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상상 여행

31. 1830년, 발칸 반도의 '검은 조르제'

딸기21 2013. 11. 4. 15:07

31. 1830년 세르비아·그리스 혁명 뒤의 발칸 반도


어느새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몰락의 길을 걷고 있고... 제국의 갈라진 틈을 거대한 균열로 만드는 것은 '봉기', 수탈당하던 사람들의 저항이겠지요. 1804년 베오그라드에서 투르크 주지사의 혹정에 시달리던 세르비아인들이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1차 세르비아 봉기라고 불리는 봉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오스만 중앙정부의 대응이 참 희한합니다. 주지사 측과 민중들이 싸우는데, 일단 베오그라드의 혼란을 무마해야 하니 반란군에게 오히려 무기를 줘서 이기게 만듭니다. 주지사는 내팽개치더라도 일단 질서회복부터.... 라는 걸까요. 힘 빠진 제국은 변경의 소란에 이렇게 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겠지요.


1804년의 세르비아 봉기를 그린 그림. /우리나라이든 남의 나라이든, 이런 봉기 그림을 보면 저는 무서워요. 대개의 '반란'은 학살과 참수와 고문과...뭐 그런 것들로 끝나니. ㅠㅠ /위키피디아



세르비아 반란군을 이끈 것은 돼지를 사고파는 일을 하던 조르제 페트로비치 Djordje Petrović 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덩치가 크고 피부가 시커멓다 해서 ‘카라조르제 Karadkordje’ 즉 ‘검은 조르제’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겉으로는 상인이었지만 사실은 마적 떼의 두목이나 다름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어찌 됐든 그는 이런 출신 때문에 중산층과 사회의 일탈계층 모두에게서 지지를 얻었습니다.


특히 세르비아인들 중에서도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사이 오스만 제국에서 이주해와 보이보디나, 슬라보니아 지역에 정착했던 이들이 반란군을 적극 지지했습니다. 이들은 합스부르크에 점령된 지역에서 투르크 군에 맞서 국경수비대로 복무하면서 일종의 문화적 특권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들은 세속주의와 민족주의라는 새로운 개념들을 비롯해, 서구와 러시아의 지적인 흐름을 다른 이들보다 빨리 접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세르비아인들이 봉기를 일으키자 이들은 카라조르제에게 자원군과 군수품을 보내며 밀어줬습니다. 이들 ‘이주 세르비아인’ 반군들은 또한 러시아와도 군사적 연계를 맺으려고 애썼습니다. 이것이 1806년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간 전쟁이 일어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그 해 카라조르제의 반군은 베오그라드를 장악했습니다. 


카라조르제의 초상화. 세르비아국립박물관 소장 /위키피디아



반군의 목표는 처음에는 베오그라드에서 오스만 제국의 ‘합법적 통치’를 회복시키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투르크인 현지 관리들의 학정에만 초점을 맞춰 반기를 들었던 것이죠. 그러나 ‘이주 세르비아인’들의 영향을 받아, 이내 세르비아의 독립을 위한 투쟁으로 반란의 성격이 바뀌었습니다. 


자, 이제 오스만 제국의 대응은 어떻게 바뀔까요? 주지사에 반기를 든 피지배자들을 편들어 못된 주지사를 내몰았는데 이제 피지배자들이 아예 '민족의 독립'을 들고 나오니, 제국 또한 '용인'에서 '진압'으로 대응을 바꿉니다. 1807년 러시아와의 휴전조약이 성사되자마자, 오스만 군대는 반군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에 들어갑니다.


1809년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이 때부터는 학자들이 현대식 국가명인 '터키'라는 호칭과 혼용하는 듯)과 조약을 갱신했습니다. 1812년 러시아가 오스만과 '부카레스트 조약'을 맺었습니다. 이 조약으로 러시아는 몰다비아 지역의 동쪽, 즉 베싸라비아를 손에 넣었습니다. 세르비아인들도 일부 자치를 인정받았습니다. 형식적으로는요. 하지만 실상 세르비아인들은 러시아와 터키의 조약으로 인해 끈 떨어진 신세가 됐습니다. 나폴레옹의 침공을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죠. 게다가 반군은 내분에 휩쓸렸습니다. 


