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상상 여행

33. 저물어가는 합스부르크, 헝가리와 '대타협'을 하다

딸기21 2013. 12. 29. 15:41

33.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대타협(Austro-Hungarian Ausgleich)


유럽 민족주의의 부상에 따른 당연한 결과로, 봉건적인 합스부르크 치하의 오스트리아 제국에는 암운이 드리워졌습니다. 오스트리아는 1848-49년의 격변을 간신히 헤치고 나오기는 했지만 이 성공은 합스부르크가 민족주의자 그룹들을 이간하고 내분을 일으켜 간신히 얻어냈던 것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다양한 민족들로 구성돼 있어, 반 제국 세력들이 단합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에 가서 봉건적인 제국을 밑바닥에서부터 흔든 것은 합스부르크 왕조 내 비 독일계 가신들의 반발이 아니라, 독일계의 민족주의였습니다.



자유주의-민족주의 진영은 독일연방 외부에 있는 독일계를 통합, 단일한 헌법적인 주체로 만들겠다며 1848년 독일 혁명을 일으켰으나 실패했습니다. 혁명세력은 처음에는 성공을 거두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통합되어 탄생할 독일이라는 국가의 성격을 놓고 기나긴 논란이 벌어져 왕당파에 반격할 시간을 주고 말았습니다. 상황은 다시 혁명 이전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때 독일 민족국가가 세워졌다면 아마도 왕조 국가가 되었겠지요.


1848년의 '실패한 혁명'은 독일 역사에 깊은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혁명의 실패로 '독일 민족국가'에 대한 혁명주도층의 생각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게 확인됐다는 점이겠지요. 이후 발전돼 나간 민족국가에 대한 관념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전신 격인 신성로마제국을 포함한 독일 남부 가톨릭 지역을 비롯해, 한때 독일계 민족들이 영토였던 땅을 모두 포괄하는 중세적인 ‘대독일’ 개념이었습니다.


Anton Von Werner가 1885년 그린 <독일 제국 선포식>. /위키피디아
1871년 1월 18일, 독일 황제가 베르사이유궁 '거울의 방'에서 독일 제국의 탄생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가운데 흰 옷을 입은 사람이 비스마르크라고 하네요.
화가는 이 장면을 앞서 2번이나 그렸는데 그림이 모두 부서져서 
비스마르크의 70세 생일에 맞춰 이 3번째 버전을 다시 그렸다고 합니다.


그 한편에서는 새로운 ‘소독일’ 개념도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대독일 개념이 제국에 대한 환상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면, 소독일 개념은 근대 민족국가를 이상으로 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합스부르크 제국 영토 전체가 아니라, 그 안에서도 전통적으로 ‘독일 땅’으로 여겨졌던 땅에 강력한 독일 민족국가를 건설하자는 것이었으니까요. 이를 주창하는 이들은 사실상 배타적인 독일 민족의 나라, 문화(종교)적으로는 프로테스탄티즘을 기본으로 하는 나라를 세우고 싶어 했습니다.

대독일이냐, 소독일이냐. 열쇠를 쥐고 있던 인물은 합스부르크 왕가가 아니라 프로이센의 총리였던 비스마르크 Otto von Bismarck (1862-90년 재위)였습니다. 


1866년 프로이센은 사도바(Sadova·쾨니히그라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에 승리를 거뒀습니다. 이어진 평화조약에서 합스부르크가는 이탈리아에서 얻어왔던 영토들을 내주고 북부 독일 지역의 일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1867년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통일된 독일 연방의 새 헌법을 발효시켰습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1815-1898년)


프로이센의 정치인입니다. 프랑스·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통해 독일 통일을 강력 추진, ‘철혈 재상’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프로이센의 융커(지방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괴팅겐과 베를린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 관직에 발을 들였습니다. 



비스마르크는 1848년 베를린에서 자유주의를 주창하는 ‘3월 혁명’이 일어났을 때 보수파를 이끌며 혁명 봉쇄에 앞장섰던 보수주의, 권위주의 정치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실패한 민족주의 혁명 뒤 독일이라는 '민족국가'를 세운 것은 비스마르크였다는 역사의 아이러니... 그는 1864년과 1866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해 북독일연방을 결성했고 1870-1871년에는 프랑스를 상대로 싸워 독일 통일을 이룩했습니다.

1871년에는 프로이센 왕을 황제로 하는 독일제국을 건설하고 첫 총리가 되어, 1890년까지 근 20년간 최고 권력자의 지위를 누렸습니다.


합스부르크는 독일 뿐 아니라 헝가리 민족주의자들로부터도 도전에 거듭 부딪쳤습니다. 그들은 1849년 봉기가 실패로 돌아간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가 실시한 억압정책에 격렬하게 저항했습니다. 프로이센에 패전해 위신이 구겨진 합스부르크 왕조도 결국에는 봉건주의에 머물러온 자신들의 제국이 어떤 상황에 부딪쳐 있는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됐습니다. 


합스부르크는 제국 내에서 가장 강력하고 일관되게 민족주의 운동을 벌여온 집단인 헝가리인들과 정치적인 타협을 하기로 했습니다. 제국 내부의 가장 위험한 도전자들을 통치 파트너로 인정해줌으로써 국력을 보전하고 유럽 열강들 내에서 정치적 위상을 잃지 않으려는 시도였습니다.


