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상상 여행

32. 1848-1849년 오스트리아 제국을 휩쓰는 혁명의 물결

딸기21 2013. 11. 17. 22:50

32. 1848-1849년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일어난 혁명들


1848-49년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연달아 혁명이 일어납니다. 그 씨앗을 뿌린 것은 요제프2세 Joseph II (1780-90년 재위)였습니다.

요제프는 다른 유럽의 왕실들처럼 지리적으로 통일된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비엔나 중앙정부의 권력을 강화하는 조치들을 취했습니다. 그 중에는 독일어를 제국의 행정에 쓰이는 공식 언어로 만드는 것도 들어있었습니다. 
이것이 제국 내 비독일계 국민들의 반작용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민족'의 시대... 민족을 구성하는 핵심 중의 하나가 바로 '언어'죠.


봉기에 나선 비엔나의 학생들. 이들의 봉기는 1848년 3월 13일 메테르니히 반동통치의 종말로 이어졌습니다. /위키피디아



귀족들과 지식인들은 지방분권과 전통문화를 강조하며 반발했습니다. 요제프가 죽자마자 그가 취했던 조치들은 다시 무효로 돌아갔습니다. 오히려 ‘독일화’에 대한 두려움을 달래기 위해 합스부르크 왕가는 비엔나 대학에 1791년 슬라브어 강좌를 만들고 비독일계 봉신들에게 사실상 공식적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문화적 특권을 인정해줬습니다.


이런 상황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헝가리계였습니다. 

11세기 이후 마자르 귀족들의 문어(文語)는 출신 민족과 상관없이 라틴어였습니다. 1770년대에 라틴어를 마자르어로 바꾸려는 움직임이 일어났으나 요제프2세의 ‘독일화’ 조치들 때문에 진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1840년대에 민족 언어를 사용하려는 운동은 자유주의, 민족주의 운동으로 발전했지만 곧 두 파벌로 갈라졌습니다. 
이스트반 세체니 Istvan Szeczenyi 가 이끄는 온건파들은 전통적인 귀족계급을 몰아내고 자유주의적인 사회제도를 만들자면서 개혁된 합스부르크 제국 내에서 비 마자르족과도 다문화적 연대를 이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러요시 코슈트 Lajos Kossuth 를 따르는 급진파들은 즉각적인 자유주의 개혁을 요구하면서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독립해, 마자르 귀족계급이 다스리는 마자르족의 국가로서 헝가리 왕국을 다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스트반 세체니(1791-1860)


세체니는 19세기 헝가리의 개혁운동가로, 유서 깊은 헝가리 귀족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참전과 유럽 여행 등을 통해 서유럽의 근대화를 직접 접한 그는 봉건제도에 머무르고 있던 헝가리 개혁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가문의 수입을 헝가리 과학발전 기금을 내놓고, 정치 토론을 위한 클럽들을 만들었으며 1830년에는 다뉴브 강에 증기선이 다니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여러 저서를 발표해 경제발전을 촉구하고 기득권에 매달리는 구시대적인 귀족들을 비판했습니다. 


이스트반 세체니. 그림 위키피디아


그러나 한동안 대중적 지지를 받던 그의 개혁운동은 1840년대가 되자 러요시 코슈트가 이끄는 ‘2세대’ 급진파 개혁운동에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말년에는 정신질환을 얻어 고통 받았고, 오스트리아 제국의 탄압까지 가중되자 1860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헝가리계의 움직임은 이랬고... 다른 민족집단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합스부르크의 독일화 조치에 대한 체코계의 대응은 ‘범슬라브주의’였습니다. 1792년 요제프 돔브로프스키 Joseph Dombrowski가 주창한 범슬라브주의는 처음에는 슬라브 언어학자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학구적이고 지적이고 낭만적인 운동이었습니다. 이들은 슬라브어가 세 갈래 주요 언어집단들로 갈라지기 전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 모든 슬라브 어족(語族)들이 한 뿌리에서 나왔음을 강조했습니다. 모든 슬라브 민족들은 하나의 동포이므로, ‘대(大) 슬라브 연합’을 통해 모든 민족들이 하나로 통일되어야지만 미래가 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주도할 수 있는, 슬라브족이 믿을 수 있는 현존하는 독립 국가는 러시아 하나뿐이었습니다. 체코인들의 범슬라브주의는 파벨 샤파르지크 Pvel Šafařík 와 얀 콜라르 Jan Kollar 등 언어적으로 연결돼 있는 슬로바키아 지식인들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이들은 프라하로 달려와 떠오르는 범슬라브주의에 목소리를 보탰습니다.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가장 군사적인 형태로 나타난 곳이 크로아티아였습니다. 나폴레옹 시절 일리리아주로 편입됐던 크로아티아에는 강력한 귀족관료계급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헝가리 의회에서 활발한 정치활동을 벌이고 있었고, 프랑스가 점령하기 이전부터 지방 행정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크로아티아인들은 또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자신들만의 민족 문자를 쓰고 있었습니다.