1812년의 동유럽. 


더 확대해 보면, 1812년 무렵의 유럽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위키피디아


오스만은 1813년 세르비아를 다시 정복했습니다. 카라조르제는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도망쳤고 봉기는 사그라들었습니다. 무려 9년여에 걸친 기나긴 세르비아 독립투쟁의 한 장은 막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억눌린 사람들의 분노가 그대로 사그라들 리는 없는 법. 1815년 세르비아인들은 다시 오스만에 맞서 2차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이번에는 오스만 통치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처음부터 목표로 내걸었습니다. 카라조르제는 여전히 서유럽에 망명 중이었기 때문에 중산층 출신인 밀로슈 오브레노비치 Miloš Obrenović 라는 인물이 봉기를 주도했습니다.


오브레노비치는 카라조르제와는 사뭇 다른 수완가였습니다. 오브레노비치는 개인적으로 카라조르제에 대한 증오심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카라조르제가 자신의 이복형을 독살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오브레노비치는 집요한 군사 지도자이자 교활한 외교관이었다. 그는 투르크 관리들을 교묘하게 매수하는 데에도 선수였습니다. 그 덕에 오브레노비치는 1817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오스만령 세르비아 자치주의 대공’ 칭호를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카라조르제가 망명에서 돌아오니, 당연히 싸움이 붙을 수밖에. 카라조르제는 오브레노비치의 친 투르크적인 태도를 비판하다가 오브레노비치 지지자에게 암살을 당했습니다. 각기 미래의 세르비아 왕국의 왕실을 꿈꾸고 있던 두 세력 사이에 봉건적인 혈투가 벌어졌습니다. 이 내분은 훗날 20세기의 세르비아 정치에까지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봉기를 선언하는 세르비아인들. Paja Jovanovic 의 작품으로, 베오그라드 국립박물관 소장. /위키피디아



세르비아와 마찬가지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그리스 쪽으로 옮겨가 보지요.


이스탄불 파나리오테스(등대지구)의 그리스인들은 오스만 제국 내에서 상업을 주도했기 때문에 투르크인이 아닌 여러 민족들 중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경제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 덕에 서유럽, 러시아와 직접 접촉할 수도 있었고요. 그리스인의 무역 거점들이 유럽 전역과 러시아 흑해 해안에 만들어져서, 서유럽과 러시아의 새로운 사상적 흐름을 오스만 내 그리스계 상인 계급에 전달하는 통로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스 무역거점의 주민들은 그리스 민족주의의 선구자들이었습니다. 1814년에는 이들이 유럽 내 그리스계 거점들을 중심으로 ‘헤타이리아 필리케(Philike Hetairia 혹은 Eteria Filiki·우리말로는 '벗들의 모임' 혹은 '동지회' 정도가 되겠군요)’라는 비밀결사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같은 정교 국가인 러시아에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그리스인 이오아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가 알렉산드르1세 차르 시절 러시아 내각에서 외무장관을 맡기도 할 정도로 양측은 가까워졌습니다.


1821년 상인계급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인들이 오스만 제국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때마침 러시아는 제해권을 강화하기 위해 지중해로 접근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인 장군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 Alexandros Ypsilantis 가 이끄는 러시아 군은 오스만 땅인 루마니아 공국을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이 공격은 실패에 그쳤습니다. 부자가 망해도 3대는 가는 법... 그리스인들은 1세기 전부터 루마니아 공국을 파나리오테스가 사실상 통치했기 때문에, 루마니아가 그리스화 즉 '반 오스만화' 돼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는 착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점령에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스만 군대는 이 싸움에서 역시 노쇠함을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억압받던 그리스인들 사이에서는 ‘분열되고 쇠약해진 오스만 군대에 맞서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는 그리스 반군의 무용담’이 널리 퍼졌습니다.