1867년 여러 가지 실질적인 목적을 담은 ‘대타협 Ausgleich’이 이뤄져, 오스트리아 제국에는 두 개의 분리된 나라가 생겨났습니다. 하나는 보헤미아와 슬로베니아를 포함해 합스부르크가에 부계 세습되는 오스트리아였고, 나머지 하나는 성 이스트반 대공의 봉토로 마자르족들이 자기들 땅이라 주장해온 헝가리였습니다. 



슬로바키아, 트란실바니아, 크로아티아, 바나트를 포함한 헝가리 공국은 부다페스트에 있는 헝가리 의회의 통치를 받았습니다. 동시에 두 나라의 절반씩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관할 영역이었습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남성 계승자들은 제국의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쪽 보헤미아 왕국의 왕인 동시에, 헝가리 왕국의 왕이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군 통수권과 외교권,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두 나라 모두와 관련 있는 재정적인 문제들에 대한 결정권도 황제가 가졌습니다. 하지만 이미 찬란한 영광의 시대가 저물어 '지는 태양'이 되어버린 제국... ‘대타협’은 합스부르크 왕가가 더 이상 16세기의 방식으로 19세기의 제국을 지배할 능력이 없음을 법적으로 공식화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급격히 '민족주의적인 민족국가들의 연합체'로 옮겨갔습니다.


어찌 되었든 합스부르크가는 대타협을 통해 수명을 연장했고, 제국 내에서 근근이 정치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비결은 가장 껄끄러운 상대인 헝가리계와 타협하는 동시에, 그 내부에 파벌들이 점점 늘어나 서로 치받도록 조장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형태의 이중국가 체제 속에서 왕가의 힘이 약해지고 있음을 숨길 수는 없었습니다. 두 민족 간에는 대타협이 이뤄졌지만, 독일계와 헝가리계가 아닌 민족들 사이에는 무시당하고 있다는 불평이 쌓였습니다. 


오스트리아 쪽에서는 체코계의 불만이 컸습니다. 체코계는 자신들도 헝가리계와 역사적으로 대등한 위치에 있었던 만큼 헝가리계와 같은 권리를 누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독일계는 자신들이 제국 내에서 더 큰 정치권력을 누려야 마땅한데 정당한 몫을 얻어내지 못했다며 볼멘소리를 냈습니다. 더군다나 합스부르크가는 헝가리 내에 거주하던 체코계와 독일계에 대해서는 마자르족이 마음대로 통치하도록 내버려두었습니다. 마자르족은 자신들만의 실질적인 독립 국가를 세워야 한다고 믿고 있었기에, 타민족에 대한 처우는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1867년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 엘리자베트 황후가 헝가리 부다에서
헝가리의 왕과 왕비로 공식 책봉되는 모습을 담은 그림. 
(Szalay József–Baróti Lajos: A magyar nemzet története /1895)
명목상 두 사람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주였지만 
'대타협'을 통해 사실상 오스트리아는 '헝가리 지역'의 통치권을 포기한 셈이었습니다.



★마자르족


마자르족은 시베리아 서부의 우고르족과 투르크족의 혼혈로 형성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들은 5세기 초 카스피 해 부근으로 이주했으며, 9세기에는 슬라브족과 훈족을 정복하고 현재의 헝가리 지역에 정착했습니다. 유럽인들은 같은 동방계인 훈족과 마자르족을 혼동, 마자르족의 나라를 ‘훈가르(Hungar·훈족의 나라)’라 불렀고 이것이 오늘날의 헝가리가 됐습니다. 


루마니아의 세클레르 마을 /위키피디아


마자르족은 지금 대부분 헝가리에 살지만 루마니아의 자치지역에도 약 90만 명이 살고 있습니다. 루마니아의 마자르족은 국경지대에 주로 거주하기 때문에 통칭 세클레르(Szeklers·‘국경수비대’)라 불린다고 하네요. 세클레르는 헝가리에서는 세켈롁(Székelyek)이라고도 하는데, 원래는 '세켈롁 땅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독일계도, 헝가리계도 아닌 민족들은 주로 오스트리아 국경에 가까운 헝가리의 절반 쪽에 몰려 살았습니다. 마자르족의 인종차별적인 정책들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정치적 불안정은 가중됐습니다. 크로아티아계는 1848-1849년 합스부르크가 편에 서서 헝가리와 전쟁을 치른 데에 대한 보상을 바랐습니다. 하지만 왕가로부터 아무 것도 얻어내지 못하자 분노가 쌓였습니다.


합스부르크가는 편의상 헝가리계라는 특정 민족 집단과 거래해 그들에게 다민족으로 구성된 제국을 유지하는 데에 드는 비용부담을 떠맡겼으나, 이로 인해 내부의 민족주의 운동은 오히려 더 많아졌습니다. 제국이 존재하는 한 여러 민족들의 반발은 더욱 심해져 제국의 기반을 침식할 터. 다민족 제국 내에서 민족주의와 자유주의 요구는 커질 수밖에 없고, 그것들은 결코 제국과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대타협은 1848년의 혁명들과 마찬가지로 이 불일치를 입증해 보여주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