1840년대에 크로아티아 귀족들 사이에서 류데비트 가이 Ljudevit Gaj 가 이끄는 남슬라브 운동(‘일리리아 운동’이라고도 합니다)이 일어났습니다. 이들은 고대 일리리아인들이 슬라브와 같은 민족이었다는 ‘신화’를 발전시켜,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와 정치적 능력이 발칸의 다른 어떤 슬라브인들보다도 우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앞으로 출범할 발칸 슬라브 연합을 주도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민족집단들이 할거하는 가운데, 제국의 중심인 비엔나는 혁명의 물결에 휩싸입니다.


1848년 프랑스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나자 그 영향을 받아 합스부르크 제국 내 여러 독일계 지역들에서도 입헌 정부들을 출범시키기 위한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비엔나 회의 이후 대륙의 여러 왕조들이 밀어붙인 억압적인 행태에 대한 반작용으로 급진적인 자유주의가 중부와 중동부 유럽을 휩쓸었습니다. 이들은 메테르니히로 대변되는 정치질서를 전복시키고자 했습니다.


비엔나 거리에서는 ‘3월 폭동’이 일어났고, 부다페스트와 프라하에서는 민족주의자들이 혁명 의회를 소집했습니다. 프라하에서는 체코인들이 범(凡) 슬라브 의회를 열어 독일과 오스트리아 왕조들에 일격을 가했다. 이를 계기로 다양한 자유주의자들의 의회들이 생겨났다. 메테르니히는 사임하고 합스부르크 제국을 떠나 피신했다.


1849년 헝가리 혁명군의 빌라고스(Világos) 패배를 그린 그림. István Szkicsák-Klinovszky의 작품입니다. /위키피디아



하지만 그해 9월 합스부르크 군대가 체코 민족주의자들과 범슬라브주의자들을 프라하에서 몰아낸 것을 시작으로 혁명 분위기에 대한 반동의 물결이 일어났습니다. 여러 민족 진영은 혁명 와중에 갈라집니다. 크로아티아인들은 헝가리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요시프 옐라치치 Josip Jelačić 가 이끄는 크로아티아 독립 세력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헝가리를 침공했습니다. 


헝가리인들은 합스부르크를 향해 자치 요구를 드높이면서 10월에 오스트리아를 공격했지만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비엔나에서는 다시 혁명의 파고가 높아졌으나 합스부르크의 맹공으로 곧 진압됐습니다. 급진파 혁명 지도자들은 처형됐습니다.


합스부르크 황제 페르디난트1세 Ferdinand I (1835-48년 재위)는 12월에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뒤를 이은 프란츠 요제프(Franz Joseph·1848-1916) 황제는 전임자들이 맺은 헌법적인 약속들을 지킬 의무가 없다고 생각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제국에 남아 있는 마지막 혁명군 잔당인 헝가리를 공격했습니다. 1849년 3월 새로 공포된 헌법은 표면적으로는 의회에 입법권을 주고 내각에 권한을 부여하는 듯했으나 사실은 합스부르크 황제에게 제국의 모든 권력을 집중시키는 것이었습니다.


1953년 프란츠 요제프 황제 암살 시도. JJ 레이나 그림. 비엔나 역사박물관 소장. /위키피디아


그러자 헝가리인들은 합스부르크 통치로부터의 독립과 마자르족의 국가인 헝가리의 건국을 선언했습니다. 마자르 의회는 코슈트를 통치자로 선출하고 마자르 이외 민족을 차별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그러나 세르비아계와 루마니아계가 바나트와 트란실바니아에서 혁명 운동을 일으키고 오스트리아와 크로아티아가 침공해 들어온 탓에, 헝가리 독립 국가는 그 해 8월 출범한지 다섯 달 만에 무너졌습니다.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1세 Nicholas I (1825-55년 재위)도 군대를 보내 헝가리를 공격했습니다. 그해 말 헝가리 군대는 참패를 겪었고 헝가리는 다시 합스부르크의 통치에 복속됐습니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혁명의 폭풍을 넘는 데에 가까스로 성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