 계획’은 궁극적으로 크로아티아를 제국에서 완전히 독립시키고자 하는 그들의 열망에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크로아티아계 안에서도 제국 내부의 자치국가를 만들자는 주장과, 떨어져나와 완전 독립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섰던 모양입니다. 뒤에 '티토의 유고슬라비아'로 현실화된, 좀더 큰 틀의 '유고슬라비아 민족주의'가 이미 형성되고 있었던 겁니다. 문제는 거기에 대한 생각이 또한 민족마다 달랐다는 것이지만...


사실 독립을 원하는 크로아티아인들이 보기에 페르디난트는 독립 열망을 위협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야심을 상징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제국 내의 세르비아-크로아티아계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합병은 곧 ‘유고슬라비아주의’에 대한 모욕이라며 분노했습니다. 사실 크로아티아계가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알수 없지만, ‘유고슬라비아주의’라는 것은 실상 ‘세르비아 민족주의’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헝가리 정부는 크로아티아인들의 독립 요구를 억누르려 애썼지만,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대한 반발심을 더욱 키우고 친 세르비아 노선으로 돌아서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었습니다.


1906년 무렵, 보스니아의 농민들. 사진 Scheufler Collection


1909년이 되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세르비아계 주민들 사이에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에 위협이 되는 다른 감정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앞서 1902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는 포스베타 Posveta (‘계몽’)라는 세르비아계 문화단체가 만들어졌는데요. 이들은 세르비아의 지원을 받아 세르비아계 농민, 빈민층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일을 했습니다.


10년 가까운 활동을 통해 이 단체는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인 지식인들을 키워내는 조직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제국의 관리로 크로아티아계를 더 선호했기 때문에 새로 형성된 세르비아계 지식인 집단은 일자리를 찾기도 힘들었고, 제국 내에서 출세를 할 길도 거의 막혀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연스레 제국의 운영방식과 사회제도에 불만을 품게 됐습니다.


이들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 젊은 세대는 ‘청년보스니아’라 불리는 운동의 주력부대가 됐습니다. 이 운동의 목표는 합스부르크로부터 독립해 보스니아 세르비아인들의 독립 국가를 만들어 사회를 개혁하는 것이었으나 운동의 형태는 고정돼 있지 않아 광범위한 지역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됐습니다. 목표를 어떻게 달성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혁명문학에 크게 고취된 이들은 막연하게나마 러시아 혁명과 같은 모델을 추구한다는 것에 공감대를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청년보스니아 운동은 단계적인 개혁 전술에 등을 돌리고 갈수록 테러리즘 쪽으로 경도됐습니다. 피 끓는 젊은 운동가들은 테러리스트 전술과 ‘순교자’를 향한 열망에 사로잡혀갔던 것이죠. 


1912년이 되자 청년보스니아의 일부 조직원들은 세르비아 극우파 혁명조직과 직접 접촉하기 시작했습니다. 세르비아의 이 조직은 처음엔 ‘크르나 루카 Crna ruka (검은 손)’이라 불렸지만 나중에는 ‘죽음의 연대(Ujedinjenje ili Smrt)’라 불렸다고 합니다. 크르나 루카를 움직이는 것은 세르비아 정부에서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는 군 간부들이었습니다.


1903년 오브레노비치 왕조의 마지막 왕인 알렉산드르 오브레노비치를 죽인 것이 바로 그들입니다. 오브레노비치 살해를 주도한 군 장교 드라구틴 디미트리예비치 Dragutin Dimitrijević 는 세르비아에서는 ‘아피스 대령’ 혹은 ‘넘버6’ 등의 별명으로 알려졌던 악명 높은 암살자였습니다. 


'암살자 아피스'(가운데)와 공모자들 /위키피디아


오브레노비치 왕조를 무너뜨리고 왕위에 오른 페트르는 크르나 루카를 개인적으로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뭐래도 그들은 전 국왕을 살해한 대역죄인들이었고, 새 국왕인 페트르의 통제에서도 벗어나 있었으며 페트르의 정책을 훼방 놓을 때도 많았으니까요. 하지만 합스부르크 제국에 반대하고 대 세르비아를 주창하는 그들이 필요했기에 페트르는 그들의 존재를 묵인했습니다. 크르나 루카는 청년보스니아를 통해 테러전술을 보스니아로도 수출했습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5년 동안 보스니아의 합스부르크 당국은 청년보스니아의 선동을 억누르기 위해 조직원들을 반역과 스파이 혐의로 우르르 잡아들여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그러자 보스니아의 젊은 세르비아계 혁명 세력은 더욱 더 폭력전술에 집중했습니다.


1914년 초여름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보스니아 순방에 나섰습니다. 그는 6월 28일 사라예보를 방문할 예정이었습니다. 그 날은 비도브단 축일(성 비나 St.Vitus 축일)이자 1389년 세르비아 군대가 투르크 군에 무참히 패배한 코소보 폴례 Kosovo Polje 전투 추모일이기도 했습니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이 날의 혈전을 역사적 치욕의 기록으로 삼고 ‘그날의 패배를 기억해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리라’는 구호를 신념처럼 여겼습니다.


대 세르비아의 이상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자 합스부르크 제국의 상징인 황태자를 해치울 기회를 청년보스니아와 크르나 루카가 놓치려 할 리 없지요. 청년보스니아의 하수인으로 암살공격에 나선 가브릴로 프린치프 Gavrilo Princip 는 한 차례 우스꽝스러운 실수로 대공을 살해할 기회를 놓쳤습니다. 이대로 끝났다면 해프닝으로 남았겠지만, 그는 뒤이은 시도에서 대공과 부인을 암살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그 후의 일은 전 세계가 알고 있지요. 이 암살의 파장은 두 사람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실패로 돌아간 첫 시도, 두번째 총탄에 즉사한 대공


페르디난트 대공은 6월28일 부인 조피와 함께 기차로 사라예보에 도착, 승용차를 타고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세르비아 테러조직원들은 군중들 틈에 끼어 대공이 탄 차에 수류탄을 던졌으나 차가 예상보다 빨리 움직이는 바람에 수행원들만 부상을 입고, 대공은 침착하게 몸을 피했습니다.


페르디난트 대공이 암살당한 Latin (Princip) Bridge /위키피디아


페르디난트 대공은 사라예보 시청에 도착, 오스트리아제국 주둔군 사령관으로부터 폭동 조짐이 있으니 도시를 떠나라는 권고를 받았습니다. 테러조직원들은 대공이 시청 방문 뒤 사라예보를 떠나는 순간을 다시 노렸습니다. 페르디난트를 실은 차는 도시를 빠져나가기 위해 빨리 달렸지만 프린치프는 차가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는 강변의 굽은 길목을 노렸습니다. 차가 서서히 지나가는 순간 그는 도로로 뛰쳐나와 자동소총으로 먼저 임신 중이던 조피 대공비를 맞췄습니다. 두 번째 총탄에 심장을 맞은 대공은 부인의 이름을 부른 뒤 그 자리에서 숨졌습니다.


이 사건은 그 뒤 4년 동안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갈 참사의 전조였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소속돼 있던 ‘동맹국’ 멤버들은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보복공격을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건 한 달 뒤인 1914년 7월 오스트리아는 끝내 응징에 나서, 세계를 전쟁의 포연 속으로 몰고 갔습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