1821년 오스만 제국에 맞선 그리스 봉기를 기리는 헤타이리아 필리케의 서약문. 그리스 아테네의 벽에 새겨진 것이라고 합니다. /위키피디아



★헤타이리아 필리케


흑해 연안의 오데사에서 그리스 상인 14명이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을 수도로 하는 그리스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결성한 비밀 조직입니다. 한때는 조직원이 20만 명에 달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의 지휘 하에 현재의 루마니아 지역을 점령하기 위한 군사행동에 들어갔지만 루마니아인들로부터 지지를 얻지 못한데다가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1세로부터도 기대했던 지원을 얻지 못해 실패했습니다. 이후 결사는 힘을 잃고 무너졌습니다.


그리스인들의 봉기에 대한 오스만의 첫 번째 반응은 파나르(Phanar, Fener 이스탄불의 그리스인 지역)의 정교 총대주교 성당에 그리스인 총대주교를 매달아 죽인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1824년 오스만은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제국 내에서 유일하게 믿을 만한 군사력으로 남아 있던 이집트인 부대를 불러들였습니다. 반군은 이집트 군대와의 전쟁에서 밀려 우왕좌왕했습니다.


어쩌면 오늘날 '이슬람 터키'에 대해 '기독교 유럽'이 갖고 있는 반감이 현대 정치사에서 두드러지기 시작한 계기가 이 사건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이집트 부대가 그리스인들을 진압할 것으로 보이자 서유럽 국가들에서는 그리스의 독립운동에 대한 낭만적인 공감과 함께 ‘무슬림들에게 도륙당하는 그리스의 기독교 형제들’에 대한 동정론이 퍼졌습니다. 참 우습죠? 그리스의 전신인 비잔틴 제국이 오스만 세력에 잡아먹히게 만든 1등 공신이 바로 '서유럽 십자군'이었는데 말이죠 ㅎㅎ 역사란 그런 것인가봅니다.


미솔롱기(메솔롱기온)에서 전사한 영국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을 비롯해, 서유럽의 지원병들이 그리스 반군에 합류했습니다. 지원병 중 상당수는 그리스인들을 고대 그리스 문명의 직접적인 후계자로 착각하고 전쟁에 뛰어든 이들이었습니다. 


이스탄불의 그리스 정교 대학. 사진 panoramio.com



처음에 그리스에 이것은 개인적인 운동 차원이었고요, 유럽 각국 정부들은 비엔나 합의에 따라 혁명운동에 대해서는 동조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를 도와야 한다는 여론이 고조되면서 영국, 프랑스, 러시아는 불개입정책을 고수하지 못하고 그리스 혁명에 끼어들고 말았습니다. 세 나라는 지중해 동부에 선단을 보내 그리스 반군을 지원했습니다. 1827년 3국 연합 지원세력과 반군은 나바리노 해전에서 이집트 군인들로 구성된 오스만 선단을 격퇴했습니다. 2년 뒤 그리스는 오스만으로부터 독립을 얻어냈습니다.


그리스인들과 1829년 에디르네 조약에 서명할 무렵 오스만은 러시아와도 또 다른 전쟁(1828-29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를 틈타 세르비아의 오브레노비치 가문은 오스만령 자치국가 지위를 따내고 세습 군주 자리를 굳혔습니다. 이런 자들은 항상 있지요, 민중의 봉기를 중간에서 가로채 가는 자들... 


또한 오늘날 아테네가 된 펠로폰네소스 반도 끝자락 나브플리온에서는 바바리아의 오토1세(Otto I·1832-62년 재위)가 다스리는 작은 왕국이 오스만으로부터 독립해 나갔습니다. 왈라키아와 몰다비아는 러시아에 점령돼, 투르크와 그리스 모두의 영향권에서 영원히 벗어났습니다. 이렇게 오스만은 찢겨져 나가고 있었습니